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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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덕수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의 정치 활동을 한 인물이다.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교 유학 중 신아동맹당을 조직하고 상하이에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동아일보 주필을 역임하며 언론 활동을 했고,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기여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 친일 행위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1947년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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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의 사상가 - 안창호
안창호는 평안남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로서, 서양식 교육과 기독교 입교 후 독립협회 활동, 대한국민회 설립 등 해외 독립운동, 신민회 조직, 흥사단 재건 등 국내외 민족 교육과 계몽 운동에 헌신하며 민족 개조를 주창하고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 일제강점기의 사상가 - 이효석
이효석은 1907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등을 발표하며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다가 1942년 사망한 소설가이다. - 결성 장씨 - 장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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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진은 걸그룹 구구단의 멤버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가수로, 현재 백석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재학 중이며, 구구단 활동 당시 '소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영준과 콜라보 음원을 발매하기도 했다. - 신한청년당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신한청년당 - 김규식
김규식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 학자로서, 미국 유학 후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했다.
장덕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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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덕수 |
한자 | 張德秀 |
로마자 표기 | Jang Deoksu |
다른 이름 | 설산 (雪山, Seolsan) |
출생일 | 1894년 12월 10일 |
출생지 | 조선 황해남도 재령군 |
사망일 | 1947년 12월 2일 |
사망지 | 서울, 대한민국 |
국적 | 대한제국 |
본관 | 결성 장씨 |
배우자 | 박은혜 (재혼) |
형제 | 장덕준(형), 장덕진(아우) |
자녀 | 장숙원(딸), 장혜원(딸), 장지원(아들), 장사원(아들) |
부모 | 장붕도(부), 김현묘(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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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
학력 |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
직업 | |
직업 | 정치가, 언론인, 교수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한국민주당 |
당내 직책 | 정치부장 |
경력 | |
경력 | 보성전문학교 교수 |
종교 | |
종교 | 개신교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고하 송진우 기념관 |
2. 생애
황해남도 재령군 출신이다. 1910년대에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재학 중에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리더로 활동했다. “신아동맹당”에서 중국 대륙과 타이완 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마하라 카잔의 잡지 「제3제국」에도 기고했다.[3] 1918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25] 1919년 2월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다.[9] 같은 해 11월 여운형의 방일 때 통역을 맡았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주필을 역임했고,[11] 김명식 등과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국내 지부를 조직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로부터 제공받은 자금을 실력양성운동과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인원 파견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36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참여했다. 1946년 10월에 실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선거 무효를 받고 재선거에서 낙선했다. 1947년 자택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들에게 암살당했다.[3]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認定되었다.[3]
2. 1. 유년기 (1894~1911)
장덕수는 1894년 12월 10일 조선 황해남도 재령 남율면 강교리 나무리벌에서 농업인 장붕도와 어머니 김현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 형제로는 이복형 장덕주, 독립운동가인 친형 장덕준과 동생 장덕진, 여동생 장덕희가 있었다. 그의 선조 장사는 고려 충렬왕 때의 공신으로 결성부원군에 봉군되었고, 결성군 장하는 고려 말기 문신으로 평장사에 이르렀으나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충청남도 홍성군으로 은거하였다. 장하의 장남 유온이 황해남도 재령군에 입향하면서 그의 직계 선조가 되었다.할아버지는 무명의 선비로 장초시라 불렸고,[4] 아버지 장붕도는 가난한 농부였다. 아버지까지 9대 독자였으나 4형제가 태어났다. 형 장덕준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활동 중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동생 장덕진은 상해 임시정부의 행동대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던 중 사살되었다.
가난한 빈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했으며, 정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10세 때 부친을 여의었고, 진남포의 학교에서 김구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5] 당시 진남포의 학교에서 형 장덕준은 강사로 있었고, 그는 진남포 학교 기숙사에서 하숙하며 학교에 다녔다.
2. 2. 청년기 및 독립운동 (1911~1923)
황해남도 재령군 출신이다. 1910년대에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재학 중에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리더로 활동했다. “신아동맹당”에서 중국 대륙과 타이완 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마하라 카잔의 잡지 「제3제국」에도 기고했다.[3] 1918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25] 1919년 2월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다.[9] 같은 해 11월 여운형의 방일 때 통역을 맡았다.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주필을 역임했고,[11] 김명식 등과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국내 지부를 조직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로부터 제공받은 자금을 실력양성운동과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인원 파견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12]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판임문관시험(判任文官試驗)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임관(判任官)에 임용되었다.[6] 그러나 1912년 판임관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정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한다.

일본에서는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으며 와세다 대학의 문학 강의록과 정경과강의록으로 독학을 하였으며, 1912년 가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3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를 수료하고,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신익희, 김성수, 송진우를 만났다. 이들은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신익희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같이 다니며 학업보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활동에 주력하였다.[6] 대학 재학 중 장덕수는 신익희와 함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조선학회 등에서 함께 활동하며 움직였다. 재일본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하고, 이 단체의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는 편집부 부장과 평의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는 사이 그는 신익희와 함께 고향을 그리며 달을 바라보고 함께 비분강개하며 국사를 통렬히 논하고 함께 독립운동에 일신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7] 그는 신익희, 윤홍섭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한인 학생회의 간부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봄 김명식(金明植), 김철수, 최익준(崔益俊), 김익수, 중국인 황각(黃覺) 등 한인 유학생 및 중국 학생들과 함께 일제의 타도와 새 아시아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비밀지하정당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6년 7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16년 9월 학우회 평의원이 되었다.[8]
1917년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되라는 와세다 대학 교수의 권유와 추천을 거부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지명되어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여운형(呂運亨)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후 신아동제사의 사원으로 가입하였다.
1918년 정당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여운형·신채호·조동호·김규식·신성모·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25]
1919년 2월 비밀리에 귀국하려 했으나, 귀국 직후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3.1 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굴하지 않았다.[9] 그는 일본인 법관에게 자신이 무죄임을 유창한 일본어로 설명하였다.[10]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한 그는 지역의 명사들과 정치, 사회에 대한 담론과 토론으로 소일하였다. 그 중에는 김대중의 아버지 김운식도 있었다. 1919년 11월 일본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임시정부 외무부차장 여운형이 장덕수를 석방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하여 그의 도움으로 하의도를 탈출,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서 여운형의 통역을 보조했다.
1920년 4월 1일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아일보의 제1대 주필에 취임하였다.[11]
1920년 6월 조선교육회 결성에 참여하여 평의원을 지냈다. 이어 가을 경성부에서 사회혁명당 참여, 12월 조선청년연합회 창립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가하여 이사가 되었다. 그 해 4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의 창립에 참여하고, 노동공제회 의사(議事)에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조선청년연합회와 서울청년연합회의 지도자로 추대된다.
1921년 4월 조선교육조사위원회 개선안 편립위원을 맡았으며, 5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 대회에서 중앙위원 및 내지(국내) 간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가을 무렵 '사기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공산주의 그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
1922년 3월 세계협회조직에 참여했다.
1922년 11월에는 안재홍, 조만식 등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각종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석했던 이봉수가 국내로 자금을 보냈으나, 이 자금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유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2] 김성숙은 김사국이 1921년 가을부터 이른바 사기 공산당 사건을 일으켜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 지도자인 장덕수를 맹공하여 1922년 4월에 장덕수를 내모는 데 성공했다고 회고하였다.[13]
김사국은 이 자금이 장덕수, 최팔용, 오상근 등에게 전달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12] 이는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으로 알려졌고, 김사국과 김한(金翰)은 장덕수 등이 거액의 돈을 착복하여 개인적으로 남용했다고 비난했다.[12] 결국 1922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 총회에서 장덕수는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에서 제명되었다.[12]
김사국은 곧 사망했지만 장덕수에 대한 공금 착복 의혹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김사국이 죽은 지 37년 뒤,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는 1980년 5월 16일 증언을 통해 그 돈이 장덕수가 아닌 최팔용에게 전달됐다고 밝히며 장덕수의 결백을 증언했다.[12] 그러나 이 사건으로 장덕수는 명성을 잃고 좌절감에 빠졌다.
1923년 4월 장덕수는 도미 유학길에 올랐다.[12]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도쿄를 경유했을 때, 지요다구 간다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했다(장덕수 구타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장덕수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혁명단에서는 그의 이러한 경력을 들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2. 2. 1. 관료 생활 및 일본 유학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하는 판임문관시험(判任文官試驗)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임관(判任官)에 임용되었다.[6] 그러나 1912년 판임관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정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한다.일본에서는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으며 와세다 대학의 문학 강의록과 정경과강의록으로 독학을 하였으며, 1912년 가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3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를 수료하고,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신익희, 김성수, 송진우를 만났다. 이들은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신익희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같이 다니며 학업보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활동에 주력하였다.[6] 대학 재학 중 장덕수는 신익희와 함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조선학회 등에서 함께 활동하며 움직였다. 재일본동경 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하고, 이 단체의 기관지 《학지광》을 발간하는 편집부 부장과 평의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는 사이 그는 신익희와 함께 고향을 그리며 달을 바라보고 함께 비분강개하며 국사를 통렬히 논하고 함께 독립운동에 일신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7] 그는 신익희, 윤홍섭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한인 학생회의 간부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봄 김명식(金明植), 김철수, 최익준(崔益俊), 김익수, 중국인 황각(黃覺) 등 한인 유학생 및 중국 학생들과 함께 일제의 타도와 새 아시아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비밀지하정당인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6년 7월 일본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16년 9월 학우회 평의원이 되었다.[8]
2. 2. 2. 상하이 망명과 임시정부 활동
1917년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되라는 와세다 대학 교수의 권유와 추천을 거부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지명되어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여운형(呂運亨)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후 신아동제사의 사원으로 가입하였다.1918년 정당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여운형·신채호·조동호·김규식·신성모·신규식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25]
1919년 2월 비밀리에 귀국하려 했으나, 귀국 직후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3.1 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굴하지 않았다.[9] 그는 일본인 법관에게 자신이 무죄임을 유창한 일본어로 설명하였다.[10]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당한 그는 지역의 명사들과 정치, 사회에 대한 담론과 토론으로 소일하였다. 그 중에는 김대중의 아버지 김운식도 있었다. 1919년 11월 일본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임시정부 외무부차장 여운형이 장덕수를 석방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하여 그의 도움으로 하의도를 탈출,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서 여운형의 통역을 보조했다.
|섬네일|160px|여운형. 전남 하의도에 감금된 장덕수의 탈출을 도왔다.]]
|섬네일|200px|일본 제국호텔. 그가 1919년 말 여운형을 따라 일본을 방문했을 때 숙박하던 곳이다.]]
2. 2. 3. 동아일보 창간과 국내 활동
1920년 4월 1일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동아일보의 제1대 주필에 취임하였다.[11]1920년 6월 조선교육회 결성에 참여하여 평의원을 지냈다. 이어 가을 경성부에서 사회혁명당 참여, 12월 조선청년연합회 창립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가하여 이사가 되었다. 그 해 4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의 창립에 참여하고, 노동공제회 의사(議事)에 선출되었다. 한편 그는 조선청년연합회와 서울청년연합회의 지도자로 추대된다.
1921년 4월 조선교육조사위원회 개선안 편립위원을 맡았으며, 5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 대회에서 중앙위원 및 내지(국내) 간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 해 가을 무렵 '사기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공산주의 그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
1922년 3월 세계협회조직에 참여했다.
1922년 11월에는 안재홍, 조만식 등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각종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2. 2. 4.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도미 유학
1921년 5월 상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석했던 이봉수가 국내로 자금을 보냈으나, 이 자금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유용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2] 김성숙은 김사국이 1921년 가을부터 이른바 사기 공산당 사건을 일으켜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 지도자인 장덕수를 맹공하여 1922년 4월에 장덕수를 내모는 데 성공했다고 회고하였다.[13]김사국은 이 자금이 장덕수, 최팔용, 오상근 등에게 전달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12] 이는 '공산주의 선전비의 남비(濫費) 사건'으로 알려졌고, 김사국과 김한(金翰)은 장덕수 등이 거액의 돈을 착복하여 개인적으로 남용했다고 비난했다.[12] 결국 1922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 총회에서 장덕수는 서울청년회와 조선청년연합회에서 제명되었다.[12]
김사국은 곧 사망했지만 장덕수에 대한 공금 착복 의혹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김사국이 죽은 지 37년 뒤,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는 1980년 5월 16일 증언을 통해 그 돈이 장덕수가 아닌 최팔용에게 전달됐다고 밝히며 장덕수의 결백을 증언했다.[12] 그러나 이 사건으로 장덕수는 명성을 잃고 좌절감에 빠졌다.
1923년 4월 장덕수는 도미 유학길에 올랐다.[12]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도쿄를 경유했을 때, 지요다구 간다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했다(장덕수 구타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장덕수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혁명단에서는 그의 이러한 경력을 들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2. 3. 미국 유학 시절 (1923~1936)
1923년 4월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로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이후 13년간 미국에서 체류했다.[14] 1923년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해 수학하였고, 1924년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신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뉴욕으로 건너가 1924년 10월부터 1936년까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수학하였다.동아일보사에서 보내주는 특별 월급 외에도 그는 사탕수수 농장에 취직하여 노동과, 식당, 상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조달하였다.
(좌측 김성수, 두 번째 이활, 우측 첫 번째 장덕수, 두 번째 신성모)
유학 직후 그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한국인 유학생 친목단체에 조직에 참여, 북미한국인유학생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된다. 유학생활 하는동안 그는 허정, 이기붕, 조병옥 등을 만나 사귀었고,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서재필 등과도 만났다. 1925년 이승만등이 조직한 대한인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8년 2월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 발기인으로 창간했고, 창간 이후 삼일신보사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대학원 재학시절 1929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간다. 런던에서는 윤보선, 윤치왕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1929년 6월부터 그는 영국 런던의 런던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며 동시에 연구를 하였고, 1930년 세계일주차 런던을 방문한 김성수와 재회하였다.
1932년 잠시 조선에 들렀는데, 이때 만난 윤보선의 아버지 윤치소, 윤치호 등을 찾아 인사드리던 중 우연히 윤보선의 졸업 사실을 발설하였다.
1932년 영국 런던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석사 학위를 받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오리건 주립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에서 언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1934년 4월 15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 주미 제5행서 재무위원에 선임되었다.[15] 그러나 임시 정부 재정 문제로 9월 15일 사임하였다.[16][17]
미국에서 1936년 5월 <영국의 산업평화>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완성하여 컬럼비아 대학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 4. 일제강점기 후반 (1936~1945)
1936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로 복귀했다.[3] 그러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되자 사퇴하고,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교수로 재직하였다.[18]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興業俱樂部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23][24] "조선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라는 내용의 사직서를 제출했다.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친일 단체에 참여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25] 1939년 1월 내선일체를 적극 지지하는 성향의 잡지사인 동양지광사가 창립될 때 이사를 맡았으며, 2월에는 동양지광 창간기념으로 마련한 행사인 '강연과 영화의 밤'에서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이란 연제로 강연했다. 7월에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경성지부 제4분회장을 맡았다.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간사로 쭉 활동하면서 기관지 《사상보국(思想報國)》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또한 1939년 일제 전시체제하에서 관변 통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 등을 맡았다.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 겸 후생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12월에는 대화숙(야마도쥬쿠)에 참여했다. 1941년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7월 해방 직전에 결성된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4년 11월 5일 부민관에서 열린 학병제도 실시 사기앙양대회에서 '''
이처럼 신문, 잡지 등에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는 내용의 논설문과 학도병 권유문 등을 많이 기고했고, 여러 차례 강연하며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27][28] 이러한 행위로 인해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認定되었다.[3]
보성전문학교의 철학, 사회과학 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형 장덕준과 동생 장덕진이 모두 독립운동 중 희생되었기에, 총독부 경무국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간주하여 감시하였다.
1942년부터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 출연,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방송을 하였고, 그는 송진우, 장택상, 안재홍, 여운형, 김성수 등과 같이 이를 비밀리에 청취했다.
1943년 겨울, 총독부 학무국장과 경무국장이 보성전문 전임교수 전원을 부민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하여 학병 강요를 하고자 했다.[30] 이 자리에는 친일 기업인 한상룡도 참석했다.[31] 장덕수는 회의 도중 친일파와 일본 학무/경무국장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31]
{{인용문|너희들이 나쁜 놈들이다. 관등 하나쯤 승진하려고 그런 무리한 짓을 하고 있는데 조선 청년들이 무엇이 답답해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던지려 나가겠는가? 너희들이 그렇게 애국심에 불탄다면 연령이야 많고 적고 간에 너희들이 솔선해서 출정[31] 해야 할 것이 아닌가?[32]
지원이면 지원에 맡기는 것이지 왜 강요를 하는가? 만주국(滿洲國)의 생성,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權)의 형성 등등은 모두일본의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고, 표방하는 아시아 제 민족의 공영(共榮)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실은 인자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너희놈들이 잘못 보좌해서 욕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일본의 집권자라면 이런 모든 협잡은 안시키겠으며, 만주국, 남양, 기타 대동아 각지 각민족에 대해서 정말로 공영할 정책을 취하겠다.[32]}}
그의 발언에 회의장에 참석했던 동료 교수들은 사색이 되었다. 경무국장은 쥐구멍에라도 숨어야 할 처지라 몸둘 곳을 모르다가 '서울역에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겠다'고 용서를 빌면서 도망치듯 나갔다.[32] 학무국장은 초청자인 입장이므로 도망칠 수가 없었던지 그대로 앉아서 '장덕수 교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라고 때때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32]
다음날 새벽 두 시에 산회하였는데, 보성전문 교수들은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였다.[32]
김성수는 그에게 속시원하긴 해도 지나치지 않았느냐[33] 며 책망하였다. 그러나 장덕수는 제놈들이 일구이언은 못할 것이 아니냐[33] 며 받았다.
{{인용문|
- 김성수 : 속시원하긴 해도 지나치지 않았어?
- 장덕수 : 괜찮습니다. 제놈들이 일구이언은 못할 것이 아니겠소?
- 김성수 : 설산이 오늘 따라 술을 많이 마시기에 무엇인가 벌어질 것으로는 짐작되었지만 그 경무국자이란 놈 꽁무니 빼는 것이 가관이긴 하더군.
- 장덕수 : 저희들 입으로 (책임은 묻지 않을테니)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했으니까 그게 후회됐겠죠. 아무튼 이런 자리에서 우리쪽 생각을 분명히 말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를 점점 더 얕잡아 볼 겁니다.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가건 강요에 따라 지원형식을 취하건 간에 왜놈들 생각과 같은 생각에서 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못박아 줘야 합니다.
- 김성수 : 바로 그것이 중요한 점인데... 아뭏튼 설산의 그 아슬아슬한 발언에 모두들 식은 땀을 흘렸을 거요
- 장덕수 : 날씨도 추운데 땀을 흘렸다면 잘됐구먼요.[33]}}
하지만 좌담회를 시작할 때 약속한, 아무 이야기도 이 자리에 한하며 추후에 따지지 않겠다고 한 언약을 그들은 지켰기에, 장덕수는 해방되기까지 무사했다.[33]
1945년 초 조선총독부에서 요시찰 인물 살해 계획을 세우자, 그는 비밀리에 은신하였다.
2. 4. 1. 동아일보 복귀와 친일 논란
1936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부사장 겸 주필로 복귀했다.[3] 그러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되자 사퇴하고,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교수로 재직하였다.[18]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興業俱樂部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23][24] "조선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직한다."라는 내용의 사직서를 제출했다.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대화숙(야마토주쿠) 등 친일 단체에 참여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25] 1939년 1월 내선일체를 적극 지지하는 성향의 잡지사인 동양지광사가 창립될 때 이사를 맡았으며, 2월에는 동양지광 창간기념으로 마련한 행사인 '강연과 영화의 밤'에서 '전시체제하의 산업보국'이란 연제로 강연했다. 7월에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경성지부 제4분회장을 맡았다.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간사로 쭉 활동하면서 기관지 《사상보국(思想報國)》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또한 1939년 일제 전시체제하에서 관변 통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 등을 맡았다.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 겸 후생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12월에는 대화숙(야마도쥬쿠)에 참여했다. 1941년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7월 해방 직전에 결성된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4년 11월 5일 부민관에서 열린 학병제도 실시 사기앙양대회에서 '''
이처럼 신문, 잡지 등에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는 내용의 논설문과 학도병 권유문 등을 많이 기고했고, 여러 차례 강연하며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27][28] 이러한 행위로 인해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認定되었다.[3]
2. 4. 2. 광복 직전
보성전문학교의 철학, 사회과학 교수로 활동했다.그의 형 장덕준과 동생 장덕진이 모두 독립운동 중 희생되었기에, 총독부 경무국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간주하여 감시하였다.
1942년부터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했다.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 출연,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방송을 하였고, 그는 송진우, 장택상, 안재홍, 여운형, 김성수 등과 같이 이를 비밀리에 청취했다.
1943년 겨울, 총독부 학무국장과 경무국장이 보성전문 전임교수 전원을 부민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하여 학병 강요를 하고자 했다.[30] 이 자리에는 친일 기업인 한상룡도 참석했다.[31] 장덕수는 회의 도중 친일파와 일본 학무/경무국장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31]
{{인용문|너희들이 나쁜 놈들이다. 관등 하나쯤 승진하려고 그런 무리한 짓을 하고 있는데 조선 청년들이 무엇이 답답해서 일본을 위해 목숨을 던지려 나가겠는가? 너희들이 그렇게 애국심에 불탄다면 연령이야 많고 적고 간에 너희들이 솔선해서 출정[31] 해야 할 것이 아닌가?[32]
지원이면 지원에 맡기는 것이지 왜 강요를 하는가? 만주국(滿洲國)의 생성,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權)의 형성 등등은 모두일본의 속임수에서 나온 것이고, 표방하는 아시아 제 민족의 공영(共榮)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은 실은 인자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너희놈들이 잘못 보좌해서 욕을 보이는 것이다. 내가 일본의 집권자라면 이런 모든 협잡은 안시키겠으며, 만주국, 남양, 기타 대동아 각지 각민족에 대해서 정말로 공영할 정책을 취하겠다.[32]}}
그의 발언에 회의장에 참석했던 동료 교수들은 사색이 되었다. 경무국장은 쥐구멍에라도 숨어야 할 처지라 몸둘 곳을 모르다가 '서울역에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겠다'고 용서를 빌면서 도망치듯 나갔다.[32] 학무국장은 초청자인 입장이므로 도망칠 수가 없었던지 그대로 앉아서 '장덕수 교수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라고 때때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32]
다음날 새벽 두 시에 산회하였는데, 보성전문 교수들은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였다.[32]
김성수는 그에게 속시원하긴 해도 지나치지 않았느냐[33] 며 책망하였다. 그러나 장덕수는 제놈들이 일구이언은 못할 것이 아니냐[33] 며 받았다.
{{인용문|
- 김성수 : 속시원하긴 해도 지나치지 않았어?
- 장덕수 : 괜찮습니다. 제놈들이 일구이언은 못할 것이 아니겠소?
- 김성수 : 설산이 오늘 따라 술을 많이 마시기에 무엇인가 벌어질 것으로는 짐작되었지만 그 경무국자이란 놈 꽁무니 빼는 것이 가관이긴 하더군.
- 장덕수 : 저희들 입으로 (책임은 묻지 않을테니)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했으니까 그게 후회됐겠죠. 아무튼 이런 자리에서 우리쪽 생각을 분명히 말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를 점점 더 얕잡아 볼 겁니다.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가건 강요에 따라 지원형식을 취하건 간에 왜놈들 생각과 같은 생각에서 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못박아 줘야 합니다.
- 김성수 : 바로 그것이 중요한 점인데... 아뭏튼 설산의 그 아슬아슬한 발언에 모두들 식은 땀을 흘렸을 거요
- 장덕수 : 날씨도 추운데 땀을 흘렸다면 잘됐구먼요.[33]}}
하지만 좌담회를 시작할 때 약속한, 아무 이야기도 이 자리에 한하며 추후에 따지지 않겠다고 한 언약을 그들은 지켰기에, 장덕수는 해방되기까지 무사했다.[33]
1945년 초 조선총독부에서 요시찰 인물 살해 계획을 세우자, 그는 비밀리에 은신하였다.
2. 5. 광복 이후 (1945~1947)
해방 이후 장덕수는 1945년 9월 6일 한국민주당 계획부장,[34] 1945년 9월 22일 한국민주당 외무부부장,[35] 1945년 12월 23일 애국금헌성회 중앙위원,[36] 1946년 1월 24일 비상국민회의주비회 준비위원,[37] 1946년 5월 1일 한국민주당 외교조사,[38] 1946년 6월 21일 미국·필리핀 독립기념 축하준비회 외교부장,[39] 1946년 7월 3일 한국여론협회 정치위원장,[40] 1946년 10월 19일 한국민주당 정치국장(정치부장)[41] 1947년 10월 14일 한국민주당 정치부장(연임)[42] 등을 역임하였다.1945년 8월 15일 허정과 장덕수는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두고 상의하였고, 8월 16일 허정은 보성전문학교 교사 장덕수를 찾아가 정당 창당을 합의하였다.[43] 허정은 정당 창당이 나라를 위하는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판단하였다.[43]
1945년 9월 6일 장덕수는 한국민주당 계획부장으로서 한국민주당 창당에 기여하였다.[34] 한민당 창당 발기문 성명서 작성에 장덕수가 초안을 했는데, 그는 여기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맹렬히 비난하는 논조의 글을 작성했다.[44] 또한 교육, 언론 활동도 준비하여 동아일보의 복간을 주관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이론과 강령을 만드는데 밤새워가며 노력하였다.
1945년 9월 16일 천도교 강당에서 당원 16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당이 정식 출범하였다.[45]
1945년 9월 22일 장덕수는 한국민주당 외무부부장에 임명되었다.[35]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피살 사건으로 송진우가 암살되자, 한국민주당은 원세훈을 위원장에 추대하였다.[47] 1946년 1월 7일 한국민주당은 김성수를 수석총무 겸 중앙집행위원회 총무로 선출하였다.[49]
1946년 비상국민회의 주비위원을 맡았다.
1946년 1월 한반도의 총선거를 협의하기 위한 미국, 소련 간의 미소공위가 예정되자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김성수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대한 찬성 입장을 보였다.[38] 1월 제1차 미소공위가 결정되자 장덕수는 이승만과 김구를 찾아가 미소공위에 참가해줄 것을 설득했으나, 이승만, 김구 모두에게 거절당하였다. 미소공위 문제로 장덕수는 이승만과의 관계, 김구와의 관계가 모두 악화되었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적극 참가해야 함을 역설하고 다녔다. 조병옥은 '미소공동위 참가문제 때문에 그가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정치적 촉망이 많았다'고 회고했다.[65] 한국의 독립에 미국, 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66]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방문한 민주당 장덕수에게 참가보류를 강경히 주장하였다.[55] 6월 4일 반탁진영 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참가 불참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 이때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한 단체와 대표는 한국민주당 장덕수, 大韓勞總 전진한, 靑年總同盟 유진산, 全靑 이성수(李成株), 全女總盟 황애덕(黃愛德), 獨促婦人會 박승호(朴承浩), 天道敎輔國黨 이진해(李鎭海), 己未獨立 류홍, 儒道會 이재억(李載億), 黃海會 함석훈(咸錫勳)이었다.[56] 6월 10일 한민당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57] 이에 이승만은 "공위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찬탁)하기로 되었는 즉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서명해서 (신탁통치를)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민당을 비판하였다.[58][59] 6월 22일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3당으로 분립하였다. 한국독립당이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박용희·안재홍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결성하여 미소공위에 참가하기로 하였다.[63]
1947년 8월 12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양진영의 반목으로 완전 결렬되어,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2. 5. 1. 한국민주당 창당과 정치 활동
1945년 8월 15일 허정과 장덕수는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두고 상의하였고, 8월 16일 허정은 보성전문학교 교사 장덕수를 찾아가 정당 창당을 합의하였다.[43] 허정은 정당 창당이 나라를 위하는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판단하였다.[43]1945년 9월 6일 장덕수는 한국민주당 계획부장으로서 한국민주당 창당에 기여하였다.[34] 한민당 창당 발기문 성명서 작성에 장덕수가 초안을 했는데, 그는 여기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맹렬히 비난하는 논조의 글을 작성했다.[44] 또한 교육, 언론 활동도 준비하여 동아일보의 복간을 주관하였고, 한국민주당의 이론과 강령을 만드는데 밤새워가며 노력하였다.
1945년 9월 16일 천도교 강당에서 당원 16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당이 정식 출범하였다.[45]
1945년 9월 22일 장덕수는 한국민주당 외무부부장에 임명되었다.[35]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 피살 사건으로 송진우가 암살되자, 한국민주당은 원세훈을 위원장에 추대하였다.[47] 1946년 1월 7일 한국민주당은 김성수를 수석총무 겸 중앙집행위원회 총무로 선출하였다.[49]
1946년 비상국민회의 주비위원을 맡았다.
2. 5. 2. 미소공위와 단정 수립 주장
1946년 1월 한반도의 총선거를 협의하기 위한 미국, 소련 간의 미소공위가 예정되자 미소공위를 반대하는 김성수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대한 찬성 입장을 보였다.[38] 1월 제1차 미소공위가 결정되자 장덕수는 이승만과 김구를 찾아가 미소공위에 참가해줄 것을 설득했으나, 이승만, 김구 모두에게 거절당하였다. 미소공위 문제로 장덕수는 이승만과의 관계, 김구와의 관계가 모두 악화되었다.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적극 참가해야 함을 역설하고 다녔다. 조병옥은 '미소공동위 참가문제 때문에 그가 주동적인 역할을 하고 정치적 촉망이 많았다'고 회고했다.[65] 한국의 독립에 미국, 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66]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방문한 민주당 장덕수에게 참가보류를 강경히 주장하였다.[55] 6월 4일 반탁진영 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참가 불참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 이때 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한 단체와 대표는 한국민주당 장덕수, 大韓勞總 전진한, 靑年總同盟 유진산, 全靑 이성수(李成株), 全女總盟 황애덕(黃愛德), 獨促婦人會 박승호(朴承浩), 天道敎輔國黨 이진해(李鎭海), 己未獨立 류홍, 儒道會 이재억(李載億), 黃海會 함석훈(咸錫勳)이었다.[56] 6월 10일 한민당은 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57] 이에 이승만은 "공위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찬탁)하기로 되었는 즉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서명해서 (신탁통치를)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민당을 비판하였다.[58][59] 6월 22일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3당으로 분립하였다. 한국독립당이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박용희·안재홍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결성하여 미소공위에 참가하기로 하였다.[63]
1947년 8월 12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양진영의 반목으로 완전 결렬되어, 한국에 독립적·민주적 통합정부를 수립한다는 목적이 무산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2. 6. 피살 (1947)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장덕수는 자택인 청설장을 방문한 박광옥, 배희범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67]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 배희범을 체포하였다.[68]박광옥은 종로경찰서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연대상과 2년생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78][79] 1948년 3월 15일 공판에서 배희범은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한 것", "해방 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분자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 때문에 암살했다고 증언하였다.[78]
1948년 1월 16일 수도청장 장택상은 장덕수 살해 혐의로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김석황을 체포하였다.[70] 김석황은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이자 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이자 대한보국의용단(대한독립의용단) 단장이자 임시 정부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1948년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은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조엽, 박정덕이 장덕수 피살 사건의 범인이라고 발표하였다.[72]
1948년 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제1회 공개재판에서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하였다.[73]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74] 3월 8일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트루먼 대통령의 명의로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75] 같은 날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76]


1948년 3월 17일 제11회 공판 내용에 따르면 박광옥, 배희범 등 용의자들은 장덕수 등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47년 8월 한양의원에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다. 최중하의 진술에 따르면 원래 안재홍·배은희·장덕수를 암살하려 했으나 "안재홍씨는 찬탁을 부르짖은 죄는 크나 그후 남북통일을 제창하게 되었으므로 용서하였고 배은희는 그 정치적 실력이 크지 못하므로 제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결정되어 오직 장덕수 1인을 죽이기로 된 것"이었다고 하였다.[79]
1948년 4월 1일 제21회(최종) 공판에서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됐고, 조엽, 박정덕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80] 4월 22일 존 하지는 군사위원회의 판결을 검토 후 중앙청공보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최후적 조치를 발표하였다. "1) 박광옥 및 배희범의 사형은 승인하나 그 집행은 추후 재심할 시까지 보류함. 2) 김석황·신일준·김중목·최중하의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함. 3) 조상항 및 손정수의 사형은 10년형으로 감형함. 4) 조엽 및 박정덕의 10년형은 5년형으로 감형함."[81]
1947년 12월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허정은 한독당을 유력 용의자로 보았다. 그는 조소앙을 찾아가서 "왜 설산을 죽였소"라며 따졌다.[82] 허정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나 조소앙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피했다. 허정은 "너털웃음으로 숨길 수 있을 줄 아시오? 끝내 속이지는 못합니다"라고 외치고는 뛰쳐나왔다.[82] 허정은 장덕수 암살이 임정 짓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차마 김구 주석에게는 가서 따지지 못하고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조소앙을 찾아가서 따졌다. 결국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임정과 한독당, 민주의원에 모두 간부로 몸담던 김석황, 조상항이 체포되면서 김구까지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후 허정은 개인적으로는 조소앙과 친분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김구나 임시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돌아섰다.
1947년 12월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신익희는 장덕수를 추모하는 추도사에서 자신과 장덕수의 관계를 중국 고사에 나오는 절친한 친구인 백아와 종자기에 비유하였다.[6]
비밀결사 백의사의 간부이자 임시정부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던 김두한은 1969년 동아방송의 권오기와 대담인 노변야화에서 임시정부 계통이라고 말했다.[83]
3. 사후
장덕수의 아내이자 이화여전 영문과 교수이자 경기여고 교장이던 박은혜는 위기를 극복하고자 아들 장사원을 미국으로 피신시켰다. 장사원은 현재 미국 체류중이다.[84] 그 뒤 설산장덕수박사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1948년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1980년대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이 쓴 한국의 친일파 99인,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에 수록되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85]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認定되었다.[3]
4. 학력
장덕수는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교에서 언론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런던 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과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다시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및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5. 평가 및 논란
황해도 재령군 출신이다. 1910년대에 와세다 대학교에 유학하여 재학 중에는 조선인 유학생들의 리더로 활동했다. “신아동맹당”에서 중국 대륙과 타이완 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마하라 카잔의 잡지 「제3제국」에도 기고했다.[3] 1918년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1919년 2월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같은 해 11월 여운형의 방일 때 통역을 맡았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주필을 역임했고, 김명식 등과 상하이파의 국내 지부를 조직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로부터 제공받은 자금을 실력양성운동과 워싱턴 군축 회의에 인원 파견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36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참여했다. 1946년 10월에 실시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입법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선거 무효를 받고 재선거에서 낙선했다. 1947년 자택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들에게 암살당했다.[3]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認定되었다.[3]
5. 1. 긍정적 평가
허정은 장덕수를 겸손하고 정의와 정도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로 평가하며, "살신성인의 진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언제나 자기보다는 나라와 민족과 다른 사람을 앞세웠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영광과 명예보다는 정의와 정도(正道)를 추구했다"고 회상했다.[90] 또한 허정은 장덕수가 학식과 인격이 뛰어나고 달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평가했다.[93] 허정은 장덕수가 살아있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90]이상훈은 장덕수를 용기와 담력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9] 조병옥은 장덕수의 암살을 두고 "유능한 정치가 한 사람이 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즉 설산 장덕수 형의 불의의 흉사는 한국민주당만의 비통지사가 아니라 건국 과정에 있는 한민족 전체의 애통지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애도했다.[65] 조병옥은 미군정 경무부장으로 재직할 당시 장덕수와 여러 사건에 대해 상의하고 대책을 강구했다고 회상했다.[65]
허정에 의하면 고집이 세고 남의 의견에 잘 귀 기울이지 않는 이승만 조차도 장덕수를 신임하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였고,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그를 아끼고 그의 의견을 소홀히 하지 못했다고 한다.[90]
장덕수는 황해도 재령군 출신으로, 1910년대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조선인 유학생들의 리더로 활동했다.[3] 상하이에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주필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과 언론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다.[3]
5. 2. 부정적 평가
장덕수는 일제강점기 말 친일 단체에 참여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등의 친일 행적을 보였다.[94][95]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3]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은 장덕수가 '원래 미국,영국에 호의를 가졌으나 일제에 호감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혹은 친미, 배일사상의 소지자이었으나 위협을 느끼고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적 태도와 맹종적 협력한 자'로 분류된다고 언급했다.[91] 또한, 1941년 10월 10일에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하려다 체포되었던 전력이 있었다.[92]
1947년 12월 장덕수가 암살당한 뒤, 일각에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암살 용의자들은 장덕수가 정권을 잡기 위해 신탁통치를 옹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하려 했고, 해방 전 공산당의 이론가였으며, 일본 헌병대의 촉탁인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94][95] 그러나 이러한 의혹들은 확실하게 자료로 검증된 것은 없었다.
6. 가족 관계
장붕도와 김현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장덕준과 장덕진은 그의 친형제이다. 박은혜와 1937년 재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7. 기타
1982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한인수가, 1985년 KBS1 드라마 새벽과 1990년 KBS1 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서는 김성원이, 2017년 영화 박열에서는 문정수가 장덕수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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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密結社 興業俱樂部事件으로 檢束된 申興雨이하 54名이 西大門警察署에서 治安維持法違反혐의로 京城地方法院檢事局에 송치되었는데 檢事局에서 이들이 轉向聲明書를 발표한 점이 참작되어 起訴猶豫에 처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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