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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파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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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욤 파렐은 148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종교개혁가로, 파리 대학교에서 개혁 사상을 접하고 루터교의 영향을 받아 복음을 전파했다. 스위스로 건너가 여러 도시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으며, 특히 제네바에서 장 칼뱅과 협력하여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견으로 인해 추방되었다. 이후 뇌샤텔에서 목회하며 칼뱅에게 조언을 구했으며, 69세에 결혼하는 등 논란을 겪기도 했다. 파렐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 성례를 주장했으며, 그의 저술과 활동은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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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파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세기 나무판에 그린 유화, 제네바 도서관 소장
본명기욤 파렐
국적프랑스
직업복음 전도자, 신학자
출생1489년, 오트잘프 주Gap
사망1565년, 뇌샤텔
시대종교 개혁
사상적 경향칼뱅주의
언어
사용 언어프랑스어

2. 생애와 활동

기욤 파렐은 종교개혁 초기 파리 대학교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가톨릭교회 사제의 제자였다.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6]을 만나 파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임명받도록 도움을 받았으며, 뫼 주교 기욤 브리소네가 모은 '뫼의 서클'의 회원이 되었다. 1522년까지 교구 설교자로 임명되었고, 요스 판 클리토베, 마르시알 마주리에, 제라르 루셀, 프랑수아 바타블 등 복음주의 인문주의자들을 초청하여 가톨릭 교회 내에서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도왔다. 뫼 서클은 성경 연구와 초기 교회의 신학으로의 복귀를 강조했다. 파렐은 루터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열렬히 옹호하게 되었고, 소르본의 비난을 받은 후 도피네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장 칼뱅의 친구이자 동맹이었지만,[7] 젊은 시절에는 루터교 사상을 옹호했다.[8]

파렐은 기독교 예배에서 이미지 사용에 반대하여 스위스로 도망갔다. 1524년 바젤에서 로마 교리를 비판하는 글을 썼지만, 에라스뮈스는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울리히 츠빙글리와 함께 취리히에서, 마르틴 부처와 함께 스트라스부르에서 시간을 보냈다. 1530년 노이샤텔이 개혁에 동참하도록 설득했다.[9]

1532년 제네바에 정착하여 목사로 남았고, 장 칼뱅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성찬 문제로 갈라섰고, 기성 권력의 저항으로 잠시 추방되었다가 베른 정부의 예배 자유 부여로 다시 설교할 수 있었다.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는데, 그의 엄격한 입장이 원인이었고 노이샤텔로 은퇴했다.

1558년, 69세의 파렐은 십 대였던 마리 토렐과 결혼했다. 장 칼뱅은 이 결혼에 대해 "충격을 받고 격분했다"며, "친구의 스캔들적인 행동이 유럽 전역의 종교개혁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까 두려워했다"고 한다.[10] 그 부부는 6년 후 아들을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했다.

말년에 칼뱅이 사망한 후 파렐은 메츠를 방문하여 설교했지만, 그 노력으로 지쳐서 메츠에서 사망했다. 1876년 5월 4일 노이샤텔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공개되었다.

뇌샤텔의 파렐 동상


제네바의 종교개혁 기념비. 왼쪽부터 파렐, 장 칼뱅, 테오도르 드 베자, 존 녹스

2. 1. 초기 생애와 파리에서의 수학

기욤 파렐은 1489년 가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5] 그는 어릴 적부터 언어와 과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부모는 그를 20세에 파리 대학교에 보내 공부시켰다. 종교개혁 초기, 파리 대학교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가톨릭교회 사제의 제자였다. 그곳에서 학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6]을 만나 파리 콜레주 카르디날 레모인에서 문법과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명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르페브르와 함께 1519년부터 뫼 주교 기욤 브리소네가 모은 '뫼의 서클'의 회원이 되었다. 파렐은 곧 대학의 섭정이 되었다. 1522년에는 주교에 의해 교구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많은 복음주의 인문주의자들을 자신의 교구로 초청하여 가톨릭 교회 내에서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도왔다.

이 인문주의자 그룹에는 요스 판 클리토베, 마르시알 마주리에, 제라르 루셀, 프랑수아 바타블도 포함되었다. 뫼 서클의 구성원들은 재능이 다양했지만, 일반적으로 성경 연구와 초기 교회의 신학으로의 복귀를 강조했다. 뫼에서 르페브르와 함께 일하면서 파렐은 루터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열렬히 옹호하게 되었다. 소르본의 비난을 받은 후 도피네에서 열렬히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장 칼뱅의 친구이자 동맹이었지만,[7] 젊은 시절에는 루터교 사상을 옹호했다.[8]

2. 2. 종교개혁에 투신

파렐은 종교개혁 초기에 파리 대학교에서 개혁을 지지하는 가톨릭교회 사제의 제자였다. 그곳에서 그는 학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6]을 만나 파리 콜레주 카르디날 레모인에서 문법과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임명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르페브르와 함께 그는 개혁적인 뫼 주교 기욤 브리소네가 1519년부터 모은 '뫼의 서클'의 회원이 되었다. 파렐은 곧 대학의 섭정이 되었다. 1522년까지 그는 주교에 의해 교구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파렐은 이제 많은 복음주의 인문주의자들을 자신의 교구로 초청하여 가톨릭 교회 내에서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이 인문주의자 그룹에는 요스 판 클리토베, 마르시알 마주리에, 제라르 루셀, 프랑수아 바타블도 포함되었다. 뫼 서클의 구성원들은 재능이 다양했지만 일반적으로 성경 연구와 초기 교회의 신학으로의 복귀를 강조했다. 뫼에서 르페브르와 함께 일하면서 파렐은 루터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를 열렬히 옹호하게 되었다. 소르본의 비난을 받은 후 파렐은 도피네에서 열렬히 복음을 전파했다. 파렐은 장 칼뱅의 친구이자 동맹이 되었지만,[7] 젊은 시절에는 루터교 사상을 옹호했다.[8]

파렐은 기독교 예배에서 이미지 사용에 반대하는 자신의 저작물로 인해 논란이 일어 스위스로 도망가야 했다. 1524년 바젤에 있는 동안 그는 로마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13개의 논문을 썼지만, 그의 주장이 너무 격렬하여 에라스뮈스조차 그의 추방을 요구하는 데 동참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로 갔다가 나중에 몽벨리아르로 갔지만 다시 떠나야 했다. 결국 그는 울리히 츠빙글리와 함께 취리히에서, 마르틴 부처와 함께 스트라스부르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베른 주의 어느 곳에서든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그는 1530년 노이샤텔이 개혁에 동참하도록 설득했다.[9]

파렐은 1532년 제네바에 정착하여 목사로 남았고, 장 칼뱅을 도시로 불러들였지만 성찬 문제로 그와 갈라섰다. 기성 권력의 저항으로 잠시 추방되었지만 베른 정부는 다시 그에게 예배의 자유를 부여했고 그는 다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파렐은 칼뱅과 함께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엄격한 입장이 원인이었고 그는 노이샤텔로 은퇴했다.

2. 3. 로망드 스위스 지역에서의 활동

파렐은 도피네 지방과 스위스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하였다. 1524년에는 바젤에서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에라스뮈스 때문에 추방당하기도 했다. 몽벨리아르 영주의 초청으로 설교를 하기도 하고, 마르틴 부서가 있는 스트라스부르에도 갔다. 로망드 스위스 지역의 에글, 로잔, 오르브, 그랑송, 이베르동레뱅, 뇌샤텔, 주네브 등을 방문했다. 뇌샤텔은 그의 영향으로 1530년 10월 23일에 종교개혁으로 전향하였고[12], 1531년 6월 15일에는 발랑장이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오르브에서 파렐은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온 피에르 비레를 격려하여 종교개혁 활동을 시작하게 하였다.

1532년부터 1536년까지 파렐은 주네브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1534년에는 주네브에 들른 장 칼뱅을 설득하여 그 도시에 머물게 하고,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 1536년 5월, 주네브시는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을 채택하였다. 1536년 11월 1일에는 보 칸톤 일대를 점령한 베른 당국의 영향으로 로잔에서 종교개혁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베른은 주네브와 동맹하여 사부아 공국 및 프랑스 왕국의 로마 가톨릭 세력이 스위스 서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파렐은 장 칼뱅과 함께 1537년 주네브로부터 추방당했다. 두 사람이 추진한 개혁의 엄격함이 주네브 정치 세력 일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자유당원들과 재세례파도 이에 가세했다. 주네브 추방 이후 교회의 권징 조항을 승인받는 조건으로 뇌샤텔로 가 남은 생을 뇌샤텔 수석목사로 목회한다. 뇌샤텔은 1542년 2월 권징 조항들을 승인했다. 1543년 2월 1일 뇌샤텔에서 목회자협의회를 최초로 세워 매주 목요일 모임을 통해 모든 현안을 다루었고 5월 9일 베른, 주네브와 함께 총회를 소집했다.

2. 4. 제네바 종교개혁과 추방

파렐은 1532년부터 1536년까지 주네브(제네바)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1534년에는 주네브에 들른 장 칼뱅을 강권하여 그 도시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와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다. 1536년 5월에 드디어 주네브시는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을 채택하였다.[12] 1536년 11월 1일에는 당시 보(Vaud) 칸톤 일대를 점령한 베른 당국의 정치적 종교적 영향 하에 로잔에서 종교개혁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베른은 주네브와 동맹하여 사부아 공국 및 프랑스 왕국의 로마교 세력이 스위스 서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파렐은 칼뱅과 함께 1537년 주네브로부터 추방당했다. 두 개혁자가 추진한 개혁의 엄격함이 주네브 정치 세력 일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자유당원들과 재세례파도 이에 가세했다.[12] 주네브 추방 이후 교회의 권징 조항을 승인받는 조건으로 뇌샤텔로 가 남은 생을 뇌샤텔 수석목사로 목회한다. 뇌샤텔은 1542년 2월 권징 조항들을 반대없이 승인했다. 1543년 2월 1일 뇌샤텔에서 목회자협의회를 최초로 세워 매주 목요일 모임을 통해 모든 현안을 다루었고 5월 9일 베른, 제네바와 함께 총회를 소집했다.

2. 5. 뇌샤텔에서의 목회와 말년

1558년, 69세의 파렐은 18세의 젊은 여성과 결혼하고자 하여 개혁자들 사이에서 논란과 반대를 일으켰다. 특히 장 칼뱅은 이 결혼에 반대했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 개혁자 사이의 오랜 우정은 금이 갔다.[14] 이는 파렐의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는 어떤 일이든 한 번 결심한 것에 대해서는 양보나 타협이 없었다. 이러한 성격은 평생 동안 식지 않은 개혁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나타났으며, 1565년 메츠의 개혁 신도들의 요청에 따라 추운 겨울 날씨에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그들을 돕기 위해 메츠로의 긴 여행을 감행하도록 하였다.[14] 파렐은 이 겨울 여행의 피로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9월 13일 뇌샤텔에서 사망했다.

3. 스위스 밖에서의 활동

파렐은 기독교 예배에서 이미지 사용에 반대하는 저작물로 인해 논란을 일으켜 스위스로 피신해야 했다. 1524년 바젤에 있는 동안 그는 로마 교리를 비판하는 13개의 논문을 썼지만, 그의 주장이 너무 격렬하여 에라스뮈스조차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몽벨리아르로 갔지만, 다시 떠나야 했다.[9]

이후 울리히 츠빙글리와 함께 취리히에서, 마르틴 부처와 함께 스트라스부르에서 시간을 보냈다. 베른 주의 어느 곳에서든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그는 1530년 노이샤텔이 종교개혁에 동참하도록 설득했다.[9]

1532년 제네바에 정착하여 목사로 남았고, 장 칼뱅을 도시로 불러들였으나, 성찬 문제로 칼뱅과 갈라서게 되었다. 기성 권력의 저항으로 잠시 추방되었지만, 베른 정부는 다시 그에게 예배의 자유를 부여했고, 다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파렐은 칼뱅과 함께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엄격한 입장이 원인이었다. 그는 노이샤텔로 은퇴하여 남은 생을 보냈고, 칼뱅의 자문을 자주 받았다.[9]

1558년, 69세의 나이에 파렐은 십 대였던 마리 토렐과 결혼했다. 스콧 마네츠는 칼뱅이 이 결혼에 대해 "충격을 받고 격분했다"며, "친구의 스캔들적인 행동이 유럽 전역의 종교개혁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까 두려워했다"고 적었다.[10] 그 부부는 6년 후 아들을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했다.[9]

말년에 칼뱅이 사망한 후, 파렐은 메츠를 방문하여 예전의 열정으로 설교했지만, 그 노력으로 지쳐서 메츠에서 사망했다.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1876년 5월 4일 노이샤텔에서 공개되었다.[9]

3. 1. 몽벨리아르 설교 (1524-1525)

1524-25년에 뷔르템베르크의 게오르크 1세(또는 그의 배다른 형 비르템베르크의 울리히 4세)의 초청으로 파렐은 몽벨리아르 주민들에게 종교개혁에 대해 설교하였다.[9] 그가 몽벨리아르에 남긴 흔적은 지금도 발견할 수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파렐은 덩페르(Denfert) 광장에 있는 생선 판매대 위에 서서 설교했으며, 이 돌 판은 현재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된 기념물이다.

3. 2. 메츠 설교 (1542)

1542년 파렐은 메츠의 최고행정관이던 로베르 드 외(Robert de Heu)의 초청을 받았다.[13] 로베르 드 외의 가족은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였다. 파렐은 메츠 자유시에서 종교개혁 이념을 설교하면서 샤토 드 몽투와에 머물렀고, 그곳은 로렌 지방 종교개혁의 대표지가 되었다.

4. 파렐의 신학 사상

파렐은 루터교의 영향을 받아 성경 연구와 초기 교회의 신학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장 칼뱅의 친구이자 동맹이었지만,[7] 젊은 시절에는 루터교 사상을 옹호했다.[8]

파렐은 기독교 예배에서 이미지 사용에 반대하여 논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스위스로 피신해야 했다. 1524년 바젤에서 로마 교리를 비판하는 13개의 논문을 썼으나, 그의 주장이 너무 격렬하여 에라스뮈스조차 추방을 요구했다. 울리히 츠빙글리마르틴 부처와 교류한 후, 1530년 노이샤텔이 종교개혁에 동참하도록 설득했다.[9]

4. 1. 핵심 교리

파렐이 채택한 제네바 신앙고백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 오직 하나님만 홀로 경배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중보자가 없다.
  •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의 믿음이 인정받아야 한다.
  •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사랑으로 선행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 삶으로 표현해야 한다.


파렐은 두 가지 성례를 제시했다.

  • 첫 번째 성례는 그분의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상징으로써의 세례이다.
  • 두 번째 성례는 성만찬이다.


파렐의 사역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이다.

파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든 잘못된 것이며 헛된 것으로 여기고 거부했다. 즉, 성경만이 믿음의 횃불이라고 보았다.

4. 2. 두 가지 성례

파렐은 제네바 신앙고백에서 두 가지 성례를 채택했다. 첫 번째 성례는 세례로, 신자가 그분의 교회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거룩한 상징이다. 두 번째 성례는 성만찬이다.[1]

4. 3. 구원의 조건

파렐은 제네바 신앙고백에서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중보자가 없으며, 사랑으로 믿음이 인정된다고 보았다. 그는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실천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삶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

파렐에 따르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1]

4. 4. 성경의 권위

파렐은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헛된 것으로 여겨 거부했다.[4]

5. 저술


  • 칼뱅 등 여러 종교 개혁가들과 주고받은 서신들이 뇌샤텔 주 기록 보관소(Archives de l'Etat de Neuchâtel)에 보관되어 있다.
  • Le Glaive de l’Esprit|성령의 검프랑스어
  • La Sainte Cène du Seigneur|성만찬프랑스어
  • Le Sommaire|개요프랑스어

6. 유산과 영향



기욤 파렐은 종교개혁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장 칼뱅의 친구이자 동맹이었으며,[7] 칼뱅을 제네바로 불러들여 종교개혁을 이끌도록 설득했다. 제네바에서 목사로 활동하며 칼뱅과 함께 종교개혁을 추진했지만, 성찬 문제로 갈등을 겪고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되기도 했다.[9]

노이샤텔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했다. 칼뱅의 자문을 자주 구했으며, 칼뱅 사후에도 메츠를 방문하여 설교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876년 5월 4일 노이샤텔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백과사전 Guillaume Farel http://www.britannic[...] 2016-01-14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Calvin's Company of Pastors: Pastoral Care and the Emerging Reformed Church, 1536-1609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11] 서적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12] 기타 "Farel, Guillaume"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en ligne 2006-03-27
[13] 기타 Le tragique destin d’un patricien messin. Gaspard de Heu, Sr. de Buy
[14] 웹사이트 « Farel, Guillaume » Dictionnaire historique de la Suisse en ligne, version du 27 mars 2006 http://www.hls-dhs-d[...]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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