구루시마 쓰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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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루시마 쓰네키는 일본의 우익 운동가로, 오쿠마 시게노부 암살 미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겐요샤에서 활동했으며, 오쿠마 시게노부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이 사건은 정치적,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사후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그는 소후쿠지 현양사 묘지와 야나카 영원에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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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시마 쓰네키 | |
---|---|
기본 정보 | |
씨명 | 구루시마 쓰네키 |
한글 표기 | 내도항희 |
출생일 | 1860년 1월 31일 (안세이 6년 12월 30일) |
사망일 | 1889년 10월 18일 |
출생지 | 후쿠오카번 |
사망지 | 도쿄부 도쿄시 |
국적 | 일본 |
직업 | 불평사족, 정치 운동가 |
출신 학교 | 향양의숙 |
정치 운동 | 지쿠젠 공애 공중회, 현양사(1889년 퇴사) |
부모 | 구루시마 마타에몬 |
묘지 | 현양사 묘지 (숭복사), 야나카 영원 |
2. 생애
구루시마 쓰네키는 후쿠오카 번의 무사였던 구루시마 또자에몬의 차남으로 현재의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났다. 다카바란의 고시주쿠에서 수학하고, 겐시샤, 쥬이치학샤를 거쳐 1879년(메이지 12년) 4월 고요기주쿠에 입학했다.[2]
1883년(메이지 16년) 4월, 도쿄로 상경하여 나카에 초민에게서 불어를 배운 후, 지쿠젠 교아이 공중회와 도야마 미쓰루가 이끄는 겐요샤에 참가했다. 잠시 오가사와라 제도에 겐요샤 동료인 마토노 한스케, 다케시타 도쿠지로와 함께 건너가, 그곳으로 보내진 조선 개화당의 김옥균과 함께 지내며 조선의 정치 개혁에 대해 논의했다.
오쿠마 시게노부의 조약 개정안에 반대하여 겐요샤를 퇴사했다. 퇴사 이유는 다른 사원이 공범 관계를 의심받아 형사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겐요샤 동료 쓰키나리 고타로도 계획에 가담했으나, 노모와 처자를 둔 쓰키나리를 속이고 단독으로 거행했다.
1889년 10월 18일, 외무성에서 돌아오던 오쿠마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 오쿠마의 발밑에서 폭발했고,[2] 구루시마는 그 자리에서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2] 오쿠마는 목숨을 건졌지만,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2] 이 사건으로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은 총사직하고, 조약 개정은 좌절되었다.[2]
이후, 친분이 있었고 잠자리도 함께 했던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저서 『백마』에서 구루시마가 자결할 것을 암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밝혔다. 또한, 스기야마는 구루시마가 상경할 때 시기가 아니라고 만류했으나, 하야시 오스케라는 사람에게 편지를 남긴 채 상경했다고 한다.
2. 1. 초기 생애
후쿠오카 번의 무사였던 구루시마 또자에몬의 차남으로, 현재의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났다.다카바란의 고시주쿠에서 수학하였고, 겐시샤, 쥬이치학샤를 거쳐 1879년(메이지 12년) 4월 고요기주쿠에 입학하였다.[2]
1883년(메이지 16년) 4월, 도쿄로 상경하여 나카에 초민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운 후, 지쿠젠 교아이 공중회와 도야마 미쓰루가 이끄는 겐요샤에 참가하였다. 잠시 오가사와라 제도에 겐요샤의 마토노 한스케, 다케시타 도쿠지로와 함께 건너가, 그곳으로 보내진 조선 개화당의 김옥균과 함께 지내며 조선의 정치 개혁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2. 2. 교육 및 사상 형성
타카바란의 코시주쿠에서 배우고, 켄시샤, 쥬이치학샤를 거쳐 1879년(메이지 12년) 4월, 코요기주쿠에 입학했다.[2] 1883년(메이지 16년) 4월, 상경하여 나카에 초민에게서 불어를 배웠고, 치쿠젠 교아이 공중회 및 토야마 미츠루가 이끄는 겐요샤에 참가했다.2. 3. 겐요샤 활동과 오가사와라 제도 체류
1883년 4월, 상경하여 나카에 초민에게서 불어를 배운 후, 지쿠젠 교아이 공중회와 도야마 미쓰루가 이끄는 겐요샤에 참가하였다. 잠시 오가사와라 제도에 겐요샤의 마토노 한스케, 다케시타 도쿠지로와 함께 건너가, 그곳으로 보내진 조선 개화당의 김옥균과 함께 지내며 조선의 정치 개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2]2. 4. 오쿠마 시게노부 암살 미수 사건
1883년 나카에 초민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운 후, 지쿠젠 교아이 공중회와 도야마 미쓰루가 이끄는 겐요샤에 참가했다. 잠시 오가사와라 제도에 겐요샤의 마토노 한스케, 다케시타 도쿠지로와 함께 건너가, 그곳으로 보내진 조선 개화당의 김옥균과 함께 지내며 조선의 정치 개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그 후, 오쿠마 시게노부의 조약 개정안에 반대하여 겐요샤를 퇴사했다. (퇴사 이유는 다른 사원이 공범 관계를 의심받아 형사 책임을 져야 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도 한다). 계획에는 마찬가지로 겐요샤의 사원이던 쓰키나리 고타로도 가담했으나, 노모와 처자를 둔 쓰키나리를 속이고 단독으로 거행했다.
1889년 10월 18일, 외무성에서 돌아오던 오쿠마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 안으로 들어가 오쿠마의 발밑에서 폭발했다.[2] 구루시마는 그 자리에서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2] 향년 29세. 오쿠마는 목숨을 건졌지만, 얼굴과 손에 경상, 오른쪽 무릎과 발목에 중상을 입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2] 이전부터 조약 교섭에 반발하고 있던 각료들은 구로다 기요타카 수상에게 조약 개정 교섭 중지를 요구했다. 이로 인해 구로다 내각은 총사직에 몰리고, 조약 개정은 좌절되었다.[2]
3. 오쿠마 시게노부 암살 미수 사건의 영향
제공된 참조 소스에 구루시마 쓰네키의 오쿠마 시게노부 암살 미수 사건이 일본 사회와 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
4. 사후 평가 및 논란
구루시마 쓰네키는 오쿠마 시게노부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힌 인물로, 그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구루시마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로 칭송한다. 특히 현양사를 비롯한 우익 단체들은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며, 그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들은 구루시마의 저격이 불평등 조약 개정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구루시마의 행동을 테러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들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한 구루시마의 행동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의 저격이 오히려 조약 개정 협상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구루시마의 묘소에 대해서는 야나카 영원과 소후쿠지 두 곳에 묘소가 있다는 언급이 있다.
4. 1. 묘소


구루시마 사후, 히로타 도쿠헤이에 의해 묘비가 기증되었고, 하카타의 현양사 묘지(소후쿠지)에도 묘가 세워졌다. 가쓰 가이슈에 의해 야나카 영원에도 묘가 만들어졌다. 해당 묘는 이후 도야마 미쓰루에 의해 개축되었지만, 최초의 묘석도 옆에 눕혀서 보존되어 있다.
5. 일화
오쿠마 시게노부는 치료 후 구루시마에 대해 "폭렬탄을 던진 녀석을 결코 미친 인간으로, 밉살스러운 녀석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게곤 폭포에 뛰어드는 겁쟁이보다는 훨씬 훌륭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변변찮게 외무대신인 나에게 폭렬탄을 먹여 여론을 뒤엎으려 한 용기는, 만용이든 무엇이든 감탄스럽다"라고 평가했다[3]. 고쿠보 키시치는 매년 구루시마의 기일을 챙겼지만, 오쿠마는 매년 법요에 대리인을 보냈으며, 오쿠마 사후에도 양자인 오쿠마 노부쓰네에 의해 대리인 파견이 계속되었다[3].
도야마 미쓰루는 구루시마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으며 "천하의 언론은 그대의 일격만 못하다"라며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조약 개정에 매달리는 정부를 타파한 구루시마를 칭찬했다.
구루시마가 배웠던 고시주쿠(통칭 당근밭 학원)의 학원장 다카바 란은 구루시마의 폭탄 테러 사건에 대해 국제 정세와 일본의 국제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 얕은 생각이라고 비판했다[4]. 그러나 자결한 것에 대해서는 "살아서 메이지 시대의 가을부터 마음에 없는 달을 보네"라는 탄식의 노래를 읊었다[5].
구루시마는 하카타의 협객 "용감한 닌페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노 닌페이와 난투극을 벌여, 촛대로 오노 닌페이의 머리를 때려 부순 적이 있다.
구루시마의 묘비를 기증한 석공 히로타 도쿠헤이는 훗날 총리가 되는 히로타 고키의 아버지이다. 계획에 참여했던 쓰키 세이코타로는 히로타 고키 아내의 아버지, 즉 장인이다.
6. 대중문화 속의 쿠루시마 쓰네키
- 오자키 시로의 단편 소설 『바람 소소』는 오오쿠마 시게노부의 조난 사건을 구루시마의 시점에서 그린 작품이다.[1]
- 1969년 영화 『일본 암살 비록』 (토에이)에서는 배우 요시다 테루오가 구루시마 역을 연기했다.[2]
- NHK 드라마에서는 다음 작품에서 구루시마 쓰네키를 다루었다.[3] [4] [5]
방영 연도 | 작품명 | 배우 |
---|---|---|
1985년 | 봄의 파도 | 호리 타카히로 |
1997년 | 야회의 끝 | 하야시 쿠니시로 |
2013년 | 야에의 벚꽃 | 오히라 신지 |
참조
[1]
백과사전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平凡社
[2]
서적
凛―近代日本の女魁・高場乱
藤原書店
1997-03-01
[3]
서적
青年の為に
http://dl.ndl.go.jp/[...]
東亜堂
1919
[4]
서적
凛―近代日本の女魁・高場乱
藤原書店
1997-03-01
[5]
서적
凛―近代日本の女魁・高場乱
藤原書店
1997-03-01
[6]
서적
凛―近代日本の女魁・高場乱
藤原書店
199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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