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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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부는 바시군 한창 출신으로, 촉한의 장군이다.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관대한 성품으로 알려졌으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왕평에는 미치지 못했다. 좌장군과 당거후에 봉해졌으며, 《화양국지》에는 장익, 요화와 비교되어 촉나라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생애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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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구부 |
원어 이름 | 句扶 |
로마자 표기 | Ju Fu |
자 | 효흥 (孝興, Xiaoxing) |
출생지 | 쓰촨 바중 |
작위 | 당거정후 (宕渠侯) |
직업 | 장군 |
관직 정보 | |
관직 | 좌장군 (左將軍) |
재임 시작 | 알 수 없음 |
재임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유선 |
2. 생애
구부는 좌장군(左將軍)과 탕거후(宕渠侯)에 올랐다.[4] 그는 충성심과 무용이 뛰어났고, 관대한 인품을 지녔으며, 왕평에 버금가는 공명과 작위를 받았다.[4]
구부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별도의 열전은 없지만, 『삼국지』 왕평전과 『화양국지』 파지에 그의 행적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마충, 왕평, 장익과 함께 공적을 세운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2. 1. 출신 배경
구부에 대한 정보는 《삼국지》 왕평 열전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두 사람이 같은 군 출신이고 비슷한 명성을 공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구부는 바시군 한창(현재의 쓰촨성 바중 시) 출신으로, 이 지역의 토착 부족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무사로서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전투에서 여러 업적을 세웠으나, 그의 명성, 행적, 지위는 왕평에 미치지 못했다. 그가 도달한 가장 높은 지위는 좌장군(左將軍)이었으며, 당거후(宕渠侯)에 봉해졌다.[1]
상거가 화양국지를 통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촉한 말기 장익과 요화가 각각 좌, 우 차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재임했을 때 촉나라 백성들 사이에서 "전에는 왕평과 구부가 있었지만, 지금은 장익과 요화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요화와 장익의 경력이 서로를 반영하듯이 구부와 왕평의 경력도 그랬다는 것을 나타낸다.[2]
2. 2. 성품과 활약
구부는 충성스럽고 무용이 있었으며, 인품은 관대했다. 왕평에 버금가는 공명과 작위를 받았다.[4] 바중 시 쓰촨성 지역의 토착 부족 출신으로 추정되며, 무사로서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관대하고 너그러운 인물로 묘사된다. 전투에서 여러 업적을 세워 왕평에 버금가는 명성과 지위(좌장군, 탕거후)를 얻었다.[1]창거의 화양국지에 따르면, 촉한 말기 장익과 요화가 각각 좌, 우 차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재임했을 때 촉나라 백성들 사이에서 "전에는 왕평과 구부가 있었지만, 지금은 장익과 요화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요화와 장익의 경력이 서로를 반영하듯이 구부와 왕평의 경력도 그랬다는 것을 나타낸다.[2]
2. 3. 기록의 부족
구부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별도의 열전이 없다. 구부에 대한 정보는 《삼국지》 왕평 열전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두 사람이 같은 군 출신이고 비슷한 명성을 공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4]창거가 저술한 화양국지에는 촉한 말기 장군 장익과 요화가 각각 좌, 우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재임했을 때, 촉나라 백성들 사이에서 "전에는 왕평과 구부가 있었지만, 지금은 장익과 요화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요화와 장익의 경력이 서로 비슷하듯이 구부와 왕평의 경력도 그러했음을 보여준다.[2]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3
[2]
서적
Huayang Guozhi vol. 2
[3]
서적
화양국지(華陽國志)
[4]
서적
촉서(蜀書) 왕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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