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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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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맹획은 주로 《한진춘추》와 《화양국지》에 기록된 인물로, 촉한 시대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 등장한다. 223년 유비 사후 남중 지역의 반란 당시 옹개의 사주를 받아 수족 등 부족을 설득하여 반란에 가담했으며, 옹개 사후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제갈량에게 여러 번 사로잡혔지만, 칠종칠금 끝에 촉한에 항복하여 어사중승을 지냈다. 맹획의 실존 여부와 칠종칠금 이야기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일부 학자는 맹획이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맹획은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며,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게임 캐릭터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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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획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맹획
맹획 (청나라 삽화)
이름맹획
로마자 표기Meng Huo
직위어사중승
임기 시작알 수 없음
임기 종료알 수 없음
군주유선
출생알 수 없음
사망알 수 없음
상세 정보
생몰년도불명
출신지익주건녕군
섬긴 군주유선
활동 시기3세기
주요 활동남중 지역 부족 지도자

2. 역사적 기록 및 사료

맹획에 대한 기록은 주로 서진 시대의 사서인 《한진춘추》와 《화양국지》에 나타난다. 이 두 사료는 서로 다른 출처를 가지고 있어 맹획의 역사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여겨진다. 《한진춘추》는 좌조치가, 《화양국지》는 장곡이 저술한 거의 동시대 작품이다.[1] 유송의 역사가 배송지는 《삼국지》의 주석판을 편찬할 때 좌조치의 기록을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했으며,[14] 사마광 또한 《자치통감》에서 맹획의 역사를 기록했다.

하지만 배송지의 좌조치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역사가 방국유(方國瑜)는 칠종칠금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했다.[1] 맹획이 일곱 번이나 잡히고 풀려났다는 이야기의 부조리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 심지어 맹획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다. 민국 시대의 역사가 장화란(張華爛)은 맹획이 후대 역사가들이 지어낸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3]

그러나 유비유선의 이름을 예로 들어 이러한 주장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맹획이 한족 출신인지 외족 출신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획"(獲)과 비슷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4][5]

량산 이족 노예 사회 박물관의 황성종(黃承宗)은 맹획이 실존 인물이라고 믿지만, "일곱 번 풀려났다"는 이야기는 허구라고 보았다.[6] 사천대학 교수 묘월(繆鉞)과 성도의 제갈량 사당 관장인 담량소(譚良嘯) 또한 "일곱 번 풀려났다"는 이야기는 "이상하고 믿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맹획은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이라고 믿었다.[7]

한편, 맹획이 미얀마 북부, 후베이성에 속하는 민족인 "와족"이라는 설도 있다.

2. 1. 《한진춘추》 기록

225년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할 때, 남중에 도착했을 때 한족과 이민족이 맹획에게 복종한다는 말을 듣고 맹획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4] 제갈량이 맹획에게 “우리 군이 어떠하오”라고 묻자, 맹획은 “이전에는 허실을 몰라서 패했소. 지금 허락 받고 영진(營陣)을 살펴보니 다만 이정도라면 쉽게 이기겠소”라고 말하였다.[14] 제갈량은 웃으면서 그를 풀어 주고 다시 싸우기를 반복했는데, 일곱 번을 풀어주고 일곱 번을 사로잡았다.[14] 제갈량이 맹획을 풀어주려고 하자, 맹획은 “공은 천위를 지닌 분이니, 우리 남인들은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며 귀순하였다.[14]

2. 2. 《화양국지》 기록

孟獲|맹획중국어은 익주 건녕 사람으로, 관직을 받아 어사중승까지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다.[14]

2. 3. 기타 사료

배송지는 《삼국지》 주석을 달면서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하여 별다른 언급 없이 진수의 저술에 추가했다.[14]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맹획의 역사를 기록했다. 일부 학자들은 맹획의 이름 '획(獲, 잡다)'이 그의 운명과 너무나 일치한다는 점, 칠종칠금 이야기의 비현실성 등을 들어 맹획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1][2][3]

3. 생애

225년 제갈량의 남만 정벌 때 맹획이 등장한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이 남중에 도착했을 때 한족과 이민족이 맹획에게 복종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생포하라고 명령했다. 맹획은 사로잡혔고, 제갈량은 맹획에게 자신의 군대가 어떠한지 물었다. 맹획은 이전에는 적의 허실을 몰라 패배했지만, 지금은 영진을 살펴본 결과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답했다. 제갈량은 웃으며 그를 풀어주고 다시 싸우게 했다. 일곱 번 풀어주고 일곱 번 사로잡는 동안, 맹획은 제갈량의 의도를 깨닫고 "공은 천위를 지닌 분이니, 우리 남인들은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며 귀순했다.[14]

화양국지에는 맹획이 익주 건녕 사람으로 어사중승까지 승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맹획이 미얀마 북부, 후베이성에 속하는 민족인 와족이라는 설도 있는데, 와족은 20세기까지 인간 사냥을 했던 포악한 민족이었다고 한다.

3. 1. 남만 정벌 이전

맹획이 붉은 소를 타고 전투에 돌입하는 모습


맹획은 건녕군(현재 운남성 조통시·곡정시 부근) 출신으로, 남중 지역의 유력자였다. 옹개촉한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맹획은 옹개의 명을 받아 남중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에 가담하게 했다.[12]

당시 옹개는 많은 사람들이 촉한에 대한 충성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맹획을 보내 다른 부족들을 설득하게 했다. 맹획은 부족민들에게 촉한 정부가 희귀한 자원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선동했고, 부족민들은 그의 말을 믿고 옹개에게 합류했다.[8]

3. 2. 제갈량의 남만 정벌

223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죽자 남중의 여러 부족들이 촉한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중국에는 세 명의 군웅이 황제를 자칭하고 있었기에, 누구에게 충성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225년(건흥 3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남중 지역을 정벌하여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14]

반란 초기, 옹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건녕군(현재 운남성 조통시·곡정시 부근) 출신의 맹획을 보내 다른 부족들을 설득하게 했다. 맹획은 부족민들에게 정부가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자원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선동했고, 부족민들은 그의 말을 믿고 옹개에게 다시 합류했다.[8] 옹개가 부하에게 살해된 후, 맹획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12]

여름, 제갈량은 군대를 이끌고 낙수(瀘水)를 건너 이주(益州)로 진격했다. 제갈량은 북벌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려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는 남중의 부족들을 복종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갈량은 맹획을 사로잡아 자신의 진영으로 데려온 후 그의 군대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맹획은 "미리 알았더라면 쉽게 당신을 무찔렀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9] 제갈량은 맹획을 용서하고 그의 군대로 돌려보냈다. 그 후 두 군대는 일곱 번이나 싸웠고, 맹획은 매번 제갈량에게 사로잡혔지만, 항상 용서받고 풀려났다.(칠종칠금) 이 모든 일은 맹획과 부족민들, 그리고 한족 백성들로 하여금 반란을 재고하고 진심으로 항복하게 만들었다. 제갈량은 맹획이 도착하자 그의 의도를 물었다. 맹획은 제갈량을 "하늘의 재앙"으로 여기며 다시는 남쪽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10] 한진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맹획은 "공은 천위를 지닌 분이니, 우리 남인들은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며 귀순을 하였다.[14]

반란이 진압된 후, 남중의 많은 인재들이 촉한 정부에 참여했다. 맹획도 그중 한 명이었고 제갈량의 부하가 되었다. 그의 최고 관직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다.[11] 화양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맹획은 익주 건녕 사람으로 관직을 받아 어사중승까지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다.

3. 3. 남만 정벌 이후

225년 제갈량의 남만 정벌 이후, 맹획은 촉한에 귀순하여 공을 세웠고 어사중승까지 승진했다.[11] 맹획의 추천으로 건녕군의 찬습, 주제군의 맹염 등 남중 출신 인재들이 촉한의 관리가 되었다.[12] 이들은 이회, 찬습과 함께 건녕군의 명사로 불렸다.[12]

4. 《삼국지연의》에서의 맹획

삼국지연의》에서 맹획은 남만의 왕으로 등장한다. 촉의 후주 유선이 즉위한 후, 위의 사마의의 건의로 조비가 다섯 갈래로 촉을 공격하려는 작전을 세울 때, 맹획은 남만에서 10만 군세를 이끌고 촉을 공격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계략에 의해 위연에게 패배하고 남만으로 퇴각한다.[13]

이후 맹획은 여러 차례 제갈량과 싸우며, 타사대왕, 목록대왕, 올돌골 등과 함께 자연과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고 원주민의 협력까지 얻어 선전하기도 하지만, 매번 마지막에는 패배한다.[13]

현지 소수 민족의 전승에서는 맹획이 목이 잘린 채로도 움직일 수 있는 불사의 기술 등을 사용하여 제갈량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고 전해진다.[13]

4. 1. 남만 정벌

위나라 조비의 사주를 받아 촉한을 공격했으나, 제갈량의 계략에 의해 위연의 미끼에 걸려 패배하고 남만으로 퇴각한다.[13] 옹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갈량에게 평정당한다. 그 뒤부터 제갈량의 남만 정벌이 시작된다. 제갈량에게 일곱 번 사로잡혔다가 일곱 번 풀려나는 칠종칠금(七縱七擒) 끝에, 맹획은 제갈량에게 진심으로 항복하며, "장군의 천명으로 남방인들은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소!"라고 맹세한다.[13]

제갈량은 남만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남방을 평정하고자 맹획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다가 풀어주는 전략을 사용했다.[13] 이 과정에서 많은 남만 장수와 부장들이 사로잡혔지만, 친절하게 대우받아 많은 남만족이 항복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 맹획의 아내 축융, 아우 맹우, 처남 대래동주, 남만 수령 금환삼결, 동도나, 아회남, 수하 장수 망아장, 동맹군 타사대왕, 목록대왕, 올돌골 등은 창작된 허구의 인물들이다.

5. 현대 대중문화에서의 맹획

맹획은 오늘날 다양한 게임, 드라마, 소설 등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다. 이족(彝族중국어)은 맹획을 그들의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여기고 멍허프(ꂽꉼyie)라고 불렀다.

5. 1. 게임

코에이(Koei)의 ''삼국지'' 및 ''무장풍운록'' 비디오 게임 시리즈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토탈 워: 삼국'' 전략 비디오 게임의 ''격렬한 야생'' DLC에서도 플레이 가능한 장수로 등장한다.

6. 맹획에 대한 평가 및 논란

맹획의 역사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한진춘추》에는 제갈량이 남만 정벌 당시 맹획을 사로잡아 "우리 군이 어떠하오"라고 묻자, 맹획은 "이전에는 허실을 몰라 패했지만, 지금 영진(營陣)을 살펴보니 이 정도면 쉽게 이길 수 있겠소"라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 풀어주고 일곱 번 사로잡는 칠종칠금을 행했고, 맹획은 결국 "공은 천위를 지닌 분이니, 우리 남인들은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며 귀순했다.[14]

화양국지》에는 맹획이 익주 건녕 사람으로 어사중승까지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맹획이 미얀마 북부나 후베이성에 속하는 와족이라는 가설도 있다.

6. 1.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

한진춘추》, 《화양국지》 등 여러 사료에 맹획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14] 유비유선의 이름처럼, 맹획의 이름 '획(獲)'이 그의 행적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맹획의 실존 가능성을 높여준다.[2][4] 량산 이족 노예 사회 박물관의 황성종(黃承宗) 등 일부 학자들은 맹획이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한다.[6]

6. 2. 허구 인물이라는 주장

맹획의 이름 '획(獲)'은 '잡다'라는 뜻으로, 그의 운명과 너무나 일치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2] 칠종칠금 이야기의 비현실성 때문에, 민국 시대 역사가 장화란(張華爛) 등 일부 학자들은 맹획이 후대에 창작된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2][3]

하지만, 유비유선의 이름도 각각 '준비하다(備)'와 '넘겨주다(禪)'라는 뜻으로 그들의 역사적 행위와 일치하지만, 이들이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4]

6. 3. 기타

사천대학 교수 묘월(繆鉞)은 제갈량이 맹획을 실제로 사로잡았다면 그 지도자를 풀어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7] 성도의 제갈량 사당 관장인 담량소(譚良嘯) 또한 "칠종칠금" 이야기가 "이상하고 믿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맹획은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이라고 믿었다.[7]

참조

[1] 서적 Draft History of the Yi People (彝族史稿) Sichuan Nationalities Publishing House
[2] 학술지 Discussion on Meng Huo (孟獲辯)
[3] 학술지 Zhuge Liang's "Seven Captures of Meng Huo" – Real or Fake? (诸葛亮"七擒孟获"真耶假耶?)
[4] 문서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1
[5] 웹사이트 Foreign Names in Chinese https://www.language[...]
[6] 서적 Discussion on the Historicity of Meng Huo of Shu Han (蜀漢孟獲史實瑣談) Sichuan Research Institute on Yi Studies (四川彝學研究)
[7] 학술지 Suspicions about Zhuge Liang's "Seven Captures of Meng Huo" (諸葛亮"七擒孟獲"質疑)
[8] 문서 Huayang Guo Zhi vol. 4
[9] 문서 Huayang Guo Zhi vol. 4
[10] 문서 Huayang Guo Zhi vol. 4
[11] 문서 Huayang Guo Zhi vol. 4
[12] 문서 참고자료
[13] 서적 三国志演義事典 株式会社大修館書店
[14] 문서 漢晉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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