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김달수 (소설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달수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소설가이다. 1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으며, 니혼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다. 1940년 작품 「위치」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해방 후 『민주조선』에 소설 『후예의 거리』를 연재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리얼리즘 연구회 결성 및 민주주의 문학 운동에 참여했으며, 북한의 유일 지도 체제에 반발하여 조선총련과 결별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했으며,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면서도 남북 통일을 염원했다. 그는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시리즈를 통해 한일 관계 연구에도 기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재일 한국인 - 박춘금
    박춘금은 일제강점기 조선 출신으로 일본 중의원 의원을 지내며 친일 행위를 한 인물로, 재일 조선인 단체를 조직하고 조선인 참정권과 징병제 도입을 주장했으며, 광복 후 일본으로 도피하여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고문으로 활동했다.
  • 재일 한국인 - 문세광
    문세광은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 미수와 육영수 여사 살해를 저지른 범인으로, 조총련의 영향을 받아 좌익 사상에 심취하여 범행을 계획했으며 사형 집행되었다.
  • 일본의 소설가 - 이와야 사자나미
    이와야 사자나미는 메이지 시대에 아동 문학을 보급하고 일본 최초의 아동 문학 총서 간행, 전승 설화 리텔링, '옛날이야기 하이쿠 그림' 창조 등을 통해 일본 근대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동 문학가, 소설가, 시인, 수필가이자 문예 평론가이다.
  • 일본의 소설가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니혼 대학 동문 - 구상 (시인)
    구상(1919-2004)은 서울 출생으로 원산에서 성장하여 니혼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종군 기자, 언론 운동, 영남일보 편집장 등을 거쳐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시집 《초토의 시》 등을 발표했으며, 프랑스 문부성에서 세계 200대 시인으로 선정되었고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 니혼 대학 동문 - 미우라 켄타로
    미우라 켄타로는 1966년 일본에서 태어나 2021년 사망한 만화가로, 다크 판타지 만화 《베르세르크》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작은 모리 코우지의 감수 하에 연재가 이어지고 있다.
김달수 (소설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물 정보
출생 이름김달수
출생일1920년 1월 17일 (양력, 음력 1919년 11월 27일)
출생지조선 경상남도 창원군 내서면 호계리 (현재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구미통)
사망일1997년 5월 24일
사망 장소도쿄
안장 장소후지 영원 (시즈오카현 슨토군 오야마정 오미야케 888-2)
직업소설가, 고대사 연구자
모교일본대학 전문부 예술과
활동 기간1940년 - 1996년
장르소설, 고대사
소속 단체신일본문학회, 문학예술사, 2일회, 리얼리즘연구회, 현대문학연구회 등
대표 작품『후예의 거리』 (1948년)
『현해탄』 (1953년)
「박달의 재판」 (1958년)
『태백산맥』 (1959년)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전12권, 1970-91년)
수상평화문화상 (1957년), 청구문학상 (1974년)
데뷔 작품「위치」 (1940년)
자녀1명
영향시가 나오야, 김사량, 도스토옙스키, 고골, 사카구치 안고, 루쉰, 나카노 시게하루
참고 자료

2. 생애

김달수는 조선 경상남도 창원군 내서면 호계리(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서 태어났다.[3] 5살 때 아버지의 방탕으로 집안이 파산하고, 부모는 장남과 여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5][6] 김달수는 차남, 조모와 함께 살았으나, 차남은 병사하고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지면서 조모와 단둘이 극빈 생활을 했다.[7][8] 10살 때 형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2][9]

일본에서 보통소학교를 다녔으나 빈곤으로 퇴학하고,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며 시가 나오야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13] 니혼 대학 전문부 예술과 재학 중이던 1940년 첫 작품을 발표하고, 가나가와 니치니치 신문사 기자가 되었다.[14] 1942년 회사가 합병하여 가나가와 신문사가 되었고, 재직 중 일본인 여성과 연애했지만, 1943년 경성일보사에 강제로 입사하며 이별했다.[15] 1944년 가나가와 신문사로 복귀했다.[16]

해방 후 1946년민주조선』에 장편 소설 『후예의 거리』를 연재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17] 『문예수도』, 신일본문학회, 리얼리즘 연구회, 일본 민주주의 문학 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1958년 『조선 - 민족·역사·문화』가 총련에 비판받았으나, 1959년부터 재일 조선인 귀국 사업을 지원했다.[2] 1967년 북한의 유일 지도 체제와 개인 숭배 강요, 1970년대 김정일 후계 지명 움직임에 반발하여 북한, 조선총련과 결별했다.[2] 1972년 조선총련에서 제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75년 『계간 삼천리』를 창간하여 남북 통일을 추구했다.[2] 1981년 전두환 정권 하에서 한국을 방문하여 북한에 친화적인 재일 조선인 등에게 비판받았다.[2]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등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이 선고되자, 스키야바시 공원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24][26][27]

1982년 『행기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창작 활동을 끝내고,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시리즈를 중심으로 잡지 편집 활동을 했다.

2. 1. 유년기와 성장

조선 경상남도 창원군 내서면 호계리(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서 중농 지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3] 아버지는 김병규, 어머니는 손복남이며, 형제로는 장남 김성수, 차남 김량수, 여동생 김묘수가 있었다.[4]

아버지 김병규가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하면서,[5] 김달수가 5살 때 부모는 장남 김성수와 여동생 김묘수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6] 김량수와 김달수는 조모와 함께 살았지만, 1928년 무렵 김량수가 병으로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서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졌다.[7] 이후 김달수는 조모와 단둘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했다.[8]

10살 때, 김달수는 형 김성수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갔다.[2][9] 조모는 딸의 집으로 갔지만, 몇 년 안에 사망했다. 1931년, 오이 보통소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읽기, 쓰기, 셈하기 등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처음으로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10] 1932년 말, 도쿄부 에바라군 겐지마에 보통소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11] 5학년까지 다녔지만, 6학년으로 진급할 무렵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12] 이후 고학하며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시가 나오야의 소설을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다.[13]

2. 2. 문학 활동과 민족 운동

김달수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6년 4월부터 『민주조선』에 연재를 시작한 장편 소설 『후예의 거리』로 시작된다. 골격이 있는 문체로 쓰인 그 작품은 '조선적인 것', '민족적인 것'을 축으로 하여 일본인에게 통렬한 전쟁 책임을 묻는 것으로, 사상을 지지하는 일본인과 재일 조선인 양쪽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7] 이후 『현해탄』(『신일본문학』 1952년 1월~1953년 11월. 1954년 1월 간행) - 『태백산맥』(1969년)으로 전개되었다. 단, 김달수 자신은 『현해탄』 집필 중에 자신의 문학의 한계를 통감하고, 시가의 문학을 통해 배워온 자연주의 리얼리즘과의 문학적 투쟁을 시작했다.[18]

전전인 1941년부터 『문예수도』의 동인이 되었고, 전후에는 1946년 10월 신일본문학회 회원이 되었다.[19] 『문예수도』는 조선인 선배 작가로서 김사량이 활약한 잡지이기도 하며, 후배에는 김태생과 김석범이 있었다. 『신일본문학』에는 초기 대표작인 「현해탄」 연재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민주조선』과 함께 김달수가 발판을 둔 두 개의 거점이었다.

1957년, 시모다 마사지·니시노 다쓰요시·쿠보타 세이·오바라 겐과 함께 리얼리즘 연구회를 결성했다. 그 후에도 일본 민주주의 문학 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잡지 『민주문학』의 이름을 생각하는 등, 민주주의 문학 운동 중에서도 활약했다.

김달수는 원래 민족주의적 청년[20]으로, 조총련도 대중 단체로 출발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북' 공화국을 지지하는 입장이 되었다. '차별 없는 나라', '노동자가 주인공인 나라'를 겉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실태는 알지 못했지만 북한을 강하게 지지했다.[2]

1958년에 발행된 『조선 - 민족·역사·문화』가 조선총련에 비판받았지만, 1959년부터 본격화된 재일 조선인·그 일본인 아내 가족 등의 귀국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원고도 쓰고 있었고, 김달수의 친족에게도 귀국 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간 사람이 있었다.[2]

1960년대에 걸쳐 조금씩 '북' 지지 입장에서 멀어졌다. 북한은 1967년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체 회의에서 유일 지도 체제를 내세우고, 개인 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김일성 주석의 장남인 김정일 총서기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무렵부터 '북한의 방식은 이상하다'며 반발했고, 북한·조선총련과 결별했다.[2] 전언에 의하면 김달수는 1972년에 조선총련에서 제명되었다.

하지만 남북 통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1975년에 『계간 삼천리』를 이진희·강재언 등과 창간했다.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가 눈에 띄었지만, 조선총련은 관계자들에게 『삼천리』를 읽지 않도록 지도했다. 김달수가 주도한 잡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당시 애독했던 재일 조선인은 '김달수는 재일에 자부심을 되찾아 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총련에서 나간 인간이 활약하는 것은 재미없다는 분위기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달수 등은 『삼천리』에서, 총련 기관지가 했던 '반민족적 행동'이라는 비판에 반론했다.[2]

김달수 등은 도쿄도 조후시에 있는 오문자의 자택에서 『삼천리』 편집 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김달수는 종종 '지금의 북한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한편, '사회주의는 이런 사상이 아닐 텐데'라고도 말했다. 오문자에 따르면 당시에는 한국에 비해 북한의 실태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귀국한 재일 조선인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아직 미화된 것이 남아 있었다. 오문자는 '북한을 비판하는 일본인도 적었던 시대였고, 김달수 선생님도 북한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겠죠'라고 말했다.[2]

그 후, 전두환 정권 하의 1981년에, 재일 조선인 '정치·사상범'의 사면 및 감형을 탄원할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인해, 김석범과 김시종(2003년 한국 국적 취득) 등 북한에 친화적·한국에 비판적인 재일 조선인·좌익 일본인으로부터 총공격·비판을 받았다. 김달수는 제철소나 조선소 등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한 조국을 보고, '총련은 한국에서는 아이가 빈 깡통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 우라시마의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재일 조선인 등이 출판했던 『계간 삼천리』도, 한국의 실태를 알게 된 이후에는, 군사 독재 정권 비판의 논조에서, 한국에도 북한에도 속하지 않는 남북 통일을 바라는 제3세력과 같은 논조로 기울어졌다.[2]

1974년 4월, 박정희의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일으킨 대학생 등 180명이 구속되는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21][22]。 7월 16일까지 김지하 등 14명에게 사형, 15명에게 무기 징역,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와 하야카와 요시하루를 포함한 26명에게 징역 15년에서 20년의 형이 선고되었다[23][24]。 7월 21일에 김지하의 사형은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25], 김달수, 쓰루미 슌스케, 이진희, 바리 생이치로 등 4명은 '김지하 씨 등 전 피고를 석방하라'고 항의했고, 7월 27일부터 30일에 걸쳐 스키야바시 공원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24][26][27]

창작 활동은 1982년의 『행기의 시대』로 끝난 반면,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시리즈는 라이프 워크로서 만년까지 계속되었다. 『민주조선』, 『문학예술』, 『신조선』, 『계림』, 『리얼리즘』(후에 『현실과 문학』으로 개제), 『일본 속의 조선 문화』, 『현대와 문학』, 『계간 삼천리』, 『계간 청구』 등, '해방' 후에도 누계 200권 이상의 잡지를 편집했다.

2. 3. 역사 연구와 한일 관계

김달수는 민족주의적 청년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2] 조총련이 대중 단체로 출발했고, 북한이 "차별 없는 나라", "노동자가 주인공인 나라"를 표방했기 때문이다.[2] 그러나 김달수는 북한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2]

1958년 발행된 『조선 - 민족·역사·문화』가 조선총련에 비판받았지만, 1959년부터 본격화된 재일 조선인과 그 가족 등의 귀국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글을 썼다.[2] 김달수의 친족 중에도 귀국 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간 사람이 있었다.[2]

1960년대에 걸쳐 김달수는 점차 북한 지지 입장에서 멀어졌다. 북한은 1967년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체 회의에서 유일 지도 체제를 내세우고 개인 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김일성 주석의 장남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무렵부터 김달수는 "북한의 방식은 이상하다"며 반발했고, 북한·조선총련과 결별했다.[2] 1972년에 조선총련에서 제명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김달수는 남북 통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1975년에 이진희, 강재언 등과 『계간 삼천리』를 창간했다.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가 많았지만, 조선총련은 관계자들에게 『삼천리』를 읽지 않도록 지도했다. 김달수가 주도한 잡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당시 애독했던 재일 조선인은 "김달수는 재일에 자부심을 되찾아 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총련에서 나간 인간이 활약하는 것은 재미없다는 분위기였다"고 증언한다.[2]

김달수 등은 『삼천리』에서 조선총련 기관지가 했던 "반민족적 행동"이라는 비판에 반론했다.[2] 김달수는 종종 "지금의 북한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한편, "사회주의는 이런 사상이 아닐 텐데"라고도 말했다.[2]

전두환 정권 하의 1981년, 김달수는 재일 조선인 "정치·사상범"의 사면 및 감형을 탄원할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로 인해 김석범과 김시종 등 북한에 친화적이고 한국에 비판적인 재일 조선인 및 좌익 일본인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김달수는 제철소나 조선소 등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한 조국을 보고, "총련은 한국에서는 아이가 빈 깡통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 우라시마의 기분이다"라고 말했다.[2] 재일 조선인 등이 출판했던 『계간 삼천리』도, 한국의 실태를 알게 된 이후에는 군사 독재 정권 비판에서 한국과 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남북 통일을 바라는 제3세력과 같은 논조로 기울어졌다.[2]

조선총련계 금융 기관에 근무했던 김달수의 장남은 조선총련에 비판받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승진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아버지와 점차 소원해졌다. 장남은 몸이 상했고, 김달수 사후에 사망했다.[2] 2021년 11월, 오문자는 "지금 김달수 선생님이 살아계시다면, 전면에 나서서 북한을 비판하고, 인권과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

2. 4. 민주화 운동과 말년

김달수는 민족주의적 청년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2] 그는 "차별 없는 나라", "노동자가 주인공인 나라"를 표방하는 북한의 모습에 강하게 끌렸지만, 실상은 알지 못했다.[2]

1958년 발행된 『조선 - 민족·역사·문화』가 총련에 비판받았지만, 1959년부터 본격화된 재일 조선인과 그 일본인 아내 가족 등의 귀국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김달수의 친족 중에도 귀국 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사람이 있었다.[2]

1960년대에 걸쳐 김달수는 점차 북한 지지 입장에서 멀어졌다. 1967년 북한이 유일 지도 체제를 내세우고 개인 숭배를 강요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70년대에 들어 김일성 주석의 장남인 김정일 총서기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김달수는 "북한의 방식은 이상하다"며 반발했고, 북한 및 조선총련과 결별했다.[2] 전언에 따르면 김달수는 1972년에 조선총련에서 제명되었다.

하지만 김달수는 남북 통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1975년에 이진희, 강재언 등과 함께 『계간 삼천리』를 창간했다. 『삼천리』는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가 많았지만, 조선총련은 관계자들에게 『삼천리』를 읽지 않도록 지도했다. 김달수가 주도한 잡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당시 애독했던 재일 조선인은 "김달수는 재일에 자부심을 되찾아 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총련에서 나간 인간이 활약하는 것은 재미없다는 분위기였다"고 증언했다.[2]

김달수 등은 『삼천리』에서, 총련 기관지가 했던 "반민족적 행동"이라는 비판에 반론했다.[2] 김달수는 오문자의 자택에서 『삼천리』 편집 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종종 "지금의 북한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한편, "사회주의는 이런 사상이 아닐 텐데"라고도 말했다. 오문자에 따르면 당시에는 한국에 비해 북한의 실태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귀국한 재일 조선인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아직 미화된 것이 남아 있었다. 오문자는 "북한을 비판하는 일본인도 적었던 시대였고, 김달수 선생님도 북한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겠죠"라고 말했다.[2]

그 후, 전두환 정권 하의 1981년에, 재일 조선인 "정치·사상범"의 사면 및 감형을 탄원할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인해, 김석범과 김시종 등 북한에 친화적이고 한국에 비판적인 재일 조선인 및 좌익 일본인으로부터 총공격과 비판을 받았다. 김달수는 제철소나 조선소 등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한 조국을 보고, "총련은 한국에서는 아이가 빈 깡통을 들고 구걸을 하고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 우라시마의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재일 조선인 등이 출판했던 『계간 삼천리』도, 한국의 실태를 알게 된 이후에는, 군사 독재 정권 비판의 논조에서, 한국에도 북한에도 속하지 않는 남북 통일을 바라는 제3세력과 같은 논조로 기울어졌다.[2]

조선총련계 금융 기관에 근무했던 김달수의 장남은 조선총련에 비판받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승진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아버지와 점차 소원해졌다. 장남은 몸이 상했고, 김달수 사후에 사망했다.[2] 2021년 11월에 오문자는 "지금 김달수 선생님이 살아계시다면, 전면에 나서서 북한을 비판하고, 인권과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입장이 나빠지더라도, 나쁜 것은 나쁘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다.[2]

1974년 4월, 박정희의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일으킨 대학생 등 180명이 구속되는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21][22] 7월 16일까지 김지하 등 14명에게 사형, 15명에게 무기 징역,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와 하야카와 요시하루를 포함한 26명에게 징역 15년에서 20년의 형이 선고되었다.[23][24] 7월 21일에 김지하의 사형은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25], 김달수, 쓰루미 슌스케, 이진희, 바리 생이치로 등 4명은 "김지하 씨 등 전 피고를 석방하라"고 항의했고, 7월 27일부터 30일에 걸쳐 스키야바시 공원에서 단식 투쟁을 했다.[24][26][27]

창작 활동은 1982년의 『행기의 시대』로 끝났지만,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시리즈는 라이프 워크로서 만년까지 계속되었다. 『민주조선』, 『문학예술』, 『신조선』, 『계림』, 『리얼리즘』 (후에 『현실과 문학』으로 개제), 『일본 속의 조선 문화』, 『현대와 문학』, 『계간 삼천리』, 『계간 청구』 등, 해방 후에도 누계 200권 이상의 잡지를 편집했다.

3. 사상과 관점

김달수는 민족주의적 청년으로, 북한 건국 후에는 '차별 없는 나라', '노동자가 주인공인 나라'라는 표면에 이끌려 북한을 강하게 지지했다.[2] 1958년 『조선 - 민족·역사·문화』가 총련에 비판받았지만, 1959년부터 본격화된 재일 조선인과 그 일본인 아내 가족 등의 귀국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2]

하지만 1960년대에 걸쳐 북한의 유일 지도 체제와 개인 숭배 강요, 김정일 후계 지명 등의 움직임에 반발하며 점차 북한 지지 입장에서 멀어졌다.[2] 1972년에는 조선총련에서 제명되었다고 전해진다.[2] 이후 이진희, 강재언 등과 『계간 삼천리』를 창간하여 남북 통일의 꿈을 이어갔지만,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조선총련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2]

1981년 전두환 정권 하에서 한국을 방문하여 발전상을 목격한 후에는, 한국과 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남북 통일을 바라는 제3세력과 같은 논조로 기울어졌다.[2] 한편, 1974년 한국에서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 당시, 김지하 등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쓰루미 슌스케, 이진희 등과 함께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24][26][27]

4. 주요 작품

김달수는 시바 료타로, 우에다 마사아키와 함께 『일본의 조선 문화 좌담회』(주오코론샤, 1972년), 『고대 일본과 조선 좌담회』(주오코론샤, 1974년), 『일본의 도래 문화 좌담회』(주오코론샤, 1975년)를 출간했다. 타니가와 켄이치와는 『일본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토론』(치쿠마쇼보, 1975년, 후에 『고대 일본 문화의 원류』로 개제되어 카와이데 문고)을 출간했다.

1977년 6월에는 『일본과 조선 김달수 대담집』(코단샤)이 출간되었고, 강재언의 『수기=재일 조선인』(류케이샤, 1981년 6월)에도 참여했다. 시바 료타로, 친순신과는 『역사의 교차로에서 일본·중국·조선』(코단샤, 1984년 4월)을 출간했다.

1987년 2월에는 『회상 카라키 쿠니오』(심미사)를 출간했으며, 타니가와 켄이치와는 『지명의 고대사 킨키 편』(카와이데 서방 신사, 1991년 6월)과 『지명의 고대사 큐슈 편』(카와이데 서방 신사, 1988년 8월)을 출간했다.

4. 1. 소설

제목출판사출판일비고
《후예의 거리》조선문예사1948년 3월 1일
《반란군》동아서방1950년
《후지산이 보이는 마을에서》동방사1952년
《현해탄》치쿠마쇼보1954년이후 아오키 문고, 고단샤 문고
《전야의 장》도쿄서림1955년
《고국의 사람》지쿠마쇼보1956년
《일본의 겨울》지쿠마쇼보1957년
《번지 없는 부락》광서방1959년
《박달의 재판》지쿠마쇼보1959년
《밤에 온 남자》동방사1961년
《밀항자》지쿠마쇼보1963년
《나카센도》동방사1963년
《공복이문》동방사1965년
《태백산맥》지쿠마쇼보1969년
《소설 재일조선인사》창수사1975년단편집, 전 2권
《낙조》지쿠마쇼보1979년 4월
《쓰시마까지》가와데 쇼보 신샤1979년 10월
《김달수 소설 전집》지쿠마쇼보1980년전 7권
《행기의 시대》아사히 신문사1982년 3월


4. 2. 역사 연구 및 평론

김달수는 역사 연구와 평론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55년 『나의 창작과 체험』(아시 출판사)을 시작으로, 1958년에는 이와나미 신서에서 『조선 - 민족·역사·문화 -』를 출간했다.

1970년부터 1991년까지는 고단샤에서 『일본 속의 조선 문화 그 고대 유적을 찾아서』를 전 12권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이후 고단샤 문고(전 12권)와 고단샤 학술 문고(3권까지 간행)로도 출간되었다. 1972년에는 신인물왕래사에서 『고대 문화와 "귀화인"』을, 산케이 신문 출판국에서 『고대 유적의 여행 아스카 로망을 산책하다』를 출간했다. 후자는 『아스카 로망의 여행』으로 제목이 변경되어 가와데 문고에서 출간되었다.

1976년에는 지쿠마 서방에서 『일본 고대사와 조선 문화』를 출간했으며, 이 책은 『일본 고대사와 조선』으로 제목이 변경되어 고단샤 학술 문고로 출간되었다. 같은 해, 『김달수 평론집』(지쿠마 서방)이 상권 "나의 문학", 하권 "나의 민족"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다.

1979년 1월에는 학생사에서 『일본 속의 고대 조선』을 출간했으며, 이 책은 『고대 조선과 일본 문화』로 제목이 변경되어 고단샤 학술 문고로 출간되었다. 1980년 2월에는 『고대 일조 관계사 입문』(지쿠마 서방)을 출간했다.

1982년에는 『고국까지』(가와데 서방 신사)와 『나의 소년 시대 차별 속에 살다』(포플러사)를 출간했다. 1984년 9월에는 『고대의 일본과 조선 문화』(지쿠마 서방), 1985년 9월에는 『고대의 일본과 조선』(지쿠마 서방)을 출간했다.

1990년 12월에는 『도래인과 도래 문화』(가와데 서방 신사), 1994년 6월에는 『다시 보이는 고대의 일본과 조선』(야마토 서방)을 출간했다.

또한, 시바 료타로, 우에다 마사아키와 함께 『일본의 조선 문화 좌담회』(주오코론샤, 1972년), 『고대 일본과 조선 좌담회』(주오코론샤, 1974년), 『일본의 도래 문화 좌담회』(주오코론샤, 1975년)를 출간했다. 타니가와 켄이치와는 『일본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토론』(치쿠마쇼보, 1975년, 후에 『고대 일본 문화의 원류』로 개제되어 카와이데 문고)을 출간했다.

1977년 6월에는 『일본과 조선 김달수 대담집』(코단샤)이 출간되었다. 강재언의 『수기=재일 조선인』(류케이샤, 1981년 6월)에도 참여했다. 시바 료타로, 친순신과는 『역사의 교차로에서 일본·중국·조선』(코단샤, 1984년 4월)을 출간했다.

1987년 2월에는 『회상 카라키 쿠니오』(심미사)를 출간했다. 타니가와 켄이치와는 『지명의 고대사 킨키 편』(카와이데 서방 신사, 1991년 6월)과 『지명의 고대사 큐슈 편』(카와이데 서방 신사, 1988년 8월)을 출간했다.

5. 평가 및 영향

김달수는 재일 한국인 작가로서, 해방 후 한국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은 "조선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을 중심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묻는 내용으로,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 양쪽 모두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17] 특히, 초기 대표작인 『현해탄』은 그의 문학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달수는 신일본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신일본문학』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19] 또한, 리얼리즘 연구회를 결성하고 일본 민주주의 문학 동맹 결성에 참여하는 등 민주주의 문학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초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2]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유일 지도 체제와 개인 숭배에 반발하며 북한 및 조선총련과 결별했다.[2] 이후 남북 통일을 위한 활동에 힘썼으며, 이진희, 강재언 등과 함께 『계간 삼천리』를 창간하여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등 활동을 했다.[2]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항의의 표시로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24][26][27]

만년까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시리즈를 라이프 워크로 삼아 활동을 이어갔으며, 해방 이후 200권 이상의 잡지를 편집하며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과 민족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2]

6. 김달수 문고

가나가와 현립 근대문학관에서는 2003년에 김달수의 저작권 상속자로부터 원고, 서간 등 1만 점 이상을 기증받아 '김달수 문고'로 보존하고 있다.[28] 2020년 12월 12일부터 특별 전시·수장 컬렉션전 19 '탄생 100년 김달수전'이 개최되었다.[28][29]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유행에 따른 긴급사태 선언으로 인해 동관이 임시 휴관에 들어가면서 전시회 회기가 중단되었고, 5월 22일부터 재개되었다.[30][31]

참조

[1] 웹사이트 Invisible Men: Resident Korean Writers in Postwar Japan, 1945-1972 https://web.stanford[...] 2001-06
[2] 웹사이트 司馬遼太郎と親交結んだ在日朝鮮人作家 北朝鮮を支持、そして裏切られた(GLOBE+) https://news.yahoo.c[...] 2021-11-24
[3]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中公新書 1977
[4]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5]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6]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7]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8]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9]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10]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11]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12]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13]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14]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15]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16] 서적 わがアリランの歌
[17] 논문 "日本的思考を拡大/朝鮮民族の実質を感動的に表現" 日本読書新聞 1954-02
[18] 간행물 視点について──どうかくかの問題・ノオト リアリズム 1958-10
[19] 서적 わが文学と生活 1998-12
[20] 서적 わが文学と生活
[21] 웹사이트 故・金芝河さん(韓国の詩人) 独裁と闘った「抵抗詩人」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2-07-29
[22] 웹사이트 白基玩・張俊河…民青学連裁判記録、45年ぶり公開 https://japan.hani.c[...] ハンギョレ新聞 2018-12-10
[23] 뉴스 韓国軍法会議の判決に 抗議行動広がる 東京ではハンスト 国際連帯も 朝日新聞 1974-07-17
[24] 서적 苦行 獄中におけるわが闘い 中央公論社 1978-09-30
[25] 간행물 韓国日誌 コリア評論社 1974-10
[26] 서적 回想の文学 1 平凡社 1977-05-25
[27] Youtube 「民族詩人金芝河(キムジハ)の夕べ」における金達寿の所感(音声) https://www.youtube.[...] 神奈川近代文学館 2021-01-21
[28] 웹사이트 作家・金達寿を知って 生誕100年展、HPで冊子紹介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2021-05-29
[29] 웹사이트 スポット展示・収蔵コレクション展19「生誕100年 金達寿展」 https://www.kanabun.[...] 神奈川近代文学館 2021-05-29
[30] 웹사이트 金達寿展が再開 異郷で書く意味を問う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21-05-29
[31] 웹사이트 スポット展示・収蔵コレクション展19「生誕100年 金達寿展」 https://www.kanabun.[...] 神奈川近代文学館 2021-05-2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