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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인노첸시오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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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1352년부터 1362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1352년 교황 선거에서 선출된 후, 그는 추기경단이 교황보다 우월하다는 합의를 철회하고, 교회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또한 특사 알보르노스 추기경을 통해 로마의 질서를 회복하고, 브레티니 조약을 중재하는 등 외교 활동을 펼쳤다. 요한 22세와 베네딕토 12세가 축적한 재산이 클레멘스 6세 때 낭비되자 재정 개혁을 시도했지만, 이탈리아 전쟁과 흑사병으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을 후원했지만 프란치스코회 영성파에 대해 가혹한 조치를 취했으며, 136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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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인노첸시오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노첸시오 6세 문장
이름인노첸시오 6세
본명에티엔 오베르
출생1282년
출생지레몽, 프랑스 왕국
사망1362년 9월 12일
사망지아비뇽, 교황령
재임 시작1352년 12월 18일
재임 종료1362년 9월 12일
선임자클레멘스 6세
후임자우르바노 5세
직책
직함로마 주교
교회가톨릭교회
서임
추기경 서임일1342년 9월 20일
추기경 서임자클레멘스 6세
스타일
호칭성하
비공식 호칭각하
종교적 호칭거룩한 아버지
사후 호칭없음
추가 정보
라틴어 이름Innocentius VI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 다 피렌체의 프레스코, 1365년

2. 생애 초기

에티엔 오베르는 1280년대 후반 리무쟁 지방의 몽텔드젤라 영주인 아데마 오베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모주 교구 레 몽 촌락 출신으로, 툴루즈에서 민법을 공부하고 가르쳤다. 1338년 누아용 주교, 1340년 클레르몽 주교가 되었다.[1] 1342년 9월 20일 성 요한과 성 바오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으며,[1] 1352년 2월 13일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의해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다.[2]

2. 1. 출생과 가문

에티엔 오베르는 리무쟁 주의 몬텔드즐라 영주인 아데마르 오베르(1260 - ?)의 아들로,[4] 리모주 교구의 작은 마을인 레몽에서 태어났다.[4] 툴루즈에서 시민법을 공부하였다.[5]

2. 2. 초기 경력

에티엔 오베르는 리무쟁 주의 몬텔드즐라 영주인 아데마르 오베르(1260 - ?)의 아들이다.[4] 그는 1280년대 후반에 태어났으며, 리모주 교구의 작은 마을인 레몽 출신이다.[4][1] 에티엔은 툴루즈에서 시민법을 공부하고 가르쳤으며, 1338년 누아용의 주교가 되었고, 1340년에는 클레르몽의 주교가 되었다.[5][1]

1342년 9월 20일, 에티엔은 성 요한과 성 바오로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1] 1347년 9월,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의해 임명된 에티엔은 칼레 휴전으로 이어진 평화 사절단의 일원으로 추기경 안니발도와 동행했다. 1352년 2월 13일,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의해 오스티아와 벨레트리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다.[2]

3. 교황 선출과 즉위

1352년 12월 30일 에티엔은 교황 즉위식을 통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6] 1352년 교황 선거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에티엔은 추기경단이 교황보다 우월하다는 내용의 합의를 철회했다.[1] 아비뇽 콘클라베에서 추기경단은 누구든지 교황으로 선출되면 교황의 권한과 수입을 추기경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동의하였으나, 1353년 인노첸시오 6세는 교황 선출 전에 한 합의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5]

4. 교황 재위 기간 (1352년 - 1362년)

1352년 12월 30일 에티엔은 교황 즉위식을 통해 교황좌에 착좌하였다.[6] 1352년 교황 선거에서 가이야르 드 라 모트 추기경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3] 그의 정책은 아비뇽 유수 시대의 다른 교황들과 비교했을 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란치스코회 영성파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취했지만, 대체로 정의롭고 자비로운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성 스웨덴의 브리짓은 그를 기독교인 박해자로 비난했다.[3] 1362년 9월 12일에 선종했으며 교황 우르바노 5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오늘날 그의 무덤은 빌뇌브레자비뇽의 카르투시오회 수도원(Chartreuse du Val de Bénédiction)에 조성되어 있다.

4. 1. 교회 개혁

인노첸시오 6세는 교회 업무 집행에 필요한 많은 개혁을 도입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353년 교황 선출 전에 추기경단과 교황의 권한 및 수입을 나누기로 한 합의를 무효라고 선언하였다.[5] 교황 특사 힐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 추기경을 통해 로마의 질서를 회복하였다. 1355년에는 인노첸시오 6세의 허락을 받고 카를 4세가 로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는 대관식을 가졌는데, 카를은 대관식이 거행되는 날에 로마를 교황에게 다시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교황 요한 22세교황 베네딕토 12세가 축적한 재산의 대부분은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이르러 지나치게 낭비되었다. 이에 인노첸시오 6세는 교황 경당의 관리자들을 12명에서 8명으로 감축하여 인건비를 절약하였고, 미술품을 의뢰하기보다는 매각하는 등 엄격한 재정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과 아비뇽흑사병의 피해에서 복구하기 위한 비용으로 많은 돈을 지출하여, 1357년에는 재정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3]

4. 2. 외교 활동

인노첸시오 6세는 프랑스잉글랜드 간의 브레티니 조약 체결을 중재하고,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의 로마 교황좌 복속 제안을 받는 등 외교 분야에서 여러 활동을 펼쳤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대관식을 허락하며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도 유지했다.

4. 2. 1. 브레티니 조약 중재

1360년 프랑스잉글랜드 사이에 체결된 브레티니 조약은 주로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다.[6]

4. 2. 2.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는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에 맞서 자신을 원조해 준다면 그 대가로 그리스 정교회로마 교황좌에 귀속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6] 하지만 인노첸시오 6세는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에 황제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4. 2. 3.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135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허락을 받아 로마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카를 4세는 대관식 당일에 로마를 교황에게 다시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4. 3. 재정 문제

교황 요한 22세교황 베네딕토 12세가 축적한 재산의 대부분은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이르러 지나치게 낭비되었다.[6] 이에 인노첸시오 6세는 교황 경당의 관리자 수를 12명에서 8명으로 감축하여 인건비를 절약하고, 미술품을 의뢰하는 대신 매각하는 등 엄격한 재정 정책을 단행하였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과 아비뇽흑사병의 피해에서 복구하기 위한 비용으로 많은 돈을 지출하여, 1357년까지 재정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놓였다.[6]

4. 4. 프란치스코회 영성파 탄압

인노첸시오 6세는 프란치스코회 영성파에 대해 극심한 조치를 취했다.[3]

5. 죽음과 유산

인노첸시오 6세는 1362년 9월 12일에 선종했으며, 교황 우르바노 5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3] 그의 무덤은 빌뇌브레자비뇽의 카르투시오회 수도원(Chartreuse du Val de Bénédiction)에 조성되어 있다.

인노첸시오 6세는 문학을 후원하였으나, 프라티첼리에 대해서는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대체로 정의롭고 자비로운 인물로 평가받았지만,[3] 스웨덴의 브리짓은 그를 기독교인 박해자로 비난하기도 했다.[3]

6. 평가

인노첸시오 6세는 아비뇽 유수 시기의 다른 교황들과 비교했을 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교회 행정 개혁을 추진했고, 교황 특사 힐 알바레스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 추기경을 통해 로마 질서 회복에 힘썼다.[6][5] 1355년에는 카를 4세가 인노첸시오 6세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또한 인노첸시오 6세의 중재로 1360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었다.[6]

교황 요한 22세교황 베네딕토 12세가 축적한 재산이 교황 클레멘스 6세 때 낭비되자, 인노첸시오 6세는 교황 경당 관리자 수를 줄이고 미술품을 매각하는 등 재정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쟁과 흑사병 복구 비용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6]

인노첸시오 6세는 문학 후원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프란치스코회 영성파에 대한 가혹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정의롭고 자비로운 인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성 스웨덴의 브리짓은 그를 기독교인 박해자로 비난하기도 했다.[3]

참조

[1] 서적 Apocalypse in Rome: Cola di Rienzo and the Politics of the New Ag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 서적 Hierarchia catholica Tomus I, editio altera Monasterii
[3] 서적 Lives of the Popes https://books.google[...] HarperCollins
[4] 서적 Vicars of Christ: A History of the Popes https://books.google[...] Citadel Press
[5] 서적 Apocalypse in Rome: Cola di Rienzo and the Politics of the New Ag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6] 서적 Lives of the Popes https://books.google[...] HarperColl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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