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충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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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충은 촉한의 장수로, 어려서 외가에서 자라 호독(狐篤)으로 불리다가 마충으로 개명했다. 유비가 이릉 전투에서 패한 후 파서태수 염지의 지휘를 받아 군사로 활약했으며, 제갈량이 승상에 오른 후 문하독, 장가 태수를 역임했다. 제갈량의 남정, 기산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유주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안남장군까지 올랐다. 온화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성품으로 백성들에게 존경받았으며, 사후에는 사당이 세워졌다. 진수는 마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에서 장합을 활로 쏘아 죽이는 역할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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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충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마충 |
원 이름 | 호독 (狐篤) |
자 | 덕신 (德信) |
출생지 | 낭중현, 파서군, 익주 |
사망 | 249년 |
직업 | 군사 장군, 정치인 |
관직 | |
진남대장군 | 242년 ~ 249년 |
안남장군 | ? ~ 242년 |
내항도독 | 223년 ~ 249년 |
봉작 | 팽향정후 |
가족 관계 | |
자녀 | 마휴 마휘 마융 |
소속 | |
국가 | 촉한 |
주군 | 유비, 유선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장익, 장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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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마충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자랐으며, 처음 이름은 호독(狐篤)이었다가 나중에 마충(馬忠)으로 개명했다. 군의 관리가 되었고, 건안 말년(220년 즈음)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한창현의 장(長)으로 승진했다. 유비가 이릉 대전에서 패배한 후, 파서태수 염지는 마충에게 병사 5천여 명을 징발하여 군사가 없는 곳을 보충하게 했고, 마충을 영안으로 파견했다. 유비는 영안에서 마충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는 상서령 유파에게 "비록 황권을 잃었지만, 새로이 호독을 얻었소. 이것으로 세상에 현인이 부족하지 않음을 알 수 있소"라고 말했다.[1]
건흥 원년(223년), 제갈량이 승상이 되자 마충은 문하독(門下督)이 되었다. 건흥 3년(225년), 제갈량이 남쪽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진(제갈량의 남중 정벌)하자, 마충을 장가태수로 임명하여 장가군을 토벌하게 했다. 마충은 군승(郡丞) 주포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한 뒤, 은혜와 신의를 보여 여러 비한족들을 복종케 했다.[4]
건흥 8년(230년), 승상참군에 임명되었으며, 장사 장완의 휘하에서 유부(留府)에 소속되었고, 치중종사(治中從事)를 겸했다.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이 기산에 이르자, 마충을 중군(中軍)으로 삼아 군사(軍事)에 종사하게 했다. 기산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장억과 함께 문산군에서 반기를 들은 강족을 평정하였다.
건흥 11년(233년), 유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내강도독 장익이 해임되고 마충이 그를 계승했다. 마충은 유주를 참수하고 남쪽을 평정했으며, 분위장군으로 승진하고 박양정후에 봉해졌다. 옹개의 반란으로 건녕군 태수가 살해되거나 오나라로 압송되는 일이 발생하자, 내강도독은 항상 안전한 현(縣)에 상주하였다. 하지만 마충이 부임한 이후로는 오지의 현으로 이전하였고, 장억과 함께 월수군을 회복하였다. 그 공으로 안남장군을 수여받았으며, 팽향정후에 봉해졌다.[6]
연희 5년(242년), 중앙으로 들어가 한중에 주둔하고 있던 대사마 장완에게 칙서를 전하였으며, 진남대장군이 되었다.[7] 연희 7년(244년), 위나라가 침공해오자, 촉한의 대장군 비의가 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마충은 성도에 머무르며 평상서사(平尙書事)로 임명되었고, 비의가 성도로 돌아오자 다시 남방으로 옮겼다.
연희 12년(249년)에 사망했고, 아들 마수(馬脩)가 뒤를 이었다. 마충은 관대하고 공정하며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농담에 크게 웃었지만,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침착하면서도 결단력이 풍부하여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었기 때문에, 임지의 이민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마충이 죽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고, 사당을 세워 제사했다.[16]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마충은 어릴 적 외가에서 자랐는데, 당시 이름은 호독(狐篤)이었다. 이후 마충(馬忠)으로 개명했다. 그는 군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건안 말년(220년경)에 효렴으로 추천받아 한창현(현재의 파주)의 장(長)으로 승진했다. 유비가 이릉 대전에서 패배한 후, 파서태수 염지는 마충에게 5천여 명의 병사를 징발하여 군사 부족을 보충하게 했다. 마충은 영안으로 파견되었고, 영안으로 돌아온 유비는 마충과 대화를 나눈 후 상서령 유파에게 "비록 황권을 잃었지만, 새로이 호독을 얻었으니 세상에 현인이 부족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3]223년, 제갈량이 승상이 되면서 마충은 문하독(門下督)이 되었다.[4]
2. 2. 이릉 대전 이후
223년 유비가 사망한 후, 제갈량은 승상으로 재직하면서 마충을 부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4] 225년,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이끌었고, 마충은 장가 태수로 승진하여 원정에 참여해 반란군에 합류했던 주포를 격파했다. 그는 태수로서 군의 회복을 돕고 백성들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었으며, 권위와 자비를 모두 갖추었다.[4]230년, 제갈량은 마충을 군참(參軍)으로 임명하여 장완을 보좌하게 했고, 정부 관청에서 추가 임명을 받았다. 이듬해 기산 전투에 참전했고, 군대가 돌아온 후 장억과 함께 옹산군에서 강족 지도자들이 이끄는 반란을 진압했다.[5] 233년, 이민족 지도자 유주가 반란을 일으키자 내강도독 장익이 해임되고 마충이 그를 계승했다. 마충은 유주를 참수하고 남쪽을 평정했으며, 분위장군으로 승진하고 박양정후에 봉해졌다.[5]
옹개의 반란 당시 반란군은 건녕군 태수 정앙을 살해하고 후임 장익을 동오로 보냈다. 이후 사령관은 평이현에 주둔했으나, 마충은 본부를 한단시 위현으로 옮겼다. 또한 잃어버린 영토였던 월수군을 장억과 함께 회복했다. 그는 안남장군으로 승진하고 팽향정후에 봉해졌다.[6]
242년, 조정에 소환되어 장완에게 조서를 전달, 한수에서 위의 위흥 및 상용 군 공격을 위한 육로에서 수로로의 노선 변경을 막았다. 마충은 진남대장군으로 승진했다.[7] 244년, 조상의 흥세 전투 공격 때 촉한의 대장군 비의가 북쪽으로 가자, 마충은 성도에서 비서 정부를 책임졌다. 비의 귀환 후, 마충은 남쪽으로 떠났고 249년 사망했다.[7]
2. 3. 제갈량의 남정
225년, 제갈량이 남쪽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진하였고, 마충을 장가 태수로 임명하여 장가군을 토벌하게 했다.[4] 마충은 군승(郡丞) 주포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한 뒤, 은혜와 신의를 보여 여러 비한족들을 복종케 했다.[4]2. 4. 촉한의 중견 장수로 활약
유비가 이릉 대전에서 패배한 후, 파서태수 염지는 병사 5천여 명을 징발하여 마충에게 지휘를 맡기고 원군으로 파견했다. 영안에서 유비는 마충을 만나 "황권을 잃었지만, 호독을 얻었다"라고 유파에게 말했다.[1]건흥 원년(223년), 제갈량이 승상부를 열었을 때 마충을 문하독으로 삼았다. 건흥 3년(225년), 제갈량이 남쪽으로 출정하자(제갈량 남정), 마충을 장가 태수로 임명했다. 마충은 주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위엄과 자애로 백성을 위로하는 데 힘썼다.[4]
건흥 8년(230년), 승상 참군이 되어 장완의 부장으로 유부의 사무를 맡았고, 치중종사를 겸임했다.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의 기산 출정 때 제갈량의 지휘 아래 군사에 참여했다. 기산에서 돌아온 후 장억과 함께 문산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족을 토벌했다.
건흥 11년(233년), 남쪽 이민족의 지도자 유주가 반란을 일으켰다. 래강도독 장익이 엄격한 법 집행으로 이민족의 반발을 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장익을 소환하고 마충으로 교체했다. 마충은 유주를 참수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감군·분위장군으로 승진, 박양정후에 봉해졌다.[5] 과거 건녕군에서는 태수가 살해되거나 오나라로 보내지는 일이 있었기에 전임 장익은 장가군의 평이현에 주둔했지만, 마충은 건녕군의 미현으로 청사를 옮겼다. 또한, 장억을 이끌고 월수군을 회복했다. 이 공으로 안남장군이 되고, 팽향정후에 봉해졌다.[6]
연희 5년(242년), 조정에 소환되어 한중에 주둔하던 장완에게 조서를 전달했다. 마충은 진남대장군에 임명되었다.[7]
연희 7년(244년), 비의가 위나라 군의 공격을 방어할 때, 마충은 성도에 남아 평상서사에 취임하여 성도의 군사와 정치를 상서령 동윤과 함께 담당했다. 비의가 귀환하자, 마충은 다시 남쪽으로 파견되었다.[7]
2. 5. 말년
연희 12년(249년)에 마충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마수(馬脩)가 뒤를 이어 팽향정후가 되었다. 마수의 동생 마회(馬恢)는 아들 마의(馬義)를 두었는데, 마의는 진나라 시대에 건녕태수로 임명되었다.[7]마충은 사람됨이 관대하고 공정하며, 도량이 넓고, 농담에 크게 웃었지만,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침착한 인품이면서도 결단력(毅)이 풍부하여,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었기 때문에, 임지의 이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16] 마충이 죽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고, 사당을 세워 제사했다. 래강도독은 장표·염우가 후임이 되었지만, 풍격이나 공적 면에서 모두 마충에 미치지 못했다.
3. 마충에 대한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마충의 전기를 작성하면서 "마충은 온화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었다.[8] ... 황권, 이회, 여개, 왕평, 장니와 함께 그의 자질 덕분에 천하에 널리 알려졌고,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았기에 강력한 유산을 남겼다."라고 평가했다.[9]
마충은 관대하고 공정하며 도량이 넓고 농담을 즐겼지만,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침착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어[16]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었기에, 임지의 이민족들은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마충이 죽자 이민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고, 사당을 세워 제사했다.
장표는 마충보다 명성이 뛰어난 학자였으나, 마충의 안남장군(安南將軍) 직위를 계승했다. 그는 건위군(犍為郡)의 양희를 부관으로 삼아 보조를 받았다.[12][13]
3. 1. 긍정적 평가
마충은 온화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었고, 사람들을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8] 문무를 처리할 때 결단력이 있었고 권위와 친절함을 모두 보여주었으며, 이민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10] 마충이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참석하여 극심한 슬픔으로 그를 위해 울었고, 그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10]상거는 《화양국지》에서 마충이 남쪽을 다스릴 때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친절을,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주었다고 칭찬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큰 관심과 관대함을 보였으며, 그의 노력으로 진남대장군(鎮南大將軍)이라는 최고 직위에 올랐는데, 이는 남쪽 땅의 어떤 총독도 도달하지 못한 직위였다. 마충이 죽은 후, 남쪽 사람들은 그의 영예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어려움이 있을 때 그에게 기도했다.[11]
이회를 제외하고, 마충은 촉한의 남쪽 땅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역 사령관이었다. 마충 사후 장표와 염우(閻宇)가 남쪽을 다스렸지만, 그들의 권위와 공적은 마충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14]
3. 2.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남정 당시 활약하였으며, 장억(張嶷)과 함께 맹획(孟獲)의 아내 축융부인에게 사로잡혔다. 하지만 다음날 조운과 위연(魏延)이 축융부인을 생포하였고, 마충은 장억과 함께 축융부인과 교환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북벌 당시에는 제갈량(諸葛亮)의 명령으로 위나라의 장합(張郃)을 활로 쏘아 죽였다.[1]4. 계승자
마충은 사람들을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변덕스럽고 다른 사람을 놀리고 크게 웃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분노할 때는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문무를 처리할 때 결단력이 있었고 권위와 친절함을 모두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민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 그가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참석하여 극심한 슬픔으로 그를 위해 울었다. 그들은 그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10]
상거는 《화양국지》에서 마충이 남쪽을 다스릴 때,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친절을,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큰 관심과 관대함을 보였다. 그의 노력으로 그의 최고 직위는 진남대장군(鎮南大將軍)이었으며, (그를 제외하고) 남쪽 땅의 어떤 총독도 도달하지 못할 직위였다. 마충이 죽은 후, 남쪽 사람들은 그의 영예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어려움이 있을 때 그에게 기도했다.[11]
장표는 마충보다 명성이 뛰어난 유명한 학자였다. 그는 마충의 안남장군(安南將軍) 직위를 계승했다. 장표는 건위군(犍為郡)의 양희의 보조를 받았으며, 양희는 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12][13]
그러나 이회를 제외하고, 마충은 촉한의 남쪽 땅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역 사령관이었다. 자가 문평(文平)인 염우(閻宇)는 능력을 보였고 민첩하고 성실하게 민정을 처리하면서 쉽게 목표를 달성했다. 그는 마충 사후 장표와 함께 남쪽을 다스렸다. 그러나 그들의 권위와 공적은 마충의 것에 미치지 못했다.[14]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3
[2]
서적
Sanguozhi vol. 43
[3]
서적
Sanguozhi vol. 43
[4]
서적
Sanguozhi vol. 43
[5]
서적
Sanguozhi vol. 43
[6]
서적
Sanguozhi vol. 43
[7]
서적
Sanguozhi vol. 43
[8]
서적
Shangshu Z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3
[9]
서적
Sanguozhi vol. 43
[10]
서적
Sanguozhi vol. 43
[11]
서적
Huayang Guozhi vol. 4
[12]
서적
Huayang Guozhi vol. 4
[13]
서적
Sanguozhi vol. 43
[14]
서적
Sanguozhi vol. 43
[15]
서적
華陽国志』巻四
[16]
서적
書経|尚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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