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
1. 개요
권시는 17세기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학행이 뛰어나 여러 관직을 거쳤다. 효종 즉위 후 벼슬길에 올라 공조 좌랑,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했으며, 효종 사후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에서 남인 윤선도를 변호하다 파직되었다. 이후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사후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탄옹집》이 있으며, 묘소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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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 -
경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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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 -
심광수
심광수는 조선 시대 남인 산림으로, 척화론을 주장하고 예송논쟁에 참여하여 3년설을 주장하다 유배되어 사망했으나,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청안군에 추봉된 인물이다. -
1604년 출생 -
요한 루돌프 글라우버
요한 루돌프 글라우버는 독일의 약사이자 화학자, 초기 화학 공학자로서 황산나트륨을 발견하고 염산 등을 합성했으며, 케미컬 가든을 최초로 관찰, 기록하고 40권의 책을 저술했다. -
1604년 출생 -
주앙 4세
주앙 4세는 1640년 포르투갈 독립을 쟁취하고 스페인과의 복고 전쟁을 이끈 브라간사 공작 출신의 국왕으로, 외교적 군사적 성과와 더불어 음악가로서 문화 예술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그의 딸은 잉글랜드 국왕과 결혼했다. -
서인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서인 -
성혼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2. 생애
권시는 1636년 학행으로 여러 번 추천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벼슬길에 올라 승정원승지,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했다. 1660년 예송 논쟁 당시 남인 윤선도를 변호하다 파직되었다. 이후 경기도 광주와 충청남도 공주 등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으며, 사후 의정부좌찬성이 추증되고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탄옹집》이 있다.
2.1. 관직 생활
1636년 학행이 뛰어나 여러 번 추천을 받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누차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특별 지시와 사돈이었던 송시열 등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여러 요직을 거쳐 통정으로 승진, 승정원승지가 되었다. 1659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1660년 효종 사후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당론을 따르지 않고 남인 윤선도를 변호하였다. 윤선도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생명을 걸고 서인을 공격하는 태도를 용기가 가상하다고 평가했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었다. 낙향 도중 경기도 광주의 선영에 들렀다가 그 근처에 머물러 살았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후 남인으로부터 일부 지지를 받아 서인 강경파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668년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충청남도 공주로 돌아가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畿湖學派)로서 예론(禮論)에 밝았다.
2.2. 예송 논쟁과 윤선도 변호
1659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1660년 효종이 사망하자 자의대비가 효종의 상복을 입는 문제(예송 논쟁)를 놓고, 서인은 차남의 예로서 1년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장남을 대신한 장남이며 왕통과 적통을 이간하려 한다며 대립하였다. 이때 권시는 당론을 따르지 않고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였다. 윤선도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생명을 걸고 서인을 공격하는 태도를 용기가 가상하다고 평가했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었다.
2.3. 낙향과 학문 연구
1636년 학행이 뛰어나 여러 번 추천을 받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누차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특별 지시와 사돈이었던 송시열 등 문인, 학자들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660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은 차남의 예로서 1년상을 주장하고, 남인은 장남을 대신한 장남이며 왕통과 적통을 이간하려 한다고 공세를 펼치며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그는 당론을 따르지 않고 남인 윤선도를 변호하였다. 윤선도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생명을 걸고 서인을 공격하는 태도를 보고 이를 용기가 가상하다고 평가했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었다. 낙향 도중 경기도 광주의 선영에 들렀다가 선영 근처에 머물러 살았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후 남인으로부터 일부 지지를 받아 서인 강경파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668년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충청남도 공주로 돌아갔으며, 이후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畿湖學派)로서 예론(禮論)에 밝았다.
3. 저서
* 탄옹집
4. 묘소
권시의 묘는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51호이다.
5. 관련 문화재
만회집탄옹문집판목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