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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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극로는 일제강점기 한글 연구에 참여하여 조선어학회 간사장, 조선어사전 편찬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에는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1893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하고 마산 창신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과 독일 훔볼트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나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후 평양에 잔류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북한에서 과학원 소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사후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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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자 - 김두봉
김두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정치인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조선독립동맹 결성,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숙청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자 - 이만규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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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이극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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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극로 |
출생일 | 1893년 8월 28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의령현 지산면 |
사망일 | 1978년 9월 13일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
본관 | 전의 |
호 | 고루, 물불 |
학력 | |
대학 | 동제대학 |
대학원 | 독일 훔볼트 대학교 |
경력 | |
직업 | 국어학자 |
주요 경력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임소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 |
종교 및 가족 | |
종교 | 대종교 |
배우자 | 김공순 |
자녀 | 이억세, 이대세 |
부모 | 이근주 |
소속 정당 | |
정당 | 조선로동당 |
2. 생애
1920년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거쳐 1927년 독일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중반 한글 연구에 참여하여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전임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조선어학회 간사장에 선출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8월 광복 후 석방되었다.[1][2]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내각의 무임소상이 되고,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1893-1919)
이극로는 1893년 8월 28일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태어났으며, 전의 이씨 전서공파 28세손이다. 서당에서 공부한 뒤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 독립군이 되고자 서간도로 망명했다.[1]같은 해 회인현 동창학교에서 훗날 대종교 제3세 교주가 된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에 귀의하였고, 박은식 등 저명한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5년 동창학교가 폐교된 후 무송현 백산학교에서 학생들을 다시 가르쳤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동제대학에 입학하여 서구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할 기회를 얻게 된다.[1]
2. 2. 유학과 독립운동 (1920-1929)
1920년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가 고려공산당 내의 분쟁을 해결하고자 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데에 동행하였다.[1]2. 3. 국내 활동과 조선어학회 사건 (1929-1945)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는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도 참여하였다.[4] 1930년 신간회 대표로 동포 구제 목적을 띠고 만주 지방을 돌아보다가 귀국했다.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 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4]
1942년 7월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최현배, 이윤재와 함께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구속당했다.[4] 10월 1일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고, 최현배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 (역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던 이윤재는 수감 중 옥사했다.)[4]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 이틀 후 8월 17일 출소했다.[4]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이근엽 교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2. 4. 광복 후 정치 활동과 월북 (1945-1948)
1945년 8월 광복 후 석방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이극로는 다시 한글 연구에 몰두하였다.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한글 연구를 다시 이끌었다.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불거져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김구가 이끌던 1945년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운동본부'의 위원으로 반탁운동에 참여했다.[6] 이후 부활된 조선어학회 회장에 선출되고,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회장에 위촉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1946년 건민회(建民會)에 입당, 그해 건민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봄부터 미군정 주도로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자, 그는 좌우합작에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입법기관(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서는 좌우합작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려고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초에는 조봉암과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했다. 이후 제2차 미소공위 재개 조짐이 보이자, 좌우합작위원회에 가담해 '시국대책협의회'에 참가한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되었다. 그 해 12월 20일, 김규식이 주도한 민족자주연맹 결성식에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7]
1948년 4월 김구가 주도하던 남북협상 위원으로 참가해 평양을 방문한다. 이 때, 김구는 서울로 귀환했지만, 이극로는 북한에 잔류하면서 결과적으로 월북하게 되었다.
2. 5. 북한에서의 활동 (1948-1978)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상에 임명되어 1953년 12월까지 재직하였다.[8]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과학원 후보원사를 거쳐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하여 이후 숙청되지 않았다.
1961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을 맡았고,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년부터 북한의 언어 규범화 운동인 문화어운동을 이끌었으며, 〈조선어조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이 있다. 1978년 사망했다.
3. 평가
이극로는 일제강점기에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썼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하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무임소상,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극로에 대한 평가는 남북한에서 차이를 보인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북 행적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으나, 최근 독일 유학 시절 한글 보급 활동이 재조명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그를 한국어 발전과 과학적 해명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하며,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 원사 칭호와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사후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했다.
3. 1. 남한에서의 평가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월북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의 관심에서 멀어졌었다. 그러나 최근 이극로가 1920년대 외국(독일)에서 유학했을 시절 한글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재조명을 받고 있다.[10]3. 2. 북한에서의 평가
일제강점기부터 오랜 기간 교수 및 연구 활동을 통해 한국어 발전과 과학적 해명에 큰 공을 세웠다.[9] 1973년 북한 정부로부터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 원사(1973년)이며 박사 학위(1970년)를 받았다. 사후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9]4. 일화
공병우는 이극로가 눈병으로 자신의 병원에 찾아왔을 때, 한글학자인 이극로에게 영향을 받아 한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11]
5. 저서 및 논문
이극로는 일제강점기에 한글 한글 맞춤법 연구에 참여하여 1929년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 1930년 조선어 맞춤법 통일안 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 1936년 조선어 사전 편찬 위원 전임 위원 등을 역임했다.[1][2]
5. 1. 저서
- 〈국어학 논총〉(1948)
-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9)
- 〈조선말 조(調) 연구〉(1966)
5. 2. 논문
참조
[1]
웹사이트
이극로(李克魯) Lee Guk-ro
https://encykorea.ak[...]
2023-10-13
[2]
웹사이트
송건호전집 A - 웨이백 머신,송건호 저
https://www.daum.net[...]
[3]
웹사이트
Daily Report, Foreign Radio Broadcasts
https://books.google[...]
[4]
서적
송건호전집
http://book.daum.net[...]
2016-03-07
[5]
웹사이트
이근엽 연세대 명예교수, 조선어학회 사건 증언
http://www.itnews.or[...]
[6]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7]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8]
뉴스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9-11
[9]
웹사이트
이극로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10]
논문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한민족학회
[11]
웹사이트
공병우 타자기, 1949
http://navercast.nav[...]
[12]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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