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문서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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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립고문서학교(École nationale des chartes)는 프랑스의 그랑제콜 중 하나로, 공문서관 및 도서관의 학예사, 문화재 연구 및 운영 인력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1821년에 설립되었다. 혁명 이후 기록 보존의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설립되었으며, 이후 1829년에 재설립되었다. 훈련 과정은 고문서학, 역사, 법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경쟁 시험을 통해 입학한다. 졸업생들은 기록 보관소, 도서관 등에서 활동하며, 연구 활동과 지식 보급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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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국립 고문서 학교 에콜 루아얄 데 샤르트 (1822년 ~ 1848년) 에콜 앙페리알 데 샤르트 (1852년 ~ 1871년) |
로마자 표기 | École Nationale des Chartes – PSL |
종류 | 그랑제콜 |
설립 | 1821년 2월 22일 |
소재지 | 파리 |
국가 | 프랑스 |
캠퍼스 | 파리 2구 |
소속 | 콩도르세 캠퍼스 PSL 대학교 |
총장 | 미셸 뷔브니세크 (2016년부터) |
웹사이트 | www.Chartes.psl.eu |
2. 역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급격한 사회 변화는 기록 보존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이는 1821년 루이 18세의 칙령으로 에콜 데 샤르트가 설립되는 배경이 되었다.[1] 초기에는 고문서학과 언어학 중심의 실용적인 교육을 목표로 했으나, 학생 부족과 취업 기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 1829년 샤를 10세 시기에 학교가 재설립되었고, 입학 자격이 확대되었으며, 졸업 후 기록 보관 및 도서관 분야의 일자리가 보장되었다.
기조 시대에 학교는 역사학, 특히 중세 연구의 중심지로 성장했다.[1] 소시에테 드 레콜 데 샤르트 설립과 학술지 발행을 통해 연구 성과를 널리 알렸다.[1] 1846년 칙령으로 교육 과정이 개편되어 학제 간 연구가 강조되었고, 논문 제도가 도입되었다.[1] 학교는 유럽의 기록 보존 및 역사 연구의 모범이 되었으며, 졸업생들은 프랑스 전역의 기록 보관소와 도서관 네트워크에 통합되어 기록 보관 원칙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2]
1897년, 학교는 소르본느 거리 19번지로 이전하여 에콜 프라티크 데 오트 에튀드 등 다른 연구 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했다. 20세기 초, 입학 및 내부 시험 개혁과 함께 사서 양성 과정을 제공하며 변화를 모색했다.[1] 그러나 20세기 중반에는 학생 수 감소와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 내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2]
1990년대 이후, 학교는 입학 시험과 교육 과정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여 다시 활기를 찾았다.[5] 현재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교육과 문화 유산 보존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프랑스 및 유럽의 다른 기관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6] 2011년부터는 교육 범위를 인문 사회 과학 분야로 확대하고, 전문 석사 프로그램과 계속 교육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8]
2. 1. 설립 배경 (1821년 이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재산 몰수, 수도회 해산, 교회에서 국가로의 권한 이관 등 급격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기록 보존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1793년, 앙투안 모가르(Antoine Maugard)는 국민 공교육 위원회에 역사 및 외교문서학 교육 프로젝트를 제안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1]이후,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조제프 마리 드 제랑도(Joseph Marie de Gérando)가 1807년 나폴레옹에게 역사학자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나폴레옹은 이 제안을 검토하고 더 큰 역사 전문 학교를 개발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랑도가 행정 임무로 이탈리아에 파견되면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1]
2. 2. 초기 역사 (1821년 - 1829년)
루이 18세의 칙령으로 1821년 2월 22일에 국립고문서학교가 설립되었다.[1] 이 학교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문화적 변화 속에서 탄생했다.[1] 혁명으로 인해 재산 몰수, 수도회 해산, 교회 권한의 국가 이관 등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역사 및 외교문서학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1] 1793년 앙투안 모가르(Antoine Maugard)가 관련 교육 프로젝트를 제안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1]이후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조제프 마리 드 제랑도(Joseph Marie de Gérando)가 나폴레옹에게 역사학자 양성을 위한 학교 설립을 제안했으나, 제랑도가 행정 임무로 이탈리아에 파견되면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1] 1820년 말, 제랑도는 시메옹 백작에게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을 모델로 한 헌장 연구 기관의 필요성을 설득했다.[1]
1821년 칙령에 따라 아카데미 데 쟁스크립시옹 에 벨레트르의 제안으로 12명의 학생이 선발되어 2년간 고문서학과 언어학을 연구했다.[1] 그러나 이 첫 시도는 학생들을 위한 취업 자리가 부족하여 성공적이지 못했다.[1] 1821년 5월 11일과 12월 21일 장관령 및 칙령에 의해 두 단계로 시행된 첫 과정은 단 한 번만 운영되었다.[1] 1823년 7월 16일 칙령으로 과정 기간이 2년으로 정해졌지만, 학생 부족으로 인해 1823년 12월 19일에 수업이 중단되었다.[1]
오랜 휴지기 후, 내무부는 학교 재개를 결정했다.[1] 내무부 직원 국장 리베스(Rives)는 다시에와 함께 학교 재조직 보고서와 초안을 작성하여 샤를 10세에게 제출했고, 라 부르도네의 제안으로 1829년 11월 11일 칙령이 발표되어 학교가 재설립되었다.[1]
2. 3. 발전과 개혁 (1829년 - 1897년)
샤를 10세 통치 시기, 내무부 직원 국장 리베스(Rives)는 다시에와 함께 학교 재조직에 대한 보고서와 초안을 작성하여 라 부르도네에게 제안했고, 이는 1829년 11월 11일 칙령으로 이어졌다. 이 칙령으로 바칼로레아를 취득한 사람이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게 되었지만, 1학년 말에 경쟁 시험을 통해 6~8명의 학생이 선발되었다. 선발된 학생들은 급여를 받고 2년 더 훈련을 받았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기록 보관사-고문서학자 자격을 받았고,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에서 이용 가능한 일자리의 절반을 예약받았다. 첫 번째 수석 졸업생은 알렉상드르 튈레였다.
"기조 시대"는 에콜 데 샤르트에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이 학교는 곧 역사학, 특히 중세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1] 1839년 3월 24일, 루이 두에 다르크 등은 소시에테 드 레콜 데 샤르트를 설립하고, 학교에서 수행된 연구를 보급하기 위해 가장 오래된 프랑스 과학 저널 중 하나인 비블리오테크 드 레콜 데 샤르트(Bibliothèque de l'École des Chartes)를 발행했다.[1]
1846년 12월 31일 칙령은 학교와 그 연구 프로그램의 근본적인 재조직을 시행했으며, 이는 그 후 1세기 이상 변경되지 않았다.[1] 바칼로레아 소지자인 학생들은 시험(곧 경쟁 시험이 됨)을 통해 선발되었고, 3년의 교육 과정을 거쳤다.[1] 학교의 필수적인 특징인 학제간 연구는 개혁에 명시되어 학생들은 6개의 과목을 공부해야 했으며, 그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1] 논문 제도가 도입되었고, 1849년에 첫 번째 공개 논문 발표가 열렸다.[1] 기록 보관소 경비원, 왕립 도서관 관장, 학교장 및 아카데미 데 쟁스크립시옹 에 벨레트르의 5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감시 위원회가 설치되었다.[1] 학교는 마침내 새로운 규정을 받았다.[1] 이 학교는 오텔 드 수비즈의 왕국 기록 보관소, 오텔 드 클리송의 타원형 홀 및 인접한 방으로 이전했다.[1]

이제 에콜 데 샤르트는 유럽의 기준점이 되었다.[2] 고대 문서의 사본 덕분에 역사 연구 방법론과 교육 방법이 크게 현대화되었다.[2] 학생들은 고문서학, 인장학, 화폐학, 언어학, 기록 보관소 및 도서관 파일링, 역사 지리학, 통화, 무게와 측정 시스템, 프랑스의 정치 기관 역사, 고고학, 민법, 교회법 및 봉건법을 배웠다.[2] 교육은 과학적 목표와 직업적 목표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2]
학교 졸업생들은 점차 왕립, 그리고 국가 및 지방 기록 보관소 서비스 네트워크에 통합되면서, 네트워크 강화와 기록 보관 원칙 개선에 기여했다.[2] 졸업생을 위한 진로는 기록 보관소에서 확립되었으며, 처음에는 1846년 12월 31일 칙령에 의해 시행되었고, 그 후 이 법을 시행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입법 틀에 의해 강화되었다.[2] 1850년 2월 4일 법령은 지방 기록 보관소의 직위를 기록 보관사-고문서학자 자격을 가진 사람에게 예약했으며, 1887년 5월 14일 법령에 의해 국립 기록 보관소의 모든 직위(고위 공무원 제외)가 그들에게 예약되었다.[2] 도서관의 경우는 달랐다.[2] 1839년 칙령은 시행되지 않았고, 1839년 칙령이 에콜 데 샤르트 졸업생에게 왕립 도서관의 자리를 예약했지만, 1867년에 도서관에서 일한 졸업생은 7% 미만이었다.[2] 레오폴 드 릴 국립 도서관 총무의 노력 덕분에 제2제국 말에 이르러서야 학교 졸업생의 자격이 도서관에서 인정받았다.[2] 조금씩 법령과 칙령은 그들이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2]
2. 4. 이전과 확장 (1897년 - 현재)
학교는 1897년 소르본느 거리 19번지로 이전하여, 원래 파리 가톨릭 신학부를 위해 설계된 건물로 이전했다. 이 이전은 학교를 소르본느에 있는 문학부 및 에콜 프라티크 데 오트 에튀드와 같은 다른 연구 및 교육 기관과 지리적으로 더 가깝게 만들었다. 학교는 양쪽에 창문이 있고 고문서학 실습을 위한 특별 깊이 책상이 있는 교실과 즉시 이용할 수 있는 책이 있는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다. 이 건물은 개조되었지만, 학교는 오늘날에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1920년대에는 호텔 드 로앙, 농아 학교 정원(미셸 루-스피츠 제안), 노트르담데샹 거리의 부지, 보지라 거리의 주택, 이전 폴리테크닉 학교 및 베르나르댕 수도원의 식당 등 여러 다른 건물로의 이전이 제안되었다. 2015년에 학교는 리슐리외 지역으로 이동하여 리슐리외 거리 65번지와 프티-샹 거리 12번지에 있는 새 건물로 이전하였다. 학교는 또한 캠퍼스 콩도르세의 창립 멤버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일부 연구 활동은 오베르빌리에 캠퍼스에서 수행되었다.
1821년 2월 22일 칙령에 의해 프랑스 국립고문서학교가 설립되었지만, 1823년에 일단 폐쇄되었다. 1829년 11월 11일 칙령에 의해 다시 개교했으며, 1834년 3월에 제1기 졸업생이 직무를 시작했다. 이때 수석 졸업생은 알렉상드르 튈레(Alexandre Teulet)이다. 학교의 소재지는 파리 시내에 위치하며, 시대에 따라 변동되었다. 개교 당시에는 왕립 도서관 내(현재의 리슐리외관 내)에 병설되었다. 1862년 이후에는 프랑스 국립 문서 보관소(Archives nationales) 근처의 부르투이유관으로 이전했다. 그 후, 파리 대학교신학부가 정교 분리법에 의해 폐지된 이후에는, 소르본 대학 내의 신학부용으로 준비되어 있던 교실로 이전했다. 2014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 (구관)과 가까운 파리 2구의 리슐리외 거리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1]
2. 5. 20세기 이후의 변화
1930년대 초, 에콜 데 샤르트의 입학 시험과 내부 시험이 개혁되었다. 이 시기에 학교는 1급 시립 도서관 또는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인 ''디플롬 테크니크 드 비블리오테케르''(DTB) 자격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학교는 책의 역사와 서지학 수업을 이 자격증을 준비하는 외부 학생들에게 개방했다. 이 관행은 195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때 ''디플롬 쉬페리에르 드 비블리오테케르''(DSB)가 사서 자격으로 DTB를 대체했다.[1]
20세기 중반은 학교가 현대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학생 수가 급감하여 1959년 졸업반에는 기록 보관사-고문서학자가 11명밖에 없었다.[2] 교육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였고, 특히 아날 학파의 역사학적 부흥과 같은 최신 역사 접근 방식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다.[3]
1990년대에 입학 시험과 교육이 개혁되고 새로운 정책이 도입된 후에야 학교는 부활을 맞이했다. 이 학교는 이브-마리 베르세(1992–2001)와 아니타 게로-잘라베르(2001–2006)의 지도하에 발전했다.[5] 현재 학교의 개발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탄탄한 교육과 문화 유산 보존에 대한 적용, 그리고 프랑스 대학 및 다른 유럽 국가의 유사한 기관과의 더 긴밀하고 구조화된 연계를 기반으로 한다.[6] 또한 과학 연구와 보존 직업의 발전에 대한 현재의 요구에 더 잘 맞도록 교육이 재구성되었다. 이 접근 방식은 2014–15학년도부터 점차적으로 도입될 예정이다.[7]
2011년, 현재 교장인 장-미셸 레니오가 취임한 이후, 학교는 학생 모집을 교육의 특성에 집중하면서 인문 사회 과학의 더 넓은 분야로 교육을 확대하고, 유럽 맥락과 보존 조직 내의 채용 조건을 적용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입학 시험을 개혁했다.[8] 1990년대에 예술사를 포함하도록 확장된 가르침의 범위는 이제 고고학, 현대법의 역사 및 재산법의 역사를 포함한다. 과정은 3년에서 3년 9개월로 연장되어, 기본 과학 기술 교육과 보존 직업에서의 역량 강화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9] 역사, 언어학 및 법학 연구가 아카이브, 책, 기념물 및 예술 작품의 보존에 이처럼 광범위하게 통합된 사회 및 인문 과학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재고 목록, 역사적 기념물 또는 박물관일 수 있다.[10]
학교는 채용 과정을 개선하고 미래의 기록 보관사-고문서학자의 교육을 업그레이드하는 것 외에도, 인문학에 적용된 디지털 기술에 초점을 맞춘 전문 석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11] 최근에는 '발리다시옹 데 자키 드 렉스페리앙스(VAE)'(직무 경험을 인증하는 자격)를 고려한 계속 교육 서비스를 도입했다.[12] 과학 협력 공공 기관(캠퍼스 콩도르세 파리-오베르빌리에), 코뮈(ComUE) 에삼 대학교 및 소르본 대학교와의 협력은 최근 몇 년 동안 학교가 취한 새로운 방향을 보여준다.[13] 이를 위해, 학교는 행정을 현대화하고, 야심찬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리슐리외 거리의 국립 도서관 맞은편에 새로운 캠퍼스를 설립했다. 따라서 정부가 할당한 공공 서비스 역할을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14]
3. 교육 과정
국립고문서학교의 교육 과정은 1987년 10월 8일 정령(87-832호) 및 2005년 12월 30일 정령(2005-1751호)에 의해 규정되며, 공문서관 및 도서관의 학예사 양성을 주요 목표로 한다.[40]
고문서학교 졸업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학문 영역의 지식을 횡단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17세기 고문서, 낡은 도자기 조각, 루이 14세 시대의 편지, 파트리스 셰로의 영화 등 다양한 자료를 접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 과정은 8학기(6학기는 교육)로 진행되며, 공통 필수 과목 외에 학문 및 직업 목표에 따라 선택 과목을 선택하고 대학교를 통해 외부에서 수강할 수 있다.
인턴십은 프랑스 보존 분야(문서 보관소, 도서관, 박물관, 유산 또는 고고학 서비스) 기관에서 5개월, 해외 유사 기관에서 3개월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주요 학습 과목은 다음과 같다:[40]
- 라틴어 및 프랑스어 고문서학 (세미나에서 다른 언어 포함)
- 기록물 생산 기관의 기록 보관, 외교 및 역사 (중세, 근대, 현대)
- 시민법 및 교회법 역사
- 현대 법 역사
- 로마 언어학
- 중세 라틴어
- 미술사 (중세, 근대, 현대)
- 고고학
- 텍스트 편집
- 서지학
- 책의 역사
- 필사본 및 중세 문학 텍스트
- 역사 연구를 위한 통계 및 지도 제작
- 현대 언어 및 IT
ECTS 학점이 과목에 할당되어 대학교 또는 다른 ''그랑제콜'' 출신 학생들도 일부 과목을 수강할 수 있으며, 외부 학생들의 석사 학위에 해당 과목이 포함될 수 있다. 이는 프랑스의 학위 체계를 다른 유럽 학위 체계와 조화시키는 LMD 개혁에 의해 가능해졌다. 수업은 청강생에게도 개방된다.
3. 1. 입학
국립고문서학교 입학 시험은 크게 두 가지 전형으로 나뉜다.[1]- A 전형 ("고전"): 중세사, 근대사, 라틴어 등 고전 문헌 관련 과목을 평가한다. 학교 수업은 라틴어 구사 능력을 필요로 한다.
- B 전형 ("현대"): 근대사, 현대사, 현대 언어 등 현대 문헌 관련 과목을 평가하며,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banque d'épreuves littéraires'' (BEL)에 포함된 시험이다.
프랑스사의 경우, 시험 과목은 다음과 같이 세분화된다.[1]
학생들은 프레파에서 입학 시험을 준비한다. 첫 해는 "이포샤르트", 둘째 해는 "샤르트"라고 불린다. 학교에 따라 A, B 전형 준비생을 한 그룹으로 묶거나, 두 그룹으로 나누기도 한다. B 전형 준비생은 ''카뉴''와 함께 추가 선택 과목을 수강할 수 있다.
학사 학위 이상 소지자는 별도 시험을 통해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다. 이 시험은 고급 연구 경험자를 대상으로 한다.
입학 정원은 매우 적은 편이다(연간 약 25명).[1] 이는 프랑스 전역의 고문서 관리직 결원 수보다도 적은 숫자이다.[1] 입학한 학생은 연수생 신분으로 봉급을 받지만, 유학생은 봉급 대신 장학금을 받는다.[1]
섹션 A 준비 학급은 파리의 앙리 4세 고등학교, 툴루즈의 피에르 드 페르마 고등학교, 스트라스부르의 퓌스텔 드 쿨랑주 고등학교에 개설되어 있다. 섹션 B 준비 학급은 디종의 카르노 고등학교, 툴루즈의 피에르 드 페르마 고등학교, 스트라스부르의 퓌스텔 드 쿨랑주 고등학교 외에, 렌 등에서도 운영된다.[1]
3. 2. 훈련 과정

경쟁 시험을 통해 선발된 학생들은 공무원 수습생 지위를 얻으며, 10년 의무 복무 조건으로 급여(1250EUR/월 순수령)를 받는다.[38] 시험 합격자는 이 지위 수락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교육 과정은 3년 9개월이다.[38] 학업 종료 후 학생들은 논문을 제출하며, 이는 고문서학자-고고학자 자격 인정 요건이 된다.
3학년 의무를 완료한 학생들은 국립 정보 및 도서관 과학 고등 학교(Enssib) (경쟁 시험 예약[39])와 국립 유산 연구소(INP)의 ''응용 학교''에 지원할 수 있다.
본 과정은 8학기(6학기는 교육)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공통 필수 과목 외에 학문 및 직업 목표에 따라 선택 과목을 선택한다. 인턴십은 프랑스 보존 기관(문서 보관소, 도서관, 박물관, 유산/고고학 서비스)에서 5개월, 해외 유사 기관에서 3개월 의무적으로 수행한다.
주요 학습 과목은 다음과 같다:[40]
- 라틴어 및 프랑스어 고문서학 (세미나에서 다른 언어 포함)
- 기록물 생산 기관의 기록 보관, 외교 및 역사 (중세, 근대, 현대)
- 시민법 및 교회법 역사
- 현대 법 역사
- 로마 언어학
- 중세 라틴어
- 미술사 (중세, 근대, 현대)
- 고고학
- 텍스트 편집
- 서지학
- 책의 역사
- 필사본 및 중세 문학 텍스트
- 역사 연구를 위한 통계 및 지도 제작
- 현대 언어 및 IT
3. 3. 석사 과정
2006년, 국립고문서학교는 역사에 적용되는 디지털 기술 석사 과정을 도입했으며, 이후 매년 약 20명의 학생을 배출했다.[41] 첫해에는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기본 모듈과 세 가지 선택 과목(아카이빙, 책과 미디어의 역사, 예술사)을 수강한다. 석사 1학년 과정은 국립고문서학교 학부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2학년 학생들은 웹캐스팅에 적용되는 IT 분야에서 보다 전문화된 교육을 받는다. 두 가지 가능한 경로가 있는데, 하나는 연구 중심적이고 다른 하나는 직업 지향적이며 유산 서비스에서 지식 보급을 목표로 한다.2011년, 국립고문서학교는 두 개의 석사 과정을 더 도입했다. 첫 번째는 중세 연구로, 고등사범학교, 파리 3 대학교, 파리 4 대학교와 협력하여 제공된다. 그 목표는 "중세 시대 전문화를 배경으로 학제 간 접근 방식을 통해 중세 텍스트에 대한 문학 연구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파리-사클레 고등사범학교 및 국립 시청각 연구소와 협력하여 운영되며, 시청각 디자인: 역사, 사회 및 과학의 다매체 표현에 관한 것이다. 그 목표는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을 위한 시청각 다큐멘터리 디자이너 및 제작자뿐만 아니라 인쇄 매체 및 출판 분야에서 운영되는 멀티미디어 사이트의 창작자 및 책임자를 교육하는 것"이다.
3. 4. 박사 과정
국립고문서학교는 가르치는 과목에 대해 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국립고문서학교에서 수여한 학위 여부에 관계없이 석사 학위를 가진 학생은 누구나 학교의 박사 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박사 학위는 다음 두 개의 협력 박사 과정 학교를 통해 준비된다.협력 박사 과정 학교 | 박사 과정 |
---|---|
고등연구실천학교 | 중세사, 미술사, 고고학, 로마어 문헌학 및 라틴어 |
파리 소르본 대학교 | 근현대사 |
4. 연구 활동
장 마비용 센터(올리비에 퐁세가 원장으로 있음)는 국립고문서학교의 연구 부서이다.[42] 이 센터의 연구 프로그램은 중세부터 현재까지 기록물 생산, 유산 전승, 역사적 문서의 과학적 활용을 다룬다. 연구 프로그램의 세 가지 축은 다음과 같다.
- 생산 조건 (축 1: 중세 시대부터 21세기까지의 기록 문화)
- 유산 전승 기전 (축 2: 기록 유산의 생성과 전통: 저자, 기관, 법률, 연구 등)
- 이 역사적 문서를 과학계에 반환하는 조건 (축 3: 디지털 시대의 텍스트 및 이미지 편집에 대한 인식론 및 규범)
학생들의 논문은 학교 연구 활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연구 분야는 수년에 걸쳐 다양해져 현재 모든 시대, 특히 현대사를 포함한다.[42]
5. 조직 및 운영
국립고문서학교의 운영 기구는 학교장, 행정 위원회, 그리고 과학 위원회로 구성된다.
학교장은 고등연구실천학교, 국립 헌장 학교, 프랑스 극동 학교의 연구 감독관, 혹은 대학교수 및 관련 기관 회원 중에서 선출된다. 학교장은 5년 임기로 대통령령에 의해 임명되며, 관련 조항에 따라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학교장은 연구 감독관 및 일반 서비스 관리자의 보좌를 받는다.
행정 위원회[37]는 21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 | 인원 | 구성 |
---|---|---|
비선출직 | 4명 | 해당사항 없음 |
고등 교육 담당 장관 임명 | 10명 | 이 중 2명은 연구소 회원 |
선출직 | 7명 | 교사 3명, IATOS (비교원 직원) 2명, 학생 2명 |
과학 위원회는 학교장이 위원장을 맡으며, 연구 감독관인 모든 교사 및 기타 비선출직 위원들을 포함한다. 또한,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 | 인원 | 구성 |
---|---|---|
임명 위원 | 15명 | 이 중 5명은 연구소 회원 |
선출직 | 2명 | 교사 1명, 학생 1명 |
파리 URFIST (학문 간 연구 및 훈련 기관) 및 역사 및 과학 연구 위원회는 국립 헌장 학교와 관련되어 있다.
6. 파트너십
국립고문서학교는 고등연구실천학원, 텍스트 연구 및 역사 연구소, 푸아티에 대학교의 중세 문명 고등 연구 센터와 긴밀히 협력하여 네트워크 시대의 학문 학교를 설립하고 있다. 또한 리옹 시(시립 도서관 및 인쇄 박물관), 리옹 고등사범학교 및 Enssib와 함께 도서의 역사 연구소의 일부이기도 하다.
HeSam University, 소르본 대학교, Campus Condorcet Paris-Aubervilliers를 형성하기 위해 파리의 다른 고등 교육 기관과도 협력하고 있다.
러시아 국립 기록 보관소, 여러 모스크바 도서관, 알리칸테 대학교, 일부 이탈리아 연구 센터 등 프랑스 외 기관과도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국립고문서학교는 많은 외국인 학생들을 받고 있으며, 이들은 종종 스위스, 벨기에 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국가 출신이다. 현재 대학교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더 짧은 체류를 위한 새로운 학생들을 유치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학생들은 다른 국가의 기록 보관소나 도서관에서 정기적으로 인턴십을 할 기회를 갖는다.
7. 지식 보급
국립고문서학교는 전문 분야의 과학적 연구 결과를 인쇄 및 전자 형식으로 보급한다.
인쇄 출판물로는 다음 4개의 작품집을 출판하고 있다.
- '''기억과 문서''': 1896년부터 간행된 단행본 모음으로, 주로 국립고문서학교 졸업생들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연구 및 만남''': 1998년에 시작된 모음집으로, 주로 과학 회의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역사를 위한 자료''': 1996년에 시작된 모음집으로, 풍부한 그림이 있는 사보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갈리아 폰티피시아를 위한 연구 및 문서''': 2009년부터 국립고문서학교와 파리 독일 역사 연구소가 공동 편집. 1198년 이전의 프랑스와 관련된 교황의 행위를 식별, 출판 및 연구하는 과학적 사업인 ''갈리아 폰티피시아''의 일환으로 수행된 작업을 제시한다.
또한, 학교 교육과 관련된 다음 두 개의 정기 간행물을 출판한다.
- '''논문 초록''': 1849년부터 매년 출판되며, 기록 보관인-고문서학자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학생들이 제출한 논문의 초록을 담고 있다. 2000년부터 온라인으로도 제공된다.
- '''가설''': 2010년부터 국립고문서학교와 소르본 출판사가 공동 편집. 파리 1대학교 팡테옹-소르본 역사 박사 과정 학교와 국립고문서학교의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콩투아 데 프레스 드 뤼니베르시테를 통해 CID-FMSH에서 보급한다.
2002년부터는 온라인 출판물 모음인 국립고문서학교 온라인 에디션(ELEC)에서 전자 형식으로 과학 작품을 출판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과학 작품에 디지털 기능을 부여하고 텍스트뿐만 아니라 레퍼토리와 데이터베이스를 인쇄 버전보다 상세한 검토에 더 적합한 형식으로 통합한다.
이 컬렉션은 다음 자료들로 보완된다.
- 국립고문서학교에서 편집하지 않은 연구 목적의 온라인 텍스트 코퍼스
- THELEME 웹사이트에서 제공되는 교육 자료
- 국립고문서학교에서 개발한 IT 도구 및 방법론 제시 공간
이러한 자료는 오픈 라이선스 하에 제공된다.
국립고문서학교는 교육 팩, 조언, 수업, 대화형 팩시밀리 등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을 지원하는 자료를 제공하는 Thélème 웹사이트를 포함한 여러 이니셔티브를 통해 과학 및 교육 작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종이 및 전자 형식으로 수많은 저서를 출판한다. ''국립고문서학교의 회고록과 문서''는 단행본이며, 그중 다수는 국립고문서학교 논문 또는 박사 학위 연구에서 비롯된다. 이 중 첫 번째는 1896년에 출판되었으며, 오노레 샹피옹과 드로가 배포한다. ''연구와 만남''(협약 회의록 및 간략한 단행본)과 ''역사를 위한 자료''(그림이 있는 대형 앨범)라는 두 개의 컬렉션이 최근에 만들어졌다. ELEC는 데이터베이스, 텍스트 편집본, 심포지엄 회의록, 참고 문헌, 연구를 포함하는 학교의 온라인 출판물도 담당한다.
8. 부속 도서관
1846년 12월 31일 칙령에 따라 도서관이 설립되었다. 당시 도서관은 소비즈 호텔에 있는 학교를 위해 마련된 두 개의 방 중 하나를 사용했다. 1897년 학교와 함께 도서관도 이전했으며, 그 이후 2층(열람실 및 역사실), 3층(말굽실), 4층(다락방의 사무실 및 창고)을 사용하고 있다.
1920년, 도서관 관리는 당시 학교 서기였던 르네 푸파르댕에게 넘겨졌다. 현재는 도서관 큐레이터가 관리하고 있다.
도서관은 연구 도서관으로 설계되었다. 소장 자료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세 역사, 언어학, 도서사, 서지학 등 관련 분야에 특히 충실하다. 약 15만 권의 장서가 있으며, 모든 자료를 즉시 이용할 수 있다. 목록은 온라인으로 제공된다.[43] 많은 전자 자료도 이용 가능하다.
소르본 대학교의 공간 부족으로 인해, 2017년 도서관은 더 넓은 부지인 12 rue des Petits-Champs로 이전했다.
9. 주요 동문
분야 | 인물 | 설명 |
---|---|---|
기록 보관 | 장 파비에(1932–2014) | 중세 연구가 겸 기록 보관인 |
샤를 빅토르 랑글루아(1863–1929) | 중세 연구가 겸 기록 보관인 | |
고딘뉴(1910–1963) | 기록 보관인, 1945년부터 1946년까지 베트남 국립 도서관 관장 | |
쉬잔 오노레(1909–2000) | 기록 보관인, 사서, 역사학자 | |
레오폴드 빅토르 들릴(1826–1910) | 사서 | |
에밀 모파(1842–1916) | 사서 겸 동물학자 | |
마르셀 포에트(1866–1950) | 사서, 역사학자 겸 도시 계획가 | |
쉬잔 도벨만(1905–1993) | 사서 겸 큐레이터 | |
레오폴 드 릴 | 프랑스 국립도서관 관장 (1874년-1905년) | |
프란츠 훙크-브렌타노 | 아르스날 도서관 사서, 바스티유의 역사 | |
가브리엘 아노토 | 고등연구실습원 교수, 프랑스 외무성 재직, 외무장관 (파쇼다 사건, 프랑스-러시아 동맹) | |
연구 | 피에르 오브리(1874–1910) | 음악학자 |
장 프랑수아 베르지에(1931–2009) | 모더니스트 | |
아르튀르 지리(1848–99) | 국립고문서학교 교수 | |
루이 알팽(1880–1950) | 중세 연구가 | |
앙투안 르 루 드 랑시(1806–1869) | 중세 연구가 | |
앙리-장 마르탱(1924–2007) | 서적사학자 | |
오귀스트 몰리니에(1851–1904) | 국립고문서학교 교수 | |
미셸 파스투로(1947–) | 중세 연구가 | |
레진 페르누(1909–98) | 중세 연구가 | |
장 리샤르(1921–2021) | 중세 연구가 | |
폴 비올레(1840–1914) | 국립고문서학교 교수 | |
도미니크 드 쿠르셀(1953–), | 사상사학자 | |
역사 | 미셸 앙투안 | 근대사 |
오귀스탱 코섕 | 프랑스 혁명사 | |
아르튀르 질리 | 중세사 | |
페르디낭 로 | 중세사 | |
가스통 파리 | 중세사 | |
쥘 키슐라 | 고고학, 잔 다르크 연구 | |
아르튀르 드 라 볼드리 | 역사 | |
알프레드 메트루 | 인류학자, 아이티 연구 | |
르네 지라르 | 철학자 | |
문학 | 앙드레 상송 | 소설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
조르주 바타유 | 작가 | |
로제 마르탱 뒤 가르 | 작가 | |
기타 | 귀스타브 칸 | 상징주의 시인, 예술 평론가 |
프랑크 지루 | 만화 원작자 | |
정치 | 카미유 페르탱 | 저널리스트, 작가, 정치가 |
출판 | 오귀스트 풀레-말라시 | 『악의 꽃』(샤를 보들레르)의 발행인 |
참조
[1]
서적
International Handbook of Universities
https://books.google[...]
[2]
웹사이트
France Archives
https://francearchiv[...]
[3]
웹사이트
France Archives
https://francearchiv[...]
[4]
간행물
Royal Decree of 22 February 1821 establishing a School of Charters
[5]
간행물
Projet d'un enseignement historique et diplomatique à la Bibliothèque nationale sous la Convention
[6]
편지
Letter from the Baron of Gérando to Mr. Marial Delpit
1839-04-06
[7]
간행물
Notes et documents pouvant servir à l'histoire de l'école royale des Chartes. Recherches sur le projet présenté à l'Empereur en 1807, par le baron de Gérando
[8]
간행물
Rapport adressé au roi Louis XVIII le 22 February 1821 par M. le comte Siméon, ministre de l'Intérieur
[9]
서적
Restoring order: the École des Chartes and the organization of archives and libraries in France, 1820–1870
Litwin Books
[10]
간행물
Royal decree of 22 February 1821, article 2
[11]
간행물
Royal decree of 22 February 1821, article 1
[12]
간행물
Royal decree of 22 February 1821, article 3
[13]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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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École, son histoire, son œuvre. Livre du centenaire
Auguste Picard
[15]
간행물
Royal decree of 16 July 1823
[16]
간행물
Notice historique sur l'École royale des Chartes
[17]
간행물
Royal decree of 11 November 1829 containing the reorganization of the École des Chartes
[18]
간행물
Chronique et Mélanges
[19]
간행물
Royal decree of 31 December 1846
[20]
간행물
L'enseignement supérieur de l'histoire à Paris, notes et impressions de voyage
[21]
간행물
La conquête des archives départementales
Gérard Klopp
[22]
간행물
Order of 29 February 1939, articles 15 et 26 relating to the École des Chartes
[23]
간행물
Les chartistes et les bibliothèques
[24]
간행물
Quelques éminents bibliothécaires: galerie
[25]
간행물
Le 19, rue de la Sorbonne, l'École ses bâtiments, sa décoration
[26]
간행물
L'École des Chartes: institutionnalité et architecture
[27]
법령
Decree no. 2012-286 of 28 February 2012 establishing Campus Condorcet, a public institution of scientific cooperation
2012-02-28
[28]
서적
Histoire des droites en France
Éditions Gallimard
[29]
간행물
Les chartistes et la politique
[30]
간행물
L'École des Chartes et l'Affaire Dreyfus
[31]
간행물
Histoire, historiens et dreyfusisme
[32]
간행물
Émile Zola et 'ces messieurs de l'École des Chartes' in the Dreyfus Affair: unpublished
[33]
법령
Decrees of 19 June 1931, 16 March 1931 and 5 October 1932
1931-06-19
[34]
법령
Decree of 22 February 1932; decrees of 29 April 1933 and 29 November 1933
1932-02-22
[35]
간행물
Chroniques
[36]
서적
Les formations à la recherche de leurs réformes
[37]
웹사이트
The councils of the École des Chartes
[archive]
[38]
웹사이트
The Master's course on the website of the École
[archive]
[39]
문서
A number of positions as State Curators are reserved for Chartists, but no positions as territorial curators are reserved.
[40]
웹사이트
Complete list of modules by semester on the website of the École
[archive]
[41]
웹사이트
The Master's course on the website of the École
[archive]
[42]
웹사이트
See the thesis abstracts of recent years, demonstrating the diversity of the research carried out
[archive]
[43]
웹사이트
Catalog of the library of the school
http://catalogue.enc[...]
[44]
법령
Decree of 10 August 2011
https://web.archive.[...]
[45]
웹사이트
Online catalogue
https://www.siv.arch[...]
[46]
웹사이트
Archives nationales
https://www.siv.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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