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수 (권투 선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기수는 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로,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958년 아시안 게임 웰터급 금메달을 획득하고, 1961년 프로로 전향하여 동양태평양 미들급 챔피언, WBA·WBC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1969년 은퇴 후 사업가로 변신하여 성공했으나, 199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58년 아시안 게임 복싱 참가 선수 - 송순천
송순천은 대한민국의 복싱 선수이자 체육인으로,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복싱 밴텀급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하고, 은퇴 후 용인대학교 교수를 거쳐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한국 체육계 발전에 기여했다. - 북청군 출신 - 이지란
이지란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건주여진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왜구 토벌과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청해군에 봉해졌으며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 북청군 출신 - 전세권 (연출가)
전세권은 대한민국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이자 드라마 PD이며, 극단 신협 활동과 강단, 그리고 자유민주연합과 국민의당 당무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 1960년 하계 올림픽 복싱 참가 선수 -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는 미국의 전직 프로 권투 선수이자 사회 운동가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이며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세 번 등극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권투 선수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고, 징병 거부와 복귀를 통해 인종차별 저항과 평화주의를 상징하며 문화, 스포츠,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세계적인 아이콘이다. - 1960년 하계 올림픽 복싱 참가 선수 - 송순천
송순천은 대한민국의 복싱 선수이자 체육인으로,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복싱 밴텀급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하고, 은퇴 후 용인대학교 교수를 거쳐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한국 체육계 발전에 기여했다.
김기수 (권투 선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김기수 |
출생일 | 1939년 9월 17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북청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강도 북청군) |
사망일 | 1997년 6월 10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장 | 170cm |
체중 | 71kg |
스타일 | 사우스포 |
리치 | 69+1/2 in |
선수 경력 | |
체급 | 라이트미들급 미들급 |
프로 데뷔 | 1961년 10월 1일 |
총 경기 수 | 37 |
승리 | 33 |
KO승 | 17 |
패배 | 2 |
무승부 | 2 |
무효 경기 | 0 |
메달 기록 | |
아시안 게임 | 금메달 1958 도쿄 -51kg |
2. 생애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김기수는 1951년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전라남도 여수에 정착했다. 1954년 여수 여항중학교에서 육상 선수로 활약하다 복싱으로 전향했고, 이후 서울 성북고등학교 복싱부에 들어갔다. 1958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안 게임 웰터급 금메달,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준준결승에 진출했다. 1961년 프로로 전향, 1965년 동양태평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7] 1966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니노 벤베누티를 꺾고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으나, 1968년 산드로 마징기에게 타이틀을 잃었다. 1969년 은퇴 후 사업가로 변신, 명동에서 찻집과 빌딩을 운영하며 성공했다. 1996년 간암 판정 후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다 199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남 2녀가 있다.
2. 1. 어린 시절 및 아마추어 경력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951년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전라남도 여수에 정착했다. 1954년 여수 여항중학교에서 육상부 단거리 선수로 활약하다 복싱으로 전향했다. 이후 서울 성북고등학교 복싱부에 들어갔다. 1957년 아마추어 복싱에 데뷔했다. 1958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웰터급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결승에서 이란의 소렌 피르자니안을 판정승으로 꺾었다.[2]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웰터급 국가대표로 참가했으나, 준준결승에서 니노 벤베누티에게 판정패했다.[3]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을 졸업했다.[1]2. 2. 프로 경력
1961년 8월 프로로 전향하여 한국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했다.[7]1965년 1월 10일, 일본 도쿄에서 가이즈 후미오를 6회 KO로 꺾고 동양태평양(OPBF)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7] 이후 체급을 슈퍼웰터급으로 내렸다.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C, 세계복싱협회(WBA) 세계 슈퍼웰터급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를 2-1(72-69 68-72 74-68) 판정승으로 꺾고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4]
1967년 10월 3일, 프레디 리틀을 상대로 15회 판정승을 거두며 2차 방어에 성공했다.
1968년 5월 26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3차 방어전에서 산드로 마징기에게 15회 판정패하며 타이틀을 잃었다.[5]
1969년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2. 3. 은퇴 이후
김기수는 1969년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현역에서 은퇴했다.[7] 은퇴 후 복싱 코치로 활동했으며, 이후 사업가로 변신하여 명동에서 찻집 '챔피언'을 운영하고 '챔피언빌딩'을 소유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7] 1996년 9월 간암 판정을 받은 후에는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1997년 6월 10일 간암으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하자와 2남 2녀가 있다.[1]3. 에피소드
4. 프로 복싱 전적
번호 | 결과 | 전적 | 상대 | 타입 | 라운드 | 날짜 | 장소 | 비고 |
---|---|---|---|---|---|---|---|---|
37 | 승 | 33-2-2 | 미나미 히사오 | 판정 | 12 | 1969년 3월 1일 | 대한민국 서울 | |
36 | 패 | 32-2-2 | 미나미 히사오 | MD | 12 | 1968년 11월 20일 | 일본 오사카 | |
35 | 패 | 32-1-2 | 산드로 마칭기 | SD | 15 | 1968년 5월 26일 | 이탈리아 밀라노 산 시로 스타디움 | [5] |
34 | 승 | 32-0-2 | 후지쿠라 벤케이 | UD | 10 | 1968년 4월 4일 | 일본 도쿄 | |
33 | 승 | 31-0-2 | 아카사카 요시아키 | 판정 | 10 | 1968년 3월 11일 | 일본 도쿄 | |
32 | 승 | 30-0-2 | 만프레도 알리팔라 | 판정 | 12 | 1968년 2월 17일 | 대한민국 서울 | |
31 | 승 | 29-0-2 | 아피데지 시티란 | 판정 | 10 | 1967년 11월 8일 | 태국 방콕 | |
30 | 승 | 28-0-2 | 프레디 리틀 | SD | 15 | 1967년 10월 3일 | 대한민국 서울 동대문 야구장 | |
29 | 승 | 27-0-2 | 사사자키 나카오 | KO | 6 (12) | 1967년 9월 7일 | 일본 도쿄 | |
28 | 승 | 26-0-2 | 조지 카터 | KO | 5 (10) | 1967년 3월 25일 | 대한민국 서울 | |
27 | 승 | 25-0-2 | 스탠 해링턴 | UD | 15 | 1966년 12월 17일 | 대한민국 서울 장충체육관 | |
26 | 승 | 24-0-2 | 사토 켄 | KO | 4 (12) | 1966년 11월 5일 | 대한민국 서울 | |
25 | 승 | 23-0-2 | 니노 벤베누티 | SD | 15 | 1966년 6월 25일 | 대한민국 서울 장충체육관 | [4] |
24 | 승 | 22-0-2 | 다카다 히데아키 | KO | 10 (12) | 1966년 4월 30일 | 대한민국 서울 | |
23 | 승 | 21-0-2 | 벤 아르곤실로 | KO | 9 | 1966년 1월 23일 | 대한민국 서울 | |
22 | 승 | 20-0-2 | 시노자와 사쿠지 | KO | 7 (10) | 1965년 10월 30일 | 대한민국 서울 | |
21 | 승 | 19-0-2 | 곤도 마사오 | 판정 | 10 | 1965년 9월 20일 | 일본 도쿄 | |
20 | 승 | 18-0-2 | 가이즈 후미오 | 판정 | 12 | 1965년 6월 19일 | 대한민국 서울 | |
19 | 승 | 17-0-2 | 곤도 마사오 | 판정 | 10 | 1965년 4월 17일 | 대한민국 서울 | |
18 | 승 | 16-0-2 | 한정일 | KO | 4 | 1965년 3월 28일 | 대한민국 부산 | |
17 | 승 | 15-0-2 | 후지야마 가즈토 | KO | 4 | 1965년 3월 6일 | 대한민국 서울 | |
16 | 승 | 14-0-2 | 가이즈 후미오 | KO | 6 (12) | 1965년 1월 10일 | 일본 도쿄 | |
15 | 승 | 13-0-2 | 아카사카 요시아키 | RTD | 7 (10) | 1964년 11월 21일 | 대한민국 서울 | |
14 | 무승부 | 12-0-2 | 김득봉 | 판정 | 10 | 1964년 10월 10일 | 대한민국 서울 | |
13 | 승 | 12-0-1 | 강규순 | KO | 8 | 1964년 9월 20일 | 대한민국 서울 | |
12 | 승 | 11-0-1 | 로베르토 페냐 | 판정 | 10 | 1964년 3월 18일 | 대한민국 서울 메트로폴리탄 체육관 | |
11 | 승 | 10-0-1 | 조지 카터 | KO | 6 | 1964년 1월 22일 | 일본 도쿄 | |
10 | 승 | 9-0-1 | 사이토 노보루 | KO | 6 (10) | 1963년 12월 22일 | 일본 교토 야사카 홀 | |
9 | 승 | 8-0-1 | 강세철 | 판정 | 10 | 1963년 12월 14일 | 대한민국 서울 | |
8 | 승 | 7-0-1 | 강규순 | 판정 | 10 | 1963년 7월 2일 | 대한민국 여수 | |
7 | 승 | 6-0-1 | 강규순 | 판정 | 10 | 1963년 5월 24일 | 대한민국 부산 | |
6 | 승 | 5-0-1 | 로베르토 페냐 | KO | 6 | 1963년 5월 18일 | 대한민국 서울 | |
5 | 무승부 | 4-0-1 | 시노자와 사쿠지 | TD | 3 (10) | 1962년 7월 29일 | 일본 도쿄 | |
4 | 승 | 4-0 | 와타나베 마코토 | KO | 3 | 1962년 7월 1일 | 일본 도쿄 | |
3 | 승 | 3-0 | 이안산 | TKO | 6 (10) | 1961년 12월 20일 | 대한민국 서울 | |
2 | 승 | 2-0 | 강세철 | KO | 7 | 1961년 11월 1일 | 대한민국 서울 | |
1 | 승 | 1-0 | 강세철 | 판정 | 10 | 1961년 10월 1일 | 대한민국 서울 | |
참조
[1]
뉴스
국내 첫 프로권투 세계챔피언 金基洙씨 별세
http://news.naver.co[...]
1997-06-11
[2]
뉴스
拳鬪에大勝 鄭東薰金基洙選手堂堂優勝
http://newslibrary.n[...]
1958-06-02
[3]
웹사이트
Kim Gi-Su
https://web.archive.[...]
[4]
웹사이트
The Lineal Junior Middlleweight Champions
http://www.cyberboxi[...]
The Cyber Boxing Zone Encyclopedia
[5]
Boxrec
[6]
뉴스
김기수 선수 은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69-08-06
[7]
뉴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65-01-11
[8]
문서
사각 링에 펼쳐진 인생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