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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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덕규는 일제강점기 한글 연구와 보급에 헌신한 한글학자이다. 1891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 등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주시경의 제자로 1921년 조선어연구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기여했다. 1927년 동인지 <한글>에 참여하여 한글 연구 관련 글을 기고했으며,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및 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글을 학문으로 연구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글 보급에 힘썼으며, 일제강점기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2019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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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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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권덕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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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출생일 | 1891년 8월 7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
사망일 | 1950년 10월 24일 (향년 59세) |
사망 원인 | 불명 |
국적 |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
직업 | 언어학자 |
수상 | 건국훈장 애국장(2019) |
2. 생애
권덕규는 1891년 8월 7일 경기도 김포군에서 태어나 1913년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를 졸업했다. 이후 휘문고보, 중앙고보 등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1] 주시경의 제자였던 그는 1921년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 창립에 함께 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한 한글학자였다.[1]
1927년에는 동인지 <<한글>>에 참여하여 '정음 이전의 조선글', '잘못 고증된 정음 창조자', '조선어와 불교' 등을 기고했다.[1]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및 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글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1931년 조선어학회 회원이 된 그는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및 수정에 참여했고, 동아일보가 주최한 조선어 강습회 강사로도 활동했다.[1] 1933년에는 조선어학회 주최 '하기 한글 강습회' 강사,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경기도 대표)을 역임했고, 1936년부터는 '조선어대사전' 편찬 위원으로 활동했다.[1]
그는 일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왜놈들의 하는 짓은 말할 것 없고, 요새 가짜 왜놈들의 하는 꼴이란 술 취하지 않는 맑은 눈으로는 볼 수가 있어야지!"라고 말하며 일본에 아부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1]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일제에 의해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려갔으나, 지병으로 인해 풀려났다.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 33인 중 한 명이었다.[1] 해방 후 십일회 회원이 되었으나 행방불명되었다.[1]
2019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는 그가 조선어학회 활동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1]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91년 8월 7일 경기도 김포군에서 출생하여 1913년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를 졸업하였다.[1]2. 2. 교육 활동
1913년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를 졸업한 뒤, 휘문고보, 중앙고보 등 중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주시경의 직계 제자 중 한 명으로,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가한 한글학자이다.[1] 1931년과 1932년에 동아일보가 주최하고 조선어학회가 후원한 조선어 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했다.[1] 1933년 조선어학회가 주최한 '하기 한글 강습회'에도 강사로 참여했다.[1]2. 3. 한글 연구 및 보급 활동
1913년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를 졸업하고 주시경의 직계 제자 중 한 명으로,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 창립에 주시경과 함께 참여하였다.[1] 1927년 동인지 <<한글>>에 이병기, 최현배, 정열모, 신명균 등과 함께 활동하며 '정음 이전의 조선글', '잘못 고증된 정음 창조자', '조선어와 불교' 등을 기고하였다.[1]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및 위원으로 활동하였다.[1] 그는 우리글인 한글을 '한글학'이라는 학문으로 정립해 연구하자고 호소하였다.[1]
1931년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었다.[1] 1930년부터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수정위원·정리위원으로 활약했다.[1] 1931년과 1932년에 <<동아일보>> 주최, 조선어학회 후원 조선어 강습회에 강사로 참여하였다.[1]
1933년 조선어학회 주최 '하기 한글 강습회' 강사로 참여하였다.[1]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경기도 대표)을 역임하였다.[1] 1936년부터 '조선어대사전'의 편찬 위원을 지냈다.[1]
2. 4.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과 조선어학회 사건
권덕규는 주시경의 제자로, 1921년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 창립에 참여했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한 한글학자이다.[1] 1931년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경기도 대표) 등을 역임했다.[1]그는 일제에 대한 비판을 술로 달랬는데, "왜놈들의 하는 짓은 말할 것 없고, 요새 가짜 왜놈들의 하는 꼴이란 술 취하지 않는 맑은 눈으로는 볼 수가 있어야지!"라며 일본인들에게 아부하는 자들을 비판했다.[1]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돌려보냈다.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연루된 33인 중 한 명이었다.[1]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맞서 한글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선정하며, 외래어표기법을 통일하는 등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을 전개하였다.[2] 또한,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를 뜻풀이한 <조선어대사전> 편찬을 진행하였다.[2]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33인을 체포하고 탄압하였으며, 이윤재와 한징은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등 핵심 인사들은 해방 이후 풀려났다.[2]
2. 5. 광복 이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돌려보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된 33인 중 한 명이었다. 조선어학회의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으로 활약했고, '조선어대사전' 편찬 위원을 맡았기에 일제의 탄압은 불가피했다. 해방 뒤 십일회 회원에 포함됐으나 행방불명됐다.[1]2019년 광복 74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결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이는 권덕규 선생이 반일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에 참여해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과 조선어대사전 편찬을 통해 우리말과 한글을 영구히 유지하는 언어 독립투쟁을 전개한 공훈을 인정받은 결과이다.[1]
3. 저서
참조
[1]
저널
"가짜 왜놈" 꾸짖은 국어학자, 드디어 독립유공자 되다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8-16
[2]
저널
"가짜 왜놈" 꾸짖은 국어학자, 드디어 독립유공자 되다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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