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현 (1871년)
1. 개요
김보현은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의 농부로, 김일성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이보익과 결혼하여 김형직(김일성의 아버지) 등 3남 3녀를 두었다. 광복 후에는 대동군 태수 직을 잠시 지냈으나, 이는 김일성이 만들어준 직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만경대에서 농부로 살다가 1955년에 사망했으며, 김보현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북한에서는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김일성 가계의 우상화에 이용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이름 | 김보현 |
|---|---|
| 한자 | 金輔鉉 |
| 로마자 표기 | Kim Bo Hyon |
| 조선글 표기 | 김보현 |
| 가나 표기 | キム・ボヒョン |
| 출생일 | 1871년 8월 19일 |
| 출생지 | 평안남도 대동군 |
| 사망일 | 1955년 9월 2일 |
| 정당 | 무소속 |
| 부 | 김응우 |
|---|---|
| 모 | 리씨 부인 |
| 배우자 | 이보익 |
| 자녀 | 김형직 (장남) 김형권 (차남) 김형록 (삼남) |
| 손자 | 김일성 (장손) 김철주 (차손) 김영주 (삼손) 김창주 (사손, 삼남 김형록의 아들) |
| 증손 | 김정일 김만일 김경희 김경진 김평일 |
| 직책 | 농림성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 |
|---|
| 참고 | 김두봉 |
|---|---|
| 총리 | 김일성 |
| 장관 | 박문규 북조선 농림상 |
| 차관 | 한전종 북조선 농림성 부상 |
| 임기 | 1948년 9월 16일 ~ 1949년 10월 1일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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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군 출신 -
김영주 (1920년)
김영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김일성의 동생이자 김정일의 삼촌이며, 한때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김정일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고,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북측 대표, 국가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
대동군 출신 -
선우종원
선우종원은 일제강점기 평양고보와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검사, 국무총리 비서실장, 한국조폐공사 사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국회사무총장, 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행정가이다. -
농업인 -
새뮤얼 버틀러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는 유토피아 소설 『이어원』으로 유명하고 진화론 비판 및 독특한 신학 사상을 제시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소설가이자 작가, 철학자, 음악가이다. -
농업인 -
정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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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생애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에서 산당지기 김응우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응우가 일찍 사망하여 소작살이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이보익과 결혼하여 김형직(김일성의 아버지), 김형록, 김형권,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등 3남 3녀를 두었다. 일찍 부모를 잃은 손자 김일성을 양육하였다고 전해진다. 평양 부근의 지주 이평택(李平沢) 집의 묘지기 겸 소작인으로 일했다.
1945년 광복 후 평안남도 대동군 태수 직을 잠시 지냈으나, 이는 손자 김일성이 만들어 준 자리였다.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농업성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을 잠시 지내다 1949년 은퇴했다. 그의 행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우상화를 위해 미화되고 있다.
말년에 손자가 한국 전쟁을 일으키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피난을 가는 등 고생을 했다. 1955년 84세로 사망했고, 만경대 묘지에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과 동갑이다.
2.1. 초기 생애
평안남도 대동군 만경대에서 산당지기 김응우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응우가 일찍 사망하여 소작살이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이보익과 결혼하여 김형직(김일성의 아버지), 김형록, 김형권,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등 3남 3녀를 두었다. 일찍 부모를 잃은 손자 김일성을 양육하였다고 전해진다. 평양 부근의 지주 이평택(李平沢) 집의 묘지기 겸 소작인으로 일했다.
2.2. 김일성과의 관계
이보익과 결혼하여 김일성의 아버지인 장남 김형직 등 3남 3녀를 낳았다. 일찍 부모를 잃은 손자 김일성을 양육하였다고 전해진다.
1945년 조선 광복 후 1945년 9월 16일부터 1946년 5월 31일까지 평안남도 대동군 태수(平安南道 大同郡 太守) 직을 지냈을 뿐인 그의 행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우상화를 위하여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어 우상화 되고 있다. 대동군 태수 직책조차도 김보현 본인의 능력과는 상관 없이 손자가 할아버지한테 만들어다 바친 관직일 뿐이었다.
광복 이후, 손자 김성주가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조선에 개선했을 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칭설, 중국인설 등의 소문이 돌자 당황한 소련 측은 1945년 10월 15일에 김일성을 만경대에 살던 그의 집으로 방문하게 하여 항일 투쟁 경력에 대한 말을 맞추는 공작을 벌였다. 보현은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속임수를 견디지 못하고, 후일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개선 축하회에는 불참하였다.
손자 김성주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고 친족들이 관료로 등용되는 가운데, 정부 요직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고 만경대에서 종전과 같이 농부로 살았다. 소박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말년에 손자가 한국 전쟁을 일으켰는데 인천상륙작전의 여파로 인하여 피난을 가는 등 손자 때문에 고생을 했다.
2.3. 북한 정권 수립 이후
1945년 조선 광복 후 1945년 9월 16일부터 1946년 5월 31일까지 평안남도 대동군 태수(平安南道 大同郡 太守) 직을 지냈는데, 이는 김보현 본인의 능력과는 관계 없이 손자가 만들어 바친 관직이었다. 1948년 9월 16일부터 1949년 10월 1일까지 1년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농업성 예하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農業省 高級特別顧問役補佐官) 직을 지낸 후, 1949년 10월 1일을 기하여 은퇴하였다. 그의 행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우상화를 위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 미화되고 있다.
손자 김성주(김일성)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고 친족들이 관료로 등용되는 가운데, 김보현은 정부 요직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고 만경대에서 농부로 살았다. 그는 소박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94년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한 농업 간부 재교육 기관인 김보현대학이 있다.
말년에 손자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인천상륙작전의 여파로 피난을 가는 등 손자 때문에 고생을 했다.
2.4. 사후
1948년 9월 16일부터 1949년 10월 1일까지 1년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농업성 예하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 직을 지냈으며, 1949년 10월 1일에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1955년에 84세로 사망하였으며, 만경대 묘지에 그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말년에 손자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인천상륙작전의 여파로 피난을 가는 등 손자 때문에 고생을 하였다.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과 동갑내기이다.
3. 비판 및 논란
소작농한국어으로 태어나 여러 고난 속에서 살면서 자녀와 손주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치고 그 활동을 열렬히 지원한 인물이라고 평가되고 있지만, 이는 북한 당국의 선전 내용이며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3.1. 김일성 가계 우상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 가계 우상화를 위하여 김보현의 행적에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어 우상화하고 있다. 1945년 9월 16일부터 1946년 5월 31일까지 평안남도 대동군 태수(平安南道 大同郡 太守) 직을 지냈을 뿐이지만, 이 직책조차도 김보현 본인의 능력과는 상관 없이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만들어다 바친 관직이었다. 농업 간부 재교육을 위한 김보현대학은 1994년 그의 이름을 따서 개칭한 명칭이다. 1948년 9월 16일부터 1949년 10월 1일까지 1년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농업성 예하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農業省 高級特別顧問役補佐官) 직을 지낸 그는 1949년 10월 1일을 기하여 관직에서 은퇴 후 1955년에 향년 84세로 사망하였다. 만경대의 묘지에는 그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말년에 손자가 한국 전쟁을 일으켰는데 인천상륙작전의 여파로 인하여 피난을 가는 등 손자 때문에 고생을 했다.
소작농으로 태어나 여러 고난 속에서 살면서 자녀와 손주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치고 그 활동을 열렬히 지원한 인물이라고 평가되고 있지만, 이는 북한 당국의 선전 내용이며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3.2. 전주 김씨 본관 논란
김일성이 자신의 본관을 전주 김씨로 칭하는 것은 자칭이며, 빈민 계급 출신에 문맹이었던 그의 조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진상은 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