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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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무라 도시오는 1909년 일본 미에현 출생으로, 중의원 의원을 12번 역임한 정치인이다. 그는 도쿄 제국 대학을 졸업하고 체신성을 거쳐 정계에 입문하여, 내각관방장관, 경제기획청 장관, 외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특히 외무대신 재임 중 아프리카 국가를 방문하여 일본과 아프리카 간의 협력을 시작했으며, 자유민주당 내에서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 대표 간사로 활동하며 비둘기파의 역할을 수행했다. 1983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받았으며, 같은 해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기무라 도시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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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무라 도시오 (1971년)
원어 이름木村 俊夫 (きむら としお)
출생1909년 1월 15일
출생지도인, 일본 제국
사망1983년 12월 1일
사망지도쿄, 일본
정당자유민주당
학력도쿄 제국대학
경력
제97대 외무대신1974년 7월 16일 ~ 1974년 12월 9일
소속 내각제2차 다나카 제1차 개조 내각, 제2차 다나카 제2차 개조 내각
제21대 경제기획청 장관1971년 7월 5일 ~ 1972년 7월 7일
소속 내각제3차 사토 내각
제32대 내각관방장관1967년 6월 22일 ~ 1968년 11월 30일
소속 내각제2차 사토 내각,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 내각
중의원 의원1949년 1월 23일 ~ 1952년 8월 28일, 1953년 4월 19일 ~ 1983년 11월 28일
선거구구 미에 1구
당선 횟수12회
전직체신성, 운수성 관료
훈장훈1등 욱일대수장
친족 (정치가)조부: 기무라 세이타로, 부: 기무라 히데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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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09년(메이지 42년) 미에현토우인정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토우인정 명예 정민이 되었다. 조부 키무라 세이타로와 부친 키무라 히데오키는 모두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제3고등학교 (구제) 문과 병류를 거쳐 1938년(쇼와 13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에서 법률학과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체신성에 들어갔다. 전시에는 체신성과 철도성이 통합된 운수통신성을 거쳐 운수성에서 근무했다.

전후 사토 에이사쿠의 권유로 운수성 해운총국 총무과장에서 정계로 전신, 1949년 (쇼와 24년)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미에 1구에서 보수계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에 소속되었다. 이후 중의원 의원에 12번 당선되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지만, 사토 에이사쿠 정권 발족 후인 1966년 (쇼와 41년)부터 1971년 (쇼와 46년)에 걸쳐 내각 관방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1966년 내각 관방 부장관에 취임하였고, 1967년 내각관방장관에 등용되었으나, 1968년 사토의 요청으로 호리 시게루에게 관방 장관직을 양보하고 다시 부장관으로 돌아갔다. 이 기간 동안 오키나와 반환의 최대 과제였던 "핵 없는 본토 수준 반환" 실현에 힘썼다.

1972년 (쇼와 47년) 사토 총리 퇴진에 따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했지만, 1974년 (쇼와 49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었다. 현직 외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나이지리아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4개국을 방문했다.

1977년 (쇼와 52년) 자유민주당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AA연)의 대표 간사에 취임하여 당내 비둘기파의 대표적 존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쇼와 58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받았다. 같은 해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고 은퇴했지만, 직후 12월 1일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4세.

2.1. 초기 생애

기무라는 1909년 1월 15일 정치 활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입법가였다. 1909년(메이지 42년) 미에현토우인정 출생으로, 후에 토우인정 명예 정민이 되었다. 조부 키무라 세이타로, 부친 키무라 히데오키는 모두 중의원 의원이었다. 제3고등학교 (구제) 문과 병류를 거쳐 1938년(쇼와 13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의 법률학과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2.2. 정치 경력

기무라 도시오는 자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12번 당선되었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으며, 일·팔레스타인 친선 의원 연맹 회장을 맡아 1981년 야세르 아라파트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 외에도 경제기획청 장관, 외무대신, 내각관방 부장관을 역임했다. 197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했다. 1983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받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2.2.1. 내각관방장관 및 부장관

자민당(LDP)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12번 당선된 기무라 도시오는 사토 에이사쿠 총리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다. 1966년(쇼와 41년) 내각관방 부장관에 취임하였고, 1967년(쇼와 42년)에는 후쿠나가 켄지의 병으로 인한 퇴임으로 내각관방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68년(쇼와 43년) 사토의 요청으로 호리 시게루에게 관방 장관직을 양보하고 다시 부장관으로 복귀했다. 기무라는 이 기간 동안 오키나와 반환의 주요 과제였던 "핵 없는 본토 수준 반환" 실현에 힘썼다.

2.2.2. 경제기획청 장관 및 외무대신 임시대리

1971년, 기무라 도시오는 경제기획청 장관에 취임하였다. 외무대신 후쿠다 다케오담석 수술로 입원하자, 외무대신 임시대리를 겸임했다.

1974년 7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기무라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여 오히라 마사요시의 뒤를 잇게 했다. 같은 해 10월 말과 11월 초, 기무라는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가나, 나이지리아, 자이르(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 탄자니아, 이집트를 방문했는데, 이는 일본 고위 정부 관리로서는 최초의 아프리카 국가 방문이었다.

2.2.3. 외무대신

1974년 7월 중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 의해 오히라 마사요시의 뒤를 이어 외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74년에 6개월 동안 재임했으며, 1971년에는 외무대신 대리를 역임한 적도 있었다.

1974년 10월 말과 11월 초, 기무라는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아프리카 국가와 일본 간의 협력을 시작했다. 그는 아프리카 국가를 방문한 최초의 일본 고위 정부 관리였다. 그의 아프리카 방문에는 가나, 나이지리아, 자이르(현재 콩고 민주 공화국), 탄자니아, 이집트가 포함되었다.

2.2.4. 자유민주당 내 활동

기무라 도시오는 자유민주당(LDP)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12번 당선되었다. 사토 에이사쿠 총리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했다. 일·팔레스타인 친선 의원 연맹 회장을 맡아 1981년 야세르 아라파트의 일본 방문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66년(쇼와 41년)부터 1971년(쇼와 46년)까지 관저(내각 관방)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 1966년 내각 관방 부장관에 취임했고, 1967년(쇼와 42년)에는 병으로 퇴임한 후쿠나가 켄지의 뒤를 이어 내각 관방 장관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1968년(쇼와 43년) 사토의 요청으로 호리 시게루에게 관방 장관을 양보하고 다시 부장관으로 돌아갔다. 이 기간 동안 오키나와 반환의 최대 과제였던 "핵 없는 본토 수준 반환" 실현에 힘썼다.

1971년(쇼와 46년) 경제기획청 장관에 취임했으며, 후쿠다 다케오 외무대신이 담석 수술로 입원했을 때 외무대신 임시대리를 맡기도 했다.

1972년(쇼와 47년) 사토 총리 퇴진에 따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사토의 뜻을 받들어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했다. 1974년(쇼와 49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어 오히라 마사요시의 뒤를 이었다. 6개월 동안 재임하며, 현직 외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나이지리아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4개국을 방문했다.

1977년(쇼와 52년) 자유민주당 아시아·아프리카 문제 연구회(AA연)의 대표 간사에 취임하여 당내 비둘기파의 대표적 존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3. 사망

기무라는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두었다. 1983년 12월 1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으며, 향년 74세였다.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하고 같은 해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은퇴했지만, 직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