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식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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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병식은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 출신으로, 일본 구제 제2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서 활동하며 조직부장, 사무국장, 부의장을 거쳐 제1부의장을 역임했다. 1971년에는 북한 공작 활동을 위한 무역 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을 창설했으며, 김대중에게 20만 달러를 헌금하기도 했다.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 조선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며,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및 당 의장을 역임했고, 1993년에는 국가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99년 사망했으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민족통일상을 추서받았다.

김병식 (191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병식
한글김병식
한자金炳植
로마자 표기Gim Byeongsik
문화어 표기김 병식
인물 정보
출생일1919년 2월 10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신안군
사망일1999년 7월 21일 (향년 80세)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종교알 수 없음
배우자알 수 없음
친척 (정치인)한덕수 (의붓 형)
학력
학교구제 제2고등학교
정당 정보
소속 정당조선사회민주당
직위
직위국가 부주석
임기 시작1993년 12월 11일
임기 종료1998년 9월 5일
이전김영주
이후직위 폐지
국가 원수김일성 / 김정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임기 시작 11967년 11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임기 종료 1197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임기 시작 21998년 7월 26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임기 종료 21999년 7월 21일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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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병식은 일제강점기 전라남도에서 태어나, 재일조선인 유학생 연합회와 조선중앙통신에서 일했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결성 후 이 조직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 최용건의 지도 하에 친공산주의 노선을 따르며 조선로동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조선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당 의장을 역임하고 의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당 중앙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의 부주석을 지냈다.

또한 북한의 단원제 의회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1. 초기 생애 및 조총련 활동

1919년 다이쇼 8년,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구제 제2고등학교(현재의 도호쿠 대학)를 졸업했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결성 후, 재일조선인 유학생 연합회와 조선중앙통신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총련 내에서 조직부장, 사무국장, 부의장을 거쳐 제1부의장 등의 요직을 맡았다. 1959년 (쇼와 33년)에 조총련 조직부장에 취임하였다.

1971년, 북한의 공작 활동 거점이자 귀금속을 취급하는 무역 회사인 유니버스 트레이딩(도쿄도 시나가와구 고탄다)을 창설하여, 북한에 대한 자금 수금·송금 및 일본에 대한 공작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2.2. 북한으로의 귀환과 정치 활동

1959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조직부장에 취임한 후, 사무국장, 부의장을 거쳐 제1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67년 11월에는 한덕수 등 조총련 간부와 함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병식은 한덕수의 조카사위였으며,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대항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1971년, 북한의 공작 활동 거점이자 귀금속을 취급하는 무역 회사인 "유니버스 트레이딩"(도쿄도시나가와구고탄다)을 창설하여, 북한에 대한 자금 수금·송금 및 일본에 대한 공작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1973년에 "와타나베 히데코 2남매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 이와 관련해, 매스 미디어는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회사 관계자가 30명이나 되는 일본인·재일 조선인의 납치를 증언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조선총련 제1부의장 시절에는 일본·대한민국의 정치인·군인과의 인맥 형성에 힘썼으며,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에게 200000USD를 헌금했다. 또한, 유니버스 트레이딩 등 여러 "기업"을 경영하며,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선총련에서의 지위를 확립해 갔다. 그는 한덕수와 대립하게 되어 조직 숙청 운동을 벌였다. 저항하는 지방 조직에 "올그단"을 파견하여 위협 행위와 폭력 사건을 벌였고, 반대 세력이나 비판적인 인물에게는 "부엉이 부대"라고 칭하는 사병 집단을 보내 습격하게 했다. 당시 조선총련에서는 탈퇴자가 잇따랐다고 한다.

1972년 10월,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남북 적십자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으로 건너갔지만, 체류지인 평양에서 "반당반혁명 종파 분자"로 구속되어 실각한다. 김일성을 후원한 한덕수와 달리, 김병식은 김정일에게 접근함으로써 세력을 확대해 한덕수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김일성이 사태 수습을 도모하여 1972년의 "실각"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실각 후 김병식은 "은둔 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지지만, 대일 공작 기관 "일본 문제 연구소" 소장을 맡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총련 시대의 경제 활동으로 얻은 막대한 자산을 조선로동당에 헌금함으로써 강제 수용소행을 면하고, 김정일의 권력 확립에 따라 복권된 것으로 보인다.

1993년 7월 20일, 위성 정당·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취임했다. 12월 11일에는 김영주와 함께 국가 부주석에 임명되어 복권을 이뤘다.

1998년 7월 26일, 다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8월 28일에 개최된 사민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위원장직을 김영대에게 양보하고 중앙위원회 고문에 취임했다. 9월 5일에는 국가 주석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부주석에서 퇴임했다.

1999년 7월 21일 사망했으며, 1999년 7월 23일 국장이 거행되었다.

2.3. 사망

김병식은 1999년 7월 21일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성남을 포함한 18명의 장례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사후 1999년 8월 5일에는 민족통일상이 추서되었다.

3. 논란 및 비판

김병식은 조선총련 제1부의장 시절,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200를 헌금하는 등 대한민국 정치권과 인맥을 형성하려 했다. 또한 유니버스 트레이딩 등 여러 기업을 경영하며 얻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선총련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립해 나갔다.

그러나 한덕수와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올그단", "부엉이 부대"와 같은 사병 집단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숙청하고, 1973년에는 자신의 회사가 와타나베 히데코 2남매 납치 사건을 일으키는 등 여러 논란을 야기했다. 결국 1972년 "반당반혁명 종파 분자"로 몰려 실각했다.

3.1. 대남 및 해외 공작 활동

1971년, 김병식은 북한의 공작 활동 거점이자 귀금속을 취급하는 무역 회사인 "유니버스 트레이딩"(도쿄도시나가와구고탄다)을 창설하여, 북한에 대한 자금 수금·송금 및 일본에 대한 공작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회사는 1973년에 "와타나베 히데코 2남매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 매스 미디어는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회사 관계자가 30명이나 되는 일본인·재일 조선인의 납치를 증언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조선총련 제1부의장 시절, 김병식은 일본·대한민국의 정치인·군인과의 인맥 형성에 힘썼으며,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에게 200000USD를 헌금했다. 또한, 유니버스 트레이딩 등 여러 "기업"을 경영하며,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선총련에서의 지위를 확립해 갔다.

실각 후, 김병식은 "은둔 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일 공작 기관 "일본 문제 연구소" 소장을 맡았다고도 한다.

3.2. 조선총련 내 권력 투쟁

1959년 조선총련 조직부장, 사무국장, 부의장을 거쳐 제1부의장에 임명되었다.

1967년 11월, 한덕수 등 조선총련 간부와 함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병식은 한덕수의 조카사위로,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대항 세력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다.

1971년 북한 공작 활동 거점이자 귀금속을 취급하는 무역 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을 창설, 북한 자금 수금·송금 및 일본 공작 활동을 담당했다. 1973년 와타나베 히데코 2남매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총련 제1부의장 시절 일본·대한민국 정치인·군인과 인맥 형성에 힘썼으며,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에게 200를 헌금했다. 유니버스 트레이딩 등 여러 "기업"을 경영하며, 풍부한 자금력으로 조선총련 내 지위를 확립했다.

이후 한덕수와 대립, 조직 숙청 운동을 벌였다. 저항하는 지방 조직에 "올그단"을 파견해 위협과 폭력을 행사하고, 반대 세력이나 비판적인 인물에게는 "부엉이 부대"라는 사병 집단을 보내 습격하게 했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총련 탈퇴자가 잇따랐다.

1972년 10월, 남북 적십자 회담 대표단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나, 평양 체류 중 "반당반혁명 종파 분자"로 구속되어 실각한다. 한덕수가 김일성을 후원한 반면, 김병식은 김정일에게 접근해 세력을 확대, 점차 한덕수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자 김일성이 사태 수습을 위해 1972년 "실각"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3.3. 김대중과의 관계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에게 200000USD를 헌금했다.

4. 저서

Modern Korea: The Socialist North, Revolutionary Perspectives in the South, and Unification영어 (1970년, 뉴욕, International Publis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