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국
1. 개요
김사국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1907년에 태어나 유점사에서 한학을 배우고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3·1 운동 이전에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다 귀국하여,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했으나 투옥되었다. 출옥 후 서울청년회, 조선청년총동맹, 사회주의자동맹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1926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 이름 | 김사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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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 김사국 |
| 한자 | 金思國 |
| 이름 | 김사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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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지 | 조선 |
|---|---|
| 사망일 | 1926년 5월 8일 |
| 성별 | 남성 |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 직업 | 미상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 활동 이념 | 사회주의 |
| 경력 | 고려공산동맹 책임비서,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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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 동문 -
김상용 (시인)
김상용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망향의 정서와 시대적 고뇌를 표현한 시집 『망향』과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소설집 『무궁화』를 발표한 시인이다. -
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 동문 -
현상윤
현상윤은 일제강점기 교육자, 사상가, 작가로서 3·1 운동에 참여하고 광복 후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된 인물이다. -
1892년 출생 -
제임스 M. 케인
제임스 M. 케인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저널리스트로, 《우편배달부는 두 번 벨을 울린다》, 《이중 배상》 등의 필름 누아르 스타일 소설로 명성을 얻었으며 미국 작가 연맹 설립 운동에도 참여했다. -
1892년 출생 -
줄리아 페이
줄리아 페이는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시대에 활동한 미국의 배우로, 특히 세실 B. 드밀 감독의 영화에 다수 출연하여 《십계》에서 네페르타리와 엘리셰바 역을 맡았으며, 영화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다. -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자 -
여운홍
여운홍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 과도입법의원과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친일 행적 의혹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정치인이다. -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자 -
최서해
최서해는 일제강점기 신경향파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빈민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농민의 고난과 저항을 그린 작품 활동과 사회 비판적 언론 활동을 펼치며 한국 문학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2. 생애
김사국은 1907년 아버지를 여읜 후, 금강산 유점사(楡占寺)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다가 1919년 3·1 운동 전에 귀국하였다.
1919년 3월 17일 경성 내자동 한성오의 집에서 홍진, 이규갑, 한남수 등과 3.1운동이 성공하려면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고,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정부를 구성하기 전에 민중대회를 통해 회의 내용을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받아들여졌다. 1919년 4월 23일 보신각에서 국민대회취지서와 임시정부약법이 적힌 선전물이 뿌려지고 한성임시정부 건설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20년 출옥한 후 노동대회 간부가 되었고, 1921년 이영, 장덕수, 김명식 등과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활동하며, 그해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탄생될 때 김사국이 이끌던 서울파는 배제되었다. 1926년 5월 8일 서울청년회 회관에서 폐병으로 사망했고, 김철수는 화요회와 서울파의 합동장례식을 추진했으나 일제의 감시로 민중은 철저히 차단됐다.
2.1. 초기 생애와 민족 운동 참여
1907년 아버지를 여의고, 금강산 유점사(楡占寺)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다가 1919년 3·1 운동 전에 귀국하였다.
1919년 3월 17일 경성 내자동 한성오의 집에서 홍진, 이규갑, 한남수 등과 모여 3.1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했다. 김사국은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정부를 구성하기 전 회의 내용을 민중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민중대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받아들여졌다. 1919년 4월 23일 보신각에서 국민대회취지서와 임시정부약법이 적힌 선전물이 뿌려지고 한성임시정부의 건설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회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20년에 출옥하였다. 이후 노동대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며, 1921년 이영, 장덕수, 김명식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를 조직한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활동하였고, 그해 12월에 사회주의자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탄생될 때 김사국의 서울파는 배제되었다.
1926년 5월 8일 서울청년회 회관에서 폐병으로 사망했다. 김철수는 화요회와 서울파의 합동장례식을 추진했다. 일제의 감시속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러온 민중은 철저히 차단됐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한 김사국은 1919년 3·1 운동 직후 한반도 내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 대회를 개최하려다 관련자들과 함께 체포 및 탄압을 받았다. 이듬해까지 수감된 그는 석방 후 1921년, 장덕수 등 고려공산당한국어 상해파 국내 멤버와 함께 서울청년회를 결성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접근했다. 1922년 볼셰비키로부터 제공된 자금을 상해파가 독점하고 있던 것이 밝혀지자 서울청년회에서 상해파를 추방하고 김사국을 중심으로 서울파가 형성되었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파벌 싸움을 해소하고 통일 전선을 모색했지만,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과정에서 서울파는 배제되었고, 1926년 폐결핵으로 병사했다.
2.2. 서울청년회와 사회주의 운동
1920년에 출옥한 김사국은 노동대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며, 1921년 이영, 장덕수, 김명식 등과 함께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볼셰비키로부터 제공된 자금을 고려공산당 상해파가 독점하고 있던 것이 밝혀지자 서울청년회에서 상해파를 추방하고 김사국을 중심으로 서울파가 형성되었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파벌 싸움을 해소하고 통일 전선을 모색했지만,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과정에서 서울파는 배제되었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활동하였고, 그해 12월에 사회주의자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8일 서울청년회 회관에서 폐병으로 사망했다. 김철수는 화요회와 서울파의 합동장례식을 추진했다. 일제의 감시속에서 그의 마지막을 보러온 민중은 철저히 차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