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 (15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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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완(1577년)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으로, 157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한 후 경상방어사 막하에서 활약했다. 이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하여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괄의 난 평정에 기여하여 진무공신에 책록되고 학성군에 봉해졌다. 구성부사, 전라우수사 등을 역임했으며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완의 초상은 보물 제130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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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완은 정유재란 때 이복남 휘하에서 활약하고, 1597년 무과 급제 후 고언백의 막하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이광악을 따라 남원대첩에서 공을 세웠다. 1615년 관무재에 급제, 고산리첨사, 창성방어사를 역임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장만을 도와 진무공신 1등으로 학성군에 봉해졌다. 구성부사, 부총관, 전라우수사, 훈련원도정, 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아들 김여수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해성군’에, 손자 김세기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학림군’에 봉해졌다.
2. 1. 출생과 가계
조선 선조 10년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 구음평에서 이성현감 김극조(金克祧)와 천안 전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천안 전씨는 호랑이가 달려들고, 바닷물이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꿈을 꾼 뒤 김완을 낳았다고 한다.어려서 아버지 김극조는 기축옥사에 한덕수의 무고로 옥사하는 불운이 닥쳤다.
아버지 김극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상여 길을 가로막던 호랑이 입에서 뼛조각을 꺼내주었고, 호랑이가 옷자락을 물고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서 아버지를 모셨다.
2. 2. 정유재란 참전
정유재란 때 전라병사 이복남의 휘하로 들어가 용맹을 떨쳤다. 1597년 무과에 급제하고 경상방어사 고언백의 막하로 들어갔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일본군을 만나 이들을 무찔러 전공을 세웠다. 이후 전라병사 이광악을 따라 남원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아버지를 무고하게 옥사시킨 한덕수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2. 3. 한덕수 살해 시도
김완은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방어사의 진에 속해 있다가 전라병사 이광악을 따라 남원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 김완은 아버지를 무고하게 옥사시킨 한덕수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이후 모포 만호, 남원 판관 등을 거쳤다. 김완은 한양에서 한덕수를 다시 찾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수년간 투옥되었다.2. 4. 이괄의 난 평정
1624년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고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2. 5. 관직 생활과 사망
1597년 무과에 급제하고 경상방어사 고언백의 막하로 들어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일본군을 만나 이를 무찔러 전공을 세웠다. 경상방어사의 진에 속해 있다가 전라병사 이광악을 따라 남원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아버지를 무고하게 옥사시켰던 한덕수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이후 모포 만호, 남원 판관 등을 거치고 한양에서 한덕수를 찾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수년간 투옥되었다.
1615년 관무재(觀武才)에 급제하고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를 거쳐 창성방어사에 이르렀다. 1624년 이괄의 난 중 도원수 장만을 도와 반란을 평정하여 진무공신에 책록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구성부사, 부총관, 전라우수사, 훈련원도정, 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고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 가족 관계
4. 관련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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