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겸광
1. 개요
김겸광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4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세조를 지지하고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460년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군기감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평안도절도사와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성종 즉위를 지지하여 순성명량좌리공신에 녹훈되고 광성군에 책봉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사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경상도속찬지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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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0년 사망 -
아시카가 요시마사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8대 쇼군으로, 오닌의 난 발발의 원인 제공자 중 하나로 지목되지만 히가시야마 문화를 꽃피우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
1490년 사망 -
마차시 1세
마차시 1세는 1458년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하여 르네상스 문화를 진흥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과 군사 개혁을 통해 헝가리를 강대국으로 성장시켰으며, 오스만 제국에 맞서 헝가리의 독립을 지키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
1419년 출생 -
무림군
무림군은 조선 세조의 아들 정종과 숙의 기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정부인 홍씨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었으며, 세조의 순행을 호종하고 문폐사로 활동하며 지방 실정을 조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1419년 출생 -
고하나조노 천황
고하나조노 천황은 1428년에 즉위하여 30여 년간 재위하며 에이쿄의 난과 가키쓰의 난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고, 치벌윤지를 발급하여 조정의 권위를 높였으며, 1464년에 양위 후 출가했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광성부원군에 추증된 철산(鐵山)이며, 어머니는 대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의 딸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고려조의 관료였던 그의 가계는 증조부 김약채(金若采)가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관직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이후 그의 할아버지 김문은 요절하고 아버지 김철산은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1441년(세종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서로 출사하여 교도(敎導)를 역임했다. 교도로 재직 중 1453년(단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 23인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藝文館翰林)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세조를 지지하였고, 세조 즉위 후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통사랑 행 예문관 검열(通仕郞行藝文館檢閱)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하여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2.2. 군사 활동
1460년(세조 6) 북쪽 오랑캐 낭이승합(浪伊升哈)이 변방을 침략하자 도체찰사에 임명된 원수 신숙주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출정하였다. 이때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의 지도자 이만주(李滿住)의 일파를 크게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일약 5계급 특진하여 통훈대부에 승진되고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임명되었다. 그 후 다시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다.
1463년(세조 9) 승정원우승지, 1465년 호조참판을 거쳐 1466년 평안도절도사, 개성부윤을 지내고 다시 평안도절도사의 적임자가 없자 주변의 천거로 다시 평안도절도사로 나가 변방을 방비하였다. 1467년 예조판서 겸 의금부사가 되고 1468년에 문과의 상시관(上試官)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였다.
2.3. 관료 생활과 외교 활동
2.4. 생애 후반
1469년(예종 1년)에 예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고, 그해 겨울 성종이 즉위하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1471년(성종 2년)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순성명량좌리공신에 녹훈되고 광성군(光城君)에 책봉되었다. 1475년(성종 7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우참찬, 좌참찬, 세자 우빈객, 좌빈객을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공안(恭安)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홍귀달(洪貴達)이 지었는데, 그는 김겸광에 대해 "몸은 하나로되 쓰이는 것은 백가지요, 들어오면 재상이요 나가면 장수로다"라고 평가하였다.
3. 평가
4. 가족 관계
김겸광의 할아버지는 김문(金問)이며, 할머니는 양천 허씨 허응(許應)의 딸이다. 아버지는 김철산(金鐵山)이고, 어머니는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형제로는 형 김국광(金國光), 동생 김정광(金廷光), 김경광(金京光)이 있다.
첫번째 부인은 유양식(柳陽植)의 딸로, 슬하에 장녀를 두었으며 최세현(崔世賢)에게 출가하였다. 두번째 부인은 진계손(陳繼孫)의 딸로,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김극회(金克恢)이고 며느리는 박수종(朴壽宗)의 딸이며, 손자는 김석윤(金錫胤)이다. 차남은 김극치(金克恥)이고 며느리는 성맹온(成孟溫)의 딸이며, 손자는 김영윤(金寧胤)이다. 삼남은 김극핍(金克愊)이고 며느리는 이철동(李哲同)의 딸이며, 김명윤(金明胤), 김홍윤(金弘胤), 김의윤(金懿胤)을 손자로 두었다. 사남 김극개(金克愷)의 부인은 박수견(朴秀堅)의 딸이며, 손자는 김헌윤(金憲胤)이다. 오남은 김극제(金克悌)이다. 육남은 김극신(金克愼)이다. 차녀는 최지성(崔智成)에게, 삼녀는 이복정(李福禎)에게 출가하였다.
후첩 문화유씨에게서 칠남 김극신(金克愼)과 팔남 김극심(金克心)을 두었다. 김극심(金克心)은 김공윤, 김온윤을 손자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