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금인칙서 (1356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금인칙서(1356년)는 13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반포한 칙령으로, 황제 선출 절차와 선제후의 권한을 규정했다. 이 칙서는 황제 선출에 참여하는 7명의 선제후를 명확히 지정하고, 다수결 원칙을 도입하여 선거 절차를 구체화했다. 금인칙서는 선제후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하여 제국 내에서 그들의 역할을 강화했으며, 선제후령의 분할을 금지하고 장자 상속을 규정했다. 이로 인해 제국 내 독립적인 국가들이 설립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도시 동맹을 금지하여 귀족의 권한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금인칙서 (1356년)
명칭
한국어금인칙서 (1356년)
독일어Goldene Bulle 골데네 불레
체코어Zlatá bula 즐라타 불라
라틴어Bulla Aurea 불라 아우레아
이탈리아어Bolla d'oro 볼라 도로
기본 정보
칙서의 금으로 된 인장
칙서에 사용된 금인
작성일1356년 1월 10일 (1~23장)
1356년 12월 25일 (24~31장)
비준일알려진 바 없음
작성자뉘른베르크메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 대표자들
서명자카를 4세
목적7명의 선제후에게 로마인의 왕 선출 권한 부여
소장처

2. 배경

금인칙서는 황금 옥새를 사용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1356년 1월 뉘른베르크와 12월 메츠에서 각각 전반부와 후반부가 발포되었으며, 라틴어로 쓰여 있다. 이 칙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와 선제후 특권을 주로 다루었으며, 뉘른베르크 제국 회의에서 발포되었다.

주요 내용 중 하나는 체코 왕국의 군주가 제국 내 일곱 선제후 중 세속 권력 대표의 선두에 서며, 제국의 아치-컵 베어리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황제 선거와 선거후의 상속 및 특권을 규정하여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으나,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칙서의 주요 내용은 7선거후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보헤미아의 국왕, 팔츠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공개 투표와 다수결 원칙에 따라 황제를 선출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거후령은 분할하지 않고 장자 상속제를 따르며, 관세 징수권 등의 특권과 자치적 재판권, 지고권을 인정받았다.

이 금인칙서는 독일 군주들이 종종 침범을 시도해 온 체코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칙서의 골격은 1806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제국의 칙령으로 유지되었다.

금인칙서의 기록에 따르면, 선제후 간의 단결을 도모하고 만장일치 선거를 달성하며, 불화와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법률을 공포, 제정, 비준할 것을 권고한다고 되어 있다.[3]

루트비히 4세의 후계자이자 경쟁자였던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통해 황제 선출 과정을 더욱 명확하게 규정했다.

2. 1. 렌세 선언 (1338)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 성직자 및 세속 제후에 의한 로마왕 선출은 잘 확립되어 있었지만, 그 과정과 교황의 개입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논란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1314년, 바이에른의 루트비히와 아우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가 서로 반대되는 선제후 집단에 의해 선출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결국 경쟁자의 주장을 전투에서 제압한[4] 루이 4세는 1338년 렌세 선언을 통해 이 과정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를 처음으로 했다. 렌세 선언은 교황의 개입을 부인하고 새로운 왕을 선택할 권한을 선제후로 제한했다.

3. 선제후

금인칙서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와 선제후의 특권을 규정한 중요한 문서이다. 1356년 카를 4세가 반포한 이 칙서는 황제 선출 과정의 혼란을 막고 제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칙서는 황제 선출권을 가진 7명의 선제후를 명확히 규정했다. 선제후는 성직 제후 3명(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과 세속 제후 4명(보헤미아 왕, 라인 팔츠 백작,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 구성되었다.[5] 이들은 제국 내에서 특별한 지위와 권한을 누렸다.

금인칙서는 황제 선거를 7선거후의 공개 투표와 다수결 원칙에 따르도록 규정했다. 또한, 선제후령은 분할할 수 없으며 장자 상속제를 통해 계승되도록 하여 선거권이 분산되는 것을 막았다. 선제후는 관세 징수권, 자치적 재판권 등 다양한 특권을 인정받았다.[3]

하지만 이러한 선제후 선정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주요 경쟁자였던 비텔스바흐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논란을 야기했다.

3. 1. 선제후 목록

구분선제후궁정 직위투표 순서
성직 선제후마인츠 대주교독일의 대재상7번째
쾰른 대주교이탈리아의 대재상2번째
트리어 대주교부르군디의 대재상1번째
세속 선제후보헤미아 왕대술 시중3번째
라인 팔츠 백작집사4번째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원수5번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대실장6번째

[5]

3. 2. 선제후 선정의 논란

금인칙서는 왕을 선출할 7명의 선제후(Kurfürsten)를 명확히 지정하고, 궁정에서의 그들의 (대부분 의례적인) 직위인 ''Reichserzämter''를 정의했다.[5]

1400년경의 국왕 바츨라프의 금인칙서 사본,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구분선제후궁정 직위투표 순서
성직 선제후마인츠 대주교독일의 대재상7번째
쾰른 대주교이탈리아의 대재상2번째
트리어 대주교부르군디의 대재상1번째
세속 선제후보헤미아 왕대술 시중3번째
라인 팔츠 백작집사4번째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원수5번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대실장6번째



금인칙서에는 제국에서 다수결 투표의 원칙이 처음으로 명시되었다. 금인칙서는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는 데 7표 중 4표가 항상 충분하다고 규정했다. 그 결과, 3명의 선제후는 더 이상 선거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선제후령은 분할 불가로 선언되었고, 선거권이 분할되지 않도록 승계가 규제되었다. 또한, 금인칙서는 선제후에게 여러 특권을 굳혀 제국 내에서의 그들의 격상된 역할을 확인했다.

1356년의 신성 로마 제국


이러한 선제후의 법전화는, 비록 선례에 기초했지만, 특히 통치 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두 주요 경쟁자와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공국과 팔츠 백국을 통치했다. 왕조 분열로 인해 두 영토는 가문의 별개의 분파로 넘어갔다. 1329년의 파비아 조약은 팔츠 분파를 복원하여 바이에른과 팔츠가 미래 선거에서 번갈아 가며 투표할 것을 규정했지만, 금인칙서는 선거권을 바이에른이 아닌 팔츠에 고정시켰다. 이는 부분적으로 샤를 4세의 전임자이자 경쟁자인 루트비히 4세가 그 분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4세의 아들들인 루트비히 5세와 바이에른의 슈테판 2세는 바이에른이 170년 이상 그들의 가족의 주요 영토이자 제국의 원래 공작령 중 하나였기 때문에 팔츠보다 우선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며 누락에 항의했다. 바이에른이 선제후 목록에서 제외된 것은 최근에 재통일된 바이에른이 다시 왕조 분열에 빠지게 했다. 브란덴부르크는 1356년에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수중에 있었지만, 1373년에 룩셈부르크 가문에 영토를 잃었고, 그로 인해 바이에른 분파는 1623년까지 선제후 회의에서 대표되지 못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오랜 경쟁자였으며, 선제후 목록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왕조가 분열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분열된 오스트리아의 공작 중 한 명인 루돌프 4세는 프리빌레기움 마이우스를 위조했는데, 이 문서는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승격된 오스트리아에 장자 상속을 포함한 특별한 특권을 부여했다. 당시 황제와 다른 군주들에게 무시되었지만, 이 문서는 15세기에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결국 비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1526년에 보헤미아 왕국을 상속받기 전까지 선거권을 갖지 못했다.

4. 선거 절차

금인칙서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와 선제후의 상속 및 특권을 규정하여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으나,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켰다. 주요 내용은 7명의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보헤미아의 국왕, 팔츠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에 의한 공개 투표와 다수결 원칙에 따라 황제를 선출한다는 것이다. 또한, 선제후령은 분할할 수 없으며 장자 상속제를 따르고, 관세 징수권, 자치적 재판권, 지고권 등 선제후의 특권을 인정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4. 1. 선거 장소 및 기간

금인칙서는 선거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규정하여, 선제후뿐만 아니라 선거가 열릴 프랑크푸르트 시민, 그리고 선제후가 선거를 위해 이동해야 하는 지역의 백작에 이르기까지,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시적으로 나열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선거를 개최하기로 한 결정은 선거와 대관식이 프랑크족 영토에서 치러져야 한다는 동프랑크 시대부터의 전통적인 감정을 반영했다.[5] 그러나 선거 장소는 지정된 유일한 장소가 아니었다. 금인칙서는 대관식이 아헨에서 열리고, 뉘른베르크가 통치 첫 번째 제국 회의가 열리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명시했다.[6] 선거는 30일 이내에 완료되어야 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선제후는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빵과 물만 섭취하도록 규정했다.

Quod si facere distulerint infra triginta dies, a die prestiti juramenti prefati continuo numerandos, extunc transactis eisdem triginta diebus amodo panem manducent et aquam et nullatenus civitatem exeant antedictam, nisi prius per ipsos vel majorem partem ipsorum rector seu temporale caput fidelium electum fuerit, ut prefertur.|그러나 만약 그들이 앞에서 언급한 맹세를 한 날로부터 연속으로 계산하여 30일 이내에 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30일이 지난 시점부터는 빵과 물만 먹고 앞에서 언급한 도시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서는 안 된다. 단, 그들이나 그들 대다수에 의해 통치자 또는 신실한 자들의 세속적인 수장이 먼저 선출되지 않는 한, 이전과 같이 말이다.la [8]

4. 2. 다수결 원칙

Quod si facere distulerint infra triginta dies, a die prestiti juramenti prefati continuo numerandos, extunc transactis eisdem triginta diebus amodo panem manducent et aquam et nullatenus civitatem exeant antedictam, nisi prius per ipsos vel majorem partem ipsorum rector seu temporale caput fidelium electum fuerit, ut prefertur.la[7]

[번역:] 그러나 만약 그들이 앞에서 언급한 맹세를 한 날로부터 연속으로 계산하여 30일 이내에 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30일이 지난 시점부터는 빵과 물만 먹고 앞에서 언급한 도시를 떠나서는 안 된다. 단, 그들이나 그들 대다수에 의해 통치자 또는 신실한 자들의 세속적인 수장이 먼저 선출되지 않는 한, 이전과 같이 말이다.[8]

금인칙서는 선거가 30일 이내에 완료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선제후는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빵과 물만 섭취하도록 규정했다.[7]

5. 주요 내용 및 특권

금인칙서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와 선제후의 특권을 규정하여 제국의 안정을 꾀했으나, 오히려 제후 간의 분열을 심화시켰다.[5]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황제는 7선제후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보헤미아 국왕, 팔츠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공개 투표와 다수결 원칙에 따라 선출한다.
  • 선제후령은 분할할 수 없으며 장자 상속제를 따른다.
  • 선제후는 관세 징수권, 자치적 재판권, 지고권 등 특권을 가진다.


이 칙서는 체코 왕국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으며,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제국의 칙령으로 유지되었다.

5. 1. 선제후 특권

우선, 금인칙서는 왕을 선출할 일곱 명의 선제후를 명확히 지정하고, 궁정에서의 그들의 (대부분 의례적인) 직위인 ''Reichserzämter''를 정의했다.[5]

구분선제후궁정 직위투표 순서
성직 선제후마인츠 대주교독일의 대재상7번째
쾰른 대주교이탈리아의 대재상2번째
트리어 대주교부르군디의 대재상1번째
세속 선제후보헤미아 왕대술 시중3번째
라인 팔츠 백작집사4번째
작센-비텐베르크 공작원수5번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대실장6번째



금인칙서는 제국에서 다수결 투표의 원칙을 처음으로 명시하며,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는 데 7표 중 4표가 항상 충분하다고 규정했다. 그 결과, 3명의 선제후는 더 이상 선거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선제후령은 분할 불가로 선언되었고, 선거권이 분할되지 않도록 승계가 규제되었다. 금인칙서는 선제후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하여 제국 내에서 그들의 격상된 역할을 확인했다. 이는 제국 내에서 대개 독립적인 국가들이 설립되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러한 선제후의 법전화는 선례에 기초했지만, 통치 가문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두 주요 경쟁자와 관련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공국과 팔츠 백국을 통치했다. 왕조 분열로 두 영토는 가문의 별개 분파로 넘어갔다. 1329년 파비아 조약은 팔츠 분파를 복원, 바이에른과 팔츠가 미래 선거에서 번갈아 가며 투표할 것을 규정했지만, 금인칙서는 선거권을 바이에른이 아닌 팔츠에 고정시켰다. 이는 샤를 4세의 전임자이자 경쟁자인 루트비히 4세가 그 분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5세와 바이에른의 슈테판 2세는 바이에른이 170년 이상 그들 가족의 주요 영토이자 제국의 원래 공작령 중 하나였기에 팔츠보다 우선권을 받아야 한다고 항의했다. 바이에른이 선제후 목록에서 제외되며 최근 재통일된 바이에른은 다시 왕조 분열에 빠졌다. 브란덴부르크는 1356년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수중에 있었으나(가문의 말단 구성원이 보유), 1373년 룩셈부르크 가문에 영토를 잃었고, 바이에른 분파는 1623년까지 선제후 회의에서 대표되지 못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오랜 경쟁자였으며, 선제후 목록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왕조가 분열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분열된 오스트리아의 공작 중 한 명인 루돌프 4세는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인 프리빌레기움 마이우스를 위조했다. 이 문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승격된 오스트리아에 장자 상속을 포함한 특별한 특권을 부여했다. 당시 황제와 다른 군주들에게 무시되었지만, 이 문서는 15세기에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가 되었을 때 비준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526년에 보헤미아 왕국을 상속받기 전까지 선거권을 갖지 못했다.

5. 2. 도시 동맹 및 결사 금지

카를 4세는 금인칙서 제15장에서 conjurationes, confederationes|코뉴라티오네스, 콘페데라티오네스la, conspirationes|콘스피라티오네스la를 금지했는데, 이는 특히 도시 동맹(Städtebündede)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의 공동체 운동을 통해 생겨난 다른 공동체 연맹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Städtebündede는 이후 때로는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재건되더라도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감소했다. 따라서 금인칙서는 도시를 희생시키면서 귀족의 권한을 전반적으로 강화했다.

6. 교황과의 관계

교황 인노첸시오 6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1356년 금인칙서에서 교황의 관련성은 기본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9] 카를 4세가 로마왕 선출 절차를 규정하면서 선출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비스콘티 가문에 맞서기 위해 카를 4세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9] 인노첸시오 6세는 1356년 금인칙서 발표 이후 1362년 사망할 때까지 카를 4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0]

7. 역사적 영향 및 의의

금인칙서는 황금 옥새를 사용한 데서 나온 이름으로, 라틴어로 쓰여 있다. 1356년 1월 뉘른베르크와 12월 메츠에서 각각 전반부와 후반부가 발포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제와 선제후 특권을 주로 다루고 있다.[1]

금인칙서는 황제 선거와 선거후의 상속 및 특권을 규정하여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 했으나, 오히려 제후들의 권한을 강화하여 분열을 심화시켰다.[1] 주요 내용은 7선거후(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보헤미아의 국왕, 팔츠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공개투표와 다수결 원칙에 따른 황제 선출, 선거후령의 불분할, 장자 상속제, 관세 징수권, 자치적 재판권과 지고권 인정 등이었다.[1]

이 칙서는 체코 왕국의 군주가 제국 내 7선제후 중 세속 권력 대표의 제일 선두에 서며, 제국의 아치-컵 베어러 지위를 계속 유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통해 체코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1]

금인칙서의 골격은 1806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제국의 칙령으로 유지되었다.[1]

참조

[1] 서적 The Golden Bull of 1356 AD https://books.google[...] Dalcassian Publishing Company 2019-11-02
[2] 웹사이트 Memory of the World - The “Golden Bull” – All seven originals and the “King Wenceslaus’ luxury manuscript copy” of the 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http://www.unesco.or[...]
[3] 문서 Golden Bull of 1356 http://avalon.law.ya[...] Yale
[4] 간행물 The Holy Roman Empire Federick A. Praeger Publishers 1968
[5]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Macmillan
[6] 간행물 The Holy Roman Empire Federick A. Praeger Publishers 1968
[7] 웹사이트 Goldene Bulle Karls IV. Capitulum II http://www.phil.uni-[...]
[8] 웹사이트 The Avalon Project: The Golden Bull of the Emperor Charles IV 1356 A.D. http://avalon.law.ya[...]
[9] 간행물 The Avignon Papacy 1305–1403 Archon Books 1970
[10] 간행물 Popes, Cardinals and War I.B. Tauris 2006
[11] 웹사이트 Memory of the World - The “Golden Bull” – All seven originals and the “King Wenceslaus’ luxury manuscript copy” of the 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http://www.unesco.o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