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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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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양사는 1881년 일본에서 설립된 단체로, 초기에는 황실 존중, 국민 권리 옹호를 내세웠으나, 점차 대외 팽창과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며 정보 수집, 이면 공작, 테러 등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일본의 주요 전쟁에서 활동했으며, 흑룡회 등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으며, 쇼와 시대에는 정치 주류로 진화하여 일본의 정치와 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우익 정치인 및 야쿠자 조직과의 연관성, 제국주의 침략 정당화 등의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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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사
개요
이름현양사(玄洋社)
로마자 표기Gen'yōsha
유형극우 단체, 비밀 결사
활동 시기메이지 시대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창립일1881년
해산일1946년
창립자도야마 미쓰루
주요 인물고다마 겐타로, 히라오카 고타로, 스에히로 데쓰조, 오카와 슈메이
활동 지역일본 제국, 조선, 중국
목표국수주의 옹호, 아시아주의 옹호, 대외 강경론 주창
관련 단체흑룡회
역사
배경정한론을 주장하던 후쿠오카현의 검객 집단 교후샤 (향우사)의 후신
주요 활동국권 확장 운동
대륙 낭인 양성
정치 테러
국수주의 및 아시아주의 선전
영향일본 극우 및 아시아주의 운동에 큰 영향
해체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에 의해 해체
이념 및 성향
정치 성향극우, 국수주의, 아시아주의, 대륙 팽창주의
주요 주장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 강화
국방력 강화 및 대외 팽창 정책 추진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 및 서구 열강 배척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 탄압
조직
조직 형태비밀 결사
주요 구성원낭인
정치가
군인
기업인
지식인
평가
긍정적 평가아시아주의를 내세워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존재함.
부정적 평가국수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정치 테러를 자행했다는 비판이 있음.
극우 단체로서 일본 사회의 반민주주의적 경향을 강화했다는 비판이 있음.

2. 주요 활동

현양사는 일본 국내 정치와 대외 관계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초기에는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여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등 삿초번벌 정부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정부와 결탁하여 선거에 개입하고 1889년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폭살 미수 사건과 같이 테러를 포함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양사의 사칙(社則)은 "황실 존중", "애국", "인민의 권리 수호"를 표방했지만, 실제 활동은 일본의 국권 강화와 팽창주의적 목표 달성에 집중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범아시아주의를 내세우며 중국의 쑨원, 조선김옥균박영효, 인도의 라쉬 비하리 보스 등 아시아 각국의 독립 운동가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서구 열강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아시아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특히 동학 농민 운동 당시 현양사가 개입을 선전했다는 기록[24][25]이나, 필리핀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 무기 지원을 시도한 것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정보 수집과 비밀 공작 활동은 현양사의 핵심적인 역할 중 하나였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등 일본이 관련된 수많은 전쟁에서 현양사의 정보망과 공작 능력은 일본군에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1901년에는 해외 공작을 전담하는 '''흑룡회'''를 설립하여 활동을 더욱 강화했으며, 대륙낭인들을 동원하여 신해혁명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을 이어갔다. 러일 전쟁 당시 아카시 모토지로러시아 내부 교란 공작은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일 병합 문제에 있어서는 우치다 료헤이가 일진회이용구와 연계하여 양국 간 대등한 합방을 주장하는 등,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는 현양사 출신 정치인들이 등장하면서 주류 정치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나카노 세이고처럼 식민지에 대한 법적 평등 적용을 주장하거나 아시즈 고지로처럼 조선의 독립을 언급하는 등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나, 기본적인 활동 방향은 일본의 국익과 팽창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유지했다.

2. 1. 초기 활동과 자유민권운동

1873년(메이지 6년) 정한론을 주장하다 메이지 6년 정변으로 하야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1874년 1월 12일 '''애국공당'''을 조직하고, 1월 17일 정부에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했다[11]. 이는 일본 최초로 '애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정치 결사였다[11]. 1877년 세이난 전쟁 이후, 고치의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서 배운 도야마 미쓰루1879년 귀향하여 자유민권운동 결사체인 '''향양의숙'''(向陽義塾)을 설립했다[11]. 이것이 현양사의 전신이며, 사장은 하코다 로쿠스케, 간사는 도야마 미쓰루와 신도 기헤이타였다.

1881년(메이지 14년), 향양사는 현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 후쿠오카 번 출신 사무라이들이 중심이 되어 히라오카 고타로를 사장으로 추대했으며, 도야마 미쓰루, 하코다 로쿠스케, 오하라 요시타케, 후쿠모토 니치난, 우치다 료고로, 신도 기헤이타, 스기야마 시게마루, 쓰키세이 고타로, 스에나가 준이치로, 다케이 시노부, 고가 소헤이, 마토노 한스케, 쓰키나리 이사오, 고다마 오토마쓰 등이 창립에 참여했다. 이들은 신문 '후쿠료 신보'를 창간했으며, 요시다 이소키치와 같은 협객이나 니로쿠 신보의 주필 스즈키 덴간 등도 관계를 맺었다. 초기에는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 회복과 같은 옛 봉건제 질서로의 복귀를 주장하기도 했으나[1], 세이난 전쟁 진압 이후에는 자유민권운동에 합류하여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정치 조직으로 활동했다.

현양사의 사칙(社則)은 "황실을 공경할 것", "본국(일본)을 아끼고 중시할 것", "인민의 권리를 굳게 지킬 것" 등이었다. 당시 사쓰마·조슈 번벌 정부의 관료 중심 정치(유사 전제)를 비판하며 의회 개설을 요구한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가 바로 현양사와 같은 민간 결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의회 개설 이후 정부와 손을 잡고 선거 간섭에 나섰는데, 이는 당시 의회가 "민력 휴양"을 내세우며 군사 예산 삭감을 요구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현양사는 테러를 포함한 격렬한 방식으로 선거에 개입했다.

현양사가 관여한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1889년 (메이지 22년)의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폭살 미수 사건이다. 오쿠마는 에도 막부 시절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을 추진했으나, 그 개정안이 외국에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전국적인 반대 운동에 부딪혔다. 오쿠마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자, 현양사 사원인 구루시마 쓰네키가 그에게 폭탄을 던지고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이 폭탄은 과격 자유민권운동가 오이 겐타로가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으로 오쿠마는 오른발을 잃었으나 뜻을 굽히지 않으려 했지만, 정부가 방침을 바꾸고 오쿠마가 사임하면서 타협적인 조약 개정안은 보류되었다.

2. 2. 대외 팽창과 범아시아주의

현양사는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맞서 인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권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외적으로는 아시아 각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이들 국가와 동맹하여 서양 열강에 대항하는 범아시아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아시아 대륙 침략을 목표로 삼았다. 단체의 이름 '현양사'는 일본한반도 사이의 현해탄에서 따온 것으로, 이러한 팽창주의적 의도를 반영한다.[2]

현양사는 목표 달성을 위해 테러와 폭력, 암살 등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했으며,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뿐 아니라 조직 범죄와 연루된 인물들도 가담했다.[1] 1889년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가 추진한 불평등 조약 개정안에 반발하여, 현양사 단원 구루시마 쓰네키는 오쿠마에게 폭탄을 투척해 암살을 시도했다. 오쿠마는 목숨을 건졌으나 다리를 잃었으며, 이 사건으로 개정안은 보류되었다.[3] 또한 1892년 선거에서는 정부의 묵인 하에 협박과 폭력을 동원한 선거 개입을 자행하기도 했다.

현양사는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타도를 목표로 삼합회와 같은 비밀결사에 접근했으며[4], 정보 수집과 침투를 위해 100명 이상의 단원을 파견했다. 이들은 중국 각지에 사창가 망을 구축하여 정보 수집 및 공작 거점으로 활용했으며, 삿포로에 관련 훈련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쑨원 등 신해혁명 지도자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침략을 염두에 두고 비밀리에 지형 측량 지도를 제작했으며, 청일 전쟁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동학 농민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다만 동학의 강령에 '배일'(排日)이 있었기에 실제 지원보다는 선전에 그쳤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24][25]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서울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 아래 현양사 단원들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또한 김옥균, 박영효 등 조선의 개화 운동가들을 지원하고 비호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라쉬 비하리 보스를 비호하거나, 필리핀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 무기 지원을 시도하는 등 다른 아시아 지역의 독립 운동에도 관여했다.

1901년에는 우치다 료헤이 등이 해외 공작 전담 조직인 '''흑룡회'''를 설립하여 활동 범위를 넓혔다. 흑룡회는 신해혁명 지원 등 대륙에서 더욱 활발한 공작을 펼쳤다.

현양사의 광범위한 정보망과 공작 능력은 청일 전쟁러일 전쟁 등 일본이 일으킨 주요 전쟁에서 일본군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현양사 단원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여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육군참모본부 차장 나가오카 가이시는 "아카시의 활약은 육군 10개 사단에 해당한다"고 평했으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역시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1910년 한국 병합 이후에도 범아시아주의 활동을 지속했으며, 국내에서는 공산주의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일본생산당'이라는 정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일 문제에 대해 우치다 료헤이는 일진회이용구와 함께 일본과 대한제국의 대등한 합방을 주장했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현양사는 비밀 결사에서 벗어나 주류 정치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히로타 코키, 나카노 세이고 등 현양사 출신 정치인들이 등장했다. 나카노 세이고처럼 조선대만에도 헌법을 적용하여 법적 평등(참정권 제외)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는가 하면, 도야마 미쓰루와 가까웠던 아시즈 고지로처럼 조선의 독립 기반이 마련되었다며 독립을 주장하고 만주국에 대한 관동군의 정치 지도를 비판하는 등 내부적으로 다양한 입장이 나타나기도 했다.

현양사 기념비


현양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1946년 강제 해산되었다.[6]

2. 3. 한반도에서의 활동과 제국주의 침략

현양사(玄洋社)는 그 이름부터 일본과 한반도를 가르는 현해탄(玄界灘)에서 따온 것으로[2], 창립 초기부터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아시아 대륙 침략을 선동하는 것을 실제 목표로 삼았다.[3][2] 이를 위해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뿐 아니라 조직 범죄에 연루된 인물들까지 동원하여 외국인과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폭력과 암살을 자행하는 테러 단체로 시작하였다.[1]:217

현양사는 한반도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미래의 침략을 예상하고 비밀리에 한국의 상세한 지형 측량 지도를 준비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동학 농민 운동이 과 일본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이는 동학 강령에 '배일'(排日)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으로[24], 진순신 등은 현양사의 지원 약속이 단순한 허풍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25][12] 또한, 조선의 친일 개화 운동가인 김옥균박영효 등을 비호하며 한반도 내정에 개입하려 시도했다.

현양사의 한반도 관련 활동 중 가장 악명 높은 사건 중 하나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서울 주재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의 사주를 받은 현양사 회원들이 주도적으로 실행한 것으로 추정된다.[5]

청일 전쟁러일 전쟁 시기에는 일본 제국 육군해군이 현양사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했다. 이들의 정보망은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었으며, 적 후방에서의 사보타주 활동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현양사 사원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러일 전쟁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여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육군참모본부 차장 나가오카 가이시는 그의 활약을 "육군 10개 사단에 해당한다"고 평했으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역시 "아카시 모토지로 혼자서 만주의 일본군 20만 명에 필적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다."라고 치켜세웠다.

1901년에는 우치다 료헤이 등이 현양사의 해외 공작을 담당하는 '''흑룡회'''를 설립하면서 더욱 노골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다. 우치다 료헤이는 친일 단체 일진회의 영수 이용구와 결탁하여, 일본과 대한제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1910년 한일 병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도 현양사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현양사와 관계가 깊었던 나카노 세이고 등은 대일본제국 헌법조선대만에도 시행하여 법률상 평등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 가까웠다. 한편, 도야마 미쓰루와 친분이 있던 아시즈 고지로(葦津耕次郎)는 국가로서 독립할 수 있을 정도의 조선 인프라 정비가 완료되었다며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는 당시 일본 내 다양한 의견 중 하나였을 뿐 현양사의 주된 노선과는 거리가 있었다.

2. 4. 정보 수집 및 비밀 공작

현양사는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등 일본이 관여한 여러 전쟁 기간 동안 군부, 관료, 자이바쓰, 정계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보 수집과 비밀 공작에 깊이 관여하였다.[2]

1881년, 도야마 미쓰루는 정보 수집과 중국 내 비밀 조직 침투를 목표로 100명 이상의 인원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삼합회와 같은 조직에 접근하였으며, 현양사 회원 히라야 아마네는 항저우에 현양사의 중국 본부를 세우고 삼합회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4] 현양사는 이러한 비밀 조직에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고, 청나라 정부로부터 탄압받는 지도자들에게 일본 내 피신처를 마련해주었다.

정보 수집을 위해 현양사는 중국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대규모 사창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운영하였다. 이는 단순한 자금원 확보를 넘어, 고객들을 협박하거나 정보를 빼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특히 정보를 얻는 데 능숙한 매춘부들을 고용하였으며, 이러한 공작원 양성을 위해 홋카이도 삿포로에 훈련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조선 역시 현양사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이들은 장래의 일본 침략을 염두에 두고 비밀리에 조선의 상세한 지형 측량 지도를 제작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는데, 이는 이 봉기가 청일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전략적 판단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서울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 아래 현양사 회원들이 실행에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5]

초기에는 일본 군부로부터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 제국 육군일본 제국 해군 모두 동아시아 전역에 퍼진 현양사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 네트워크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이 네트워크는 적 후방에서의 사보타주 활동에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러일 전쟁 당시 현양사 사원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러시아 제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여 러시아의 전쟁 지속 능력을 약화시키는 공작을 펼쳤고, 이는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 (일본) 차장 나가오카 가이시는 "아카시의 활약은 육군 10개 사단 (군사)에 해당한다"고 평가하였으며,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역시 "아카시 모토지로 혼자서 만주의 일본군 20만 명에 필적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1901년(메이지 34년), 우치다 료헤이는 현양사의 해외 공작을 전담하기 위해 '''흑룡회'''를 창설하였으며, 이를 통해 더욱 다양한 비밀 활동이 전개되었다. 흑룡회는 쑨원의 신해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대륙낭인을 동원하여 청나라 정부군 및 이후 군벌과의 전투에 참여시켰다.

2. 5. 일본 국내 정치 관여

현양사의 사칙 조항은 "황실을 공경하여 받들을 것", "본국을 애중할 것", "인민의 권리를 고수할 것"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내세웠다.[3] 이를 바탕으로 초기에는 자유민권 운동의 주요 세력이었으며,[3] 당시 삿초번벌 정부의 유사 전제(有司専制)를 비판하며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유력한 정치 세력 중 하나였다. 1885년 오사카 사건 당시에는 다른 자유민권 운동 단체들과 함께 봉기를 통해 메이지 유신의 과두 정치인들을 전복하려 시도하기도 했다.[3]

그러나 의회 개설 이후에는 입장을 바꾸어 정부와 일체가 되어 선거 간섭에 나섰다. 당시 의회가 "민력 휴양·정비 절감"(民力休養・政費節減)을 내걸고 군사 예산 삭감을 요구하며 청나라와의 전쟁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현양사는 테러를 포함한 격렬한 선거 간섭을 실행했으며,[1] 특히 1892년 선거에서는 마쓰카타 마사요시 행정부의 묵인 하에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협박과 폭력 캠페인을 벌였다.

현양사가 관여한 대표적인 국내 정치 사건으로는 1889년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폭살 미수 사건이 있다. 당시 오쿠마는 에도 막부 시절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을 추진했으나, 그 개정안이 관계 각국에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국민적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오쿠마가 자신의 방안을 고수하자, 현양사 사원 구루시마 쓰네키가 오쿠마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지고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3] (구루시마가 사용한 폭탄은 과격 자유 민권 운동가 오이 겐타로가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으로 오쿠마는 목숨을 건졌으나 오른발을 절단해야 했고,[3] 결국 정부는 방침을 급히 변경하여 오쿠마는 사임했으며 타협적인 조약 개정안은 보류되었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 현양사와 관계가 깊었던 나카노 세이고 등은 일본 제국 헌법조선타이완에도 적용하여 일본 본토와 식민지 간 법률상 평등(참정권은 속지주의에 따라 일본 내 거주 조선인, 대만인에게만 부여)을 철저히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도야마 미쓰루와 친분이 있던 아시즈 고지로(葦津耕次郎)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공산주의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일본 생산당'(大日本生産党)이라는 정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양사는 초기 비밀 결사적 성격에서 벗어나 점차 일본 정치의 주류로 편입되었다. 히로타 코키나 나카노 세이고와 같은 주요 정치 지도자를 포함하여 여러 내각 장관과 의회 의원들이 현양사 회원이었다. 현양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의 정치와 외교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에 의해 해산되었다.[6]

3. 사상 및 이념

현양사(ja)는 일반적으로 영미권 연구 등에서 초국가주의(ultranationalism) 단체로 평가받는다.[3]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역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현양사를 초국가주의 단체로 분류했다.[7]

그러나 초기 현양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학자 마크 W. 드리콜(Mark W. Driscoll)은 현양사가 초기에 메이지 천황의 권력 확장을 직접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았으며, 1881년 당시에는 단지 황실 존중의 입장을 가졌다고 지적한다.[3] 또한 작가 유메노 큐사쿠는 1935년 저술에서 초기 현양사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지 않았다고 서술하기도 했다.[3]

3. 1. 대아시아주의(범아시아주의)

현양사는 당시 여러 정치 결사들처럼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맞서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국권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외적으로는 아시아 각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이들 국가와의 동맹을 통해 서양 열강에 대항하는 범아시아주의(또는 대아시아주의)를 구상했다. 이러한 아시아주의 아래 중국의 쑨원, 조선김옥균 등과 당시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하에 있던 이슬람 지도자들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했다.

현양사 사원들이 내건 유명한 슬로건 중 하나는 '대아시아주의'(大アジア主義)였으며, 이는 쑨원의 고베 연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들은 조선의 친일 개화 운동가 김옥균박영효, 인도의 독립 운동가 라쉬 비하리 보스를 비호(庇護)했으며, 필리핀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 무기와 의병을 보내 지원하려 하기도 했다.

1901년 우치다 료헤이 등이 현양사의 해외 공작을 담당하는 '''흑룡회'''를 설립하여 활동을 더욱 구체화했다. 흑룡회 소속 대륙낭인들은 쑨원의 신해혁명을 지원하며 청나라 정부군 및 이후 군벌 세력과 싸웠다.

그러나 한일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치다 료헤이가 일진회의 지도자 이용구와 함께 대한제국과 일본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대아시아주의의 이상과는 모순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 현양사와 관계가 깊었던 나카노 세이고일본 제국 헌법조선타이완에도 시행하여 법률상 평등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화주의적 관점을 보였다. 반면, 도야마 미쓰루와 친분이 있던 아시즈 고지로(葦津耕次郎)는 조선이 독립 국가로서 기능할 인프라를 갖추었다며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여, 현양사 관련 인물 내에서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3. 2. 황실 존중과 국권 강화

1879년 자유 민권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향양사'(向陽社)를 전신으로 하여, 1881년 '현양사'로 개칭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양사의 사칙에는 (1) 천황가 존중 (2) 고향 지역 사랑 (3) 국민의 권리 굳건히 옹호 및 보호가 명시되어 있었다.[3] 이는 당시 사쓰마, 조슈번벌 정부의 전제 정치에 맞서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등 자유민권 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활동하는 명분이 되었다.[3]

그러나 현양사의 실제 의도는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아시아 대륙 정복을 선동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속내는 일본과 한국을 가르는 현해탄(玄界灘, 겐카이나다)에서 이름을 따 '현양사'(玄洋社)라고 명명한 것에서도 드러난다.[2]

현양사는 목표 달성을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서슴지 않았다. 테러 단체로서의 성격을 초기부터 드러냈으며,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뿐만 아니라 조직 범죄에 연루된 인물들까지 동원하여 외국인과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폭력과 암살을 자행했다.[1]:217

1885년에는 다른 자유민권 운동 단체들과 함께 오사카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중국, 한국 내부 봉기를 통해 메이지 유신을 이끈 과두 정치인들을 전복하려 시도하기도 했다.[3]

1889년, 현양사는 당시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가 추진하던 불평등 조약 개정안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개정안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이유였다. 현양사 소속 활동가 구루시마 쓰네키는 오쿠마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져 암살을 시도했고, 오쿠마는 목숨은 건졌으나 왼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3] 구루시마는 거사 직후 자결했다.[3] 이 사건으로 오쿠마는 사임했고, 타협적인 조약 개정안은 보류되었다.

1892년 선거에서는 당시 의회가 "민력 휴양"을 내세우며 군사 예산 삭감을 요구하고 과의 전쟁을 주저하자, 마쓰카타 마사요시 행정부의 묵인 하에 협박과 폭력을 동원한 노골적인 선거 간섭을 자행했다.

3. 3. 민권 옹호 (초기)

1877년 세이난 전쟁 이후, 고치이타가키 다이스케 밑에서 자유 민권 운동을 접한 도야마 미쓰루1879년 후쿠오카로 돌아와 자유 민권 운동 결사로서 '향양의숙'(이후 향양사)을 설립했다.[11] 이는 현양사의 직접적인 전신으로 여겨진다. 사장은 하코다 롯푸, 간사는 도야마 미쓰루, 신도 기헤이타였다. 1881년 (메이지 14년), 향양사는 현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양사의 사칙에는 '황실을 공경할 것'(皇室を敬戴すべし), '본국을 애중할 것'(本国を愛重すべし), 그리고 '인민의 권리를 고수할 것'(人民の権利を固守すべし)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설립 초기, 현양사는 당시 사쓰마조슈 번벌 정부의 관료전제(有司専制)를 비판하며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였다. 이는 당시 자유 민권 운동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오늘날 '우익'으로 분류되는 현양사와 같은 민간 결사들이 초기 민권 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회 개설 이후, 현양사의 입장은 변화했다. 당시 의회가 "민력 휴양·정비 절감"(民力休養・政費節減)을 내세우며 군사 예산 삭감을 추진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현양사는 정부와 입장을 같이하며 선거 방해에 나서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테러를 포함한 폭력적인 선거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현양사가 초기에 관여한 다른 주요 사건으로는 1889년 (메이지 22년)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폭살 미수 사건이 있다. 오쿠마가 추진하던 불평등 조약 개정안이 관계 각국에 대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하자, 현양사 소속 구루시마 쓰네키가 오쿠마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이 사건으로 오쿠마는 오른발을 잃는 중상을 입었으며, 결국 정부 방침 변경과 오쿠마의 사임으로 해당 개정안은 보류되었다. 사용된 폭탄은 급진적인 자유 민권 운동가였던 오이 겐타로가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조직 및 구성원

현양사는 1881년후쿠오카번 번사들을 중심으로 히라오카 고타로를 초대 사장으로 추대하며 설립되었다.[11] 창립에는 스기야마 시게마루, 도야마 미쓰루, 하코다 로쿠스케 등 다수의 인물이 참여했다.

역대 사장으로는 신도 기헤이타, 아베 다케사부로, 쓰키나리 이사오 등이 있으며, 이들은 후쿠오카 지역 사회 및 정치, 경제 활동에도 관여했다.[15][16][17][18][19][20]

창립 멤버 외에도 히로타 고키총리를 비롯하여 우치다 료헤이(흑룡회 창립자), 아카시 모토지로(러일 전쟁 당시 공작 활동) 등 정계, 군부, 언론계, 심지어 협객(요시다 이소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현양사와 관계를 맺었다. 이들 중 일부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같은 대한제국 침탈 과정이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대외 팽창 정책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18][19][20]

4. 1. 역대 사장


  • 히라오카 고타로
  • 신도 기헤이타
  • 아베 다케사부로: 1853년 출생, 1922년 사망. 다카바 란의 흥지숙 출신으로, 하기의 난 연계에 참가했다. 지쿠젠 공애회 나카군 위원을 지냈다.[15][16]
  • 하코다 로쿠스케
  • 신도 기헤이타 (재임)
  • 기타지마 준: 1944년 사망. 후쿠오카 시의원, 규슈 량형 이사, 규슈 일보사 감사역을 역임했다.[15][17]
  • 쓰키나리 이사오: 1860년 출생, 1935년 사망. 후쿠오카번 가로 게쓰나리 겐칸의 삼남이다. 별명은 오가미 이사오. 향양의숙을 거쳐 후쿠료 신보(후의 규슈 일보) 사원으로 일했으며, 구마모토현 다마나군에서 탄광을 경영했다. 하카타 쌀 곡물 거래소 이사장, 치쿠요 제사 이사, 후쿠오카 시의원, 하카타 상업 회의소 의원 등을 역임했다. 러일 전쟁 당시 중국 산둥성 즈푸, 다롄을 거쳐 조선의 신의주에서 어시장 등 각종 사업을 벌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은 가지카와 히카루는 그의 동생이다. 장인은 고리 야스무네, 사돈은 아카시 모토지로, 사위는 고모리 젠고로이다.[18][19][20]
  • 미와 사쿠지로: 1943년 사망. 국민당 간사를 지냈다.[15]
  • 요시다 고로쿠
  • 신도 가즈마

4. 2. 주요 구성원

1881년 (메이지 14년), 옛 후쿠오카 번사들이 중심이 되어 히라오카 고타로를 사장으로 추대하며 현양사를 창립했다[11]. 주요 창립 멤버는 다음과 같다.

또한 요시다 이소키치와 같은 협객이나 니로쿠 신보의 주필 스즈키 덴간 등도 관계를 맺었다.

그 외 주요 구성원 및 관련 인물은 다음과 같다.

5. 해산 및 유산

(내용 없음)

5. 1. 유산과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최고사령부1946년 현양사를 공식적으로 해산시켰다.[6] 그러나 현양사의 해산이 그 영향력까지 완전히 소멸시킨 것은 아니었다. 현양사의 이념과 활동 방식은 이후 등장한 여러 우익 단체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전후 일본 사회에서 우익 정치인과 야쿠자와 같은 조직 범죄 집단 간의 관계가 형성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현대 야쿠자는 현양사의 정치적, 사회적 철학 일부를 공유하고 있으며, 현양사 구성원 중 다수가 야쿠자 출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양사는 기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팽창을 목표로 활동했던 정치 조직이었으며, 그 목표 달성을 위해 범죄적 수단을 동원했을 뿐, 야쿠자 조직 그 자체는 아니었다.[8]

후쿠오카시 하카타구 스후쿠지에 있는 현양사 관련 인물 묘지


과거 후쿠오카시 주오구 마이즈루의 현양사 터 인근 건물에는 현양사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현양사 기념관"이 있었다. 1978년 11월에 개관했으나 2008년 5월 말 문을 닫았고, 소장 자료는 후쿠오카시 박물관에 기탁되었다.[13] 현재 현양사 터 옆 NTT 도코모 마이즈루 빌딩 한쪽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4] 또한, 하카타구의 스후쿠지에는 도야마 미쓰루나 키지마 츠네키 등 현양사 주요 인물들의 묘가 남아 있다.

6. 비판 및 논란

현양사는 그 활동 과정에서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표면적으로는 범아시아주의와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지원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대한제국, 청나라 등 주변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고 실행하는 데 앞장섰다는 비판이 제기된다.[24][25][2] 또한, 자신들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테러, 암살, 선거 방해 등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으며,[1][3] 이 과정에서 야쿠자와 같은 조직 범죄 세력과의 연관성도 드러났다.[1]:217[8]

6. 1. 제국주의 침략 정당화

현양사는 표면적으로 서구 식민주의에 대항하고 아시아 각국의 독립을 지원하며 범아시아주의를 통해 서양 열강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민의 권리 보호와 국권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었다.[24][25]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1881년 재창립된 현양사의 실제 의도는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아시아 대륙 정복을 선동하는 것이었다. 단체명 '현양사'(玄洋社) 자체가 일본과 한국 사이의 바다인 현해탄(玄界灘)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처음부터 대륙 침략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2] 현양사는 목표 달성을 위해 테러와 폭력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으며,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뿐만 아니라 조직 범죄 세력까지 동원하여 외국인과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폭력 및 암살을 자행했다.[1]

현양사의 제국주의적 행보는 여러 사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 암살 미수 사건 (1889년): 불평등 조약 개정안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이유로 현양사 단원 구루시마 쓰네키가 오쿠마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이는 일본의 대외 강경 노선을 관철하려는 극단적인 행동이었다.[3]
  • 선거 개입: 1892년 선거 당시, 군비 증강에 반대하는 의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의 묵인 하에 협박과 폭력을 동원한 선거 방해 공작을 벌였다. 이는 군사력 팽창을 최우선시하는 현양사의 입장을 보여준다.
  • 중국 침략 공작: 청나라 전복을 목표로 삼고, 정보 수집 및 비밀 결사 침투를 위해 100명 이상의 단원을 중국에 파견했다.[4] 중국 내 삼합회와 같은 비밀 결사에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고, 항저우 등지에 거점을 마련했으며, 사창가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정보 수집 및 공작 활동을 벌였다. 쑨원의 신해혁명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이는 궁극적으로 중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 대한제국 침략 준비 및 명성황후 시해: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염두에 두고 비밀리에 한반도의 상세한 지도를 제작했다. 또한,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청일 전쟁 발발의 빌미를 만들고자 했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는 미우라 고로 공사의 지시를 받은 현양사 단원들이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이는 일본의 조선 국권 피탈 과정에 현양사가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 전쟁 협력: 청일 전쟁러일 전쟁 동안 현양사의 광범위한 정보망과 공작 능력은 일본군에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아카시 모토지로와 같은 현양사 단원은 러시아 내부 교란 공작을 통해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도 현양사는 범아시아주의를 내세우며 활동을 지속했고, 국내에서는 공산주의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일본생산당'이라는 정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쇼와 시대에 들어 나카노 세이고와 같은 일부 인사는 조선타이완에도 일본 제국 헌법을 적용하고 법적 평등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는 여전히 일본 중심의 제국 질서 내에서의 논의였다.

히로타 코키, 나카노 세이고 등 현양사 출신 인물들이 일본 정계의 주류로 진출하면서, 현양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시까지 일본의 정치와 외교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6]

6. 2. 폭력적 수단 동원

현양사는 목표 달성을 위해 평화와는 거리가 먼 전술을 사용했다. 초기부터 테러 단체의 성격을 띠었으며,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뿐만 아니라 외국인 및 자유주의 성향 정치인에 대한 폭력과 암살을 실행하기 위해 조직 범죄와 연계된 인물들까지 동원했다.[1] 1885년 오사카 사건에서는 다른 자유민권 운동 단체들과 연계하여 일본, 중국, 한국에서의 봉기를 통해 메이지 유신의 과두 정치인들을 전복하려 시도하기도 했다.[3]

대표적인 사건으로 1889년 당시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가 추진하던 불평등 조약 개정안에 반발하여 현양사 단원 구루시마 쓰네키가 오쿠마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한 암살 미수 사건이 있다.[3] 이때 사용된 폭탄은 극단적인 자유 민권 운동가 오이 겐타로가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루시마는 범행 직후 현장에서 자결했으며,[3] 오쿠마는 목숨을 건졌으나 이 사건으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3] 이는 현양사가 테러를 포함한 극단적인 폭력 수단을 동원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892년 선거에서는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의 암묵적인 지원 하에,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유권자 협박과 폭력을 동원하는 등 불법적인 선거 개입을 자행했다.

또한, 중국 등지에 설치한 광범위한 사창가 네트워크를 정보 수집의 거점으로 활용했으며, 때로는 이를 통해 얻은 정보로 특정 인물을 협박하거나 뇌물을 사용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청일 전쟁러일 전쟁 중에는 현양사의 정보망이 일본군에 의해 적 후방에서의 사보타주(파괴 공작) 활동에 활용되기도 했다.

특히 1895년 조선에서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서울 주재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현양사 회원들이 주도적으로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이는 현양사의 폭력성이 국외, 특히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6. 3. 야쿠자와의 연관성



현양사는 초창기부터 테러 단체의 성격을 띠었으며,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뿐만 아니라 조직 범죄에 연루된 인물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외국인이나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폭력 및 암살 활동에 동원되었다.[1]:217 현양사는 목표 달성을 위해 범죄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현양사 자체가 야쿠자와 같은 범죄 조직은 아니었지만, 그 활동 방식과 구성원의 일부는 야쿠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현대 야쿠자 조직 중 일부는 현양사의 정치적, 사회적 이념을 계승하고 있으며, 현양사 구성원 중에는 야쿠자 출신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8]

더 나아가 현양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우익 정치인과 야쿠자 조직 간의 유착 관계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양사의 활동은 일본 사회 내에서 정치 세력과 범죄 조직 간의 연결 고리가 형성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The Enemy Within, A History of Espionage https://archive.org/[...] Osprey Publishing
[2] 문서 The Pearl Harbor Myth, Rethinking the Unthinkable
[3] 서적 The Whites are Enemies of Heaven: Climate Caucasianism and Asian Ecological Protection Duke University Press 2020
[4] 문서 Soldiers of the Sun, The Rise and Fall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5] 서적 The Last Empress https://archive.org/[...] Houghton Mifflin
[6] 서적 Modern Japan: An Encyclopedia of History, Culture, and Nationalism Taylor & Francis
[7] 서적 玄洋社社史 近代資料出版会 1977
[8] 웹사이트 Yakuza: la mafia del Sol Levante https://www.lindro.i[...] 2020-10-16
[9] 웹사이트 "[FICTION VS. HISTORY] The fact and fiction in 'Mr. Sunshine' : Historical sweep is captured but some anachronisms and motivations irk viewers" https://koreajoongan[...] 2023-07-03
[10] 뉴스 石原莞爾の「墓守」は軍歌を流す街宣車を追い払った https://www.j-cast.c[...] Jcast
[11] 웹사이트 『板垣精神 : 明治維新百五十年・板垣退助先生薨去百回忌記念』 https://ci.nii.ac.jp[...] 一般社団法人 板垣退助先生顕彰会 2019-02-11
[12] 서적 司馬遼太郎対話選集 9「アジアの中の日本」 文春文庫
[13] 뉴스 玄洋社記念館 月末で閉館 政治結社の足跡伝え30年 資料、市立博物館に寄託へ http://www.nishinipp[...] 西日本新聞 2008-05-25
[14] 웹사이트 玄洋社跡碑 http://zaq.ne.jp/spo[...] 地域情報サイト ZAQ 2012-09-26
[15] 웹사이트 玄洋社員・名簿 https://www5e.biglob[...] イシタキ人権学研究所ホームページ
[16] 문서 女丈夫高場乱子 https://dl.ndl.go.jp[...] 黒白書房 1935
[17] 문서 日本全国諸会社役員録 明治35年
[18] 웹사이트 月成 勲(読み)ツキナリ イサオ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19] 문서 日本現今人名辞典 訂正3版
[20] 웹사이트 梶川光(読み)かじかわ ひかる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1] 간행물
[22] 간행물
[23] 뉴스 石原莞爾の「墓守」は軍歌を流す街宣車を追い払った https://www.j-cast.c[...] Jcast
[24] 문서 일본 사람·일본 세력·일본의 문물 따위를 배척함
[25] 서적 司馬遼太郎対話選集 9「アジアの中の日本」 文春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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