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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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축옥사는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대규모 숙청 사건이다. 정여립은 동인에 속해 있었으며,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술 훈련을 하는 등 세력을 키웠다.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으로 정여립의 모반이 드러나자, 정여립은 자결하고 관련된 동인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철이 위관으로 가혹한 옥사를 진행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서인들은 정권을 장악했다. 기축옥사는 사림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호남 지역에 대한 차별을 야기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무대비와 부진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여립의 모반 여부와 사건의 조작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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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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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선조 재위 기간 동안, 김종직 학파의 사림파는 오랜 박해와 숙청 끝에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사림파 내에서는 명종 재위 기간에 정치에 입문한 기성세대와 선조 시대에 관료가 된 신진 세대 간의 세대 차이가 나타났다. 이 차이는 명종의 처남인 심의겸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났다. 사림파는 왕의 외척이 궁정에 부패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 정치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의겸의 집이 궁궐 서쪽에 있어 서인으로 불린 기성세대는 심의겸이 이황의 제자이며, 그의 삼촌에 의해 계획되었던 또 다른 사림 숙청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그를 지지했다. 반면 지도자 김효원의 집이 궁궐 동쪽에 있어 동인으로 불린 신진 세대는 심의겸과 기성 사림 관료들이 부패와 윤원형의 횡포로 악명 높았던 명종 시대의 과오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철학적으로 동인은 이황과 조식의 학풍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따랐다.
이러한 분열은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해 공개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요직인 이조 판서 자리가 비게 되자 전임자가 김효원을 추천했으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의 추종자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임명을 반대했다. 이는 사림 학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었다. 김효원이 이 자리에 임명된 후, 심의겸의 동생이 후임으로 같은 자리에 임명되는 것에 반대했다. 이이는 심의겸과 김효원을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에 임명하고, 동인 이발과 서인 정철 간의 휴전을 주선함으로써 당파 분열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이 사후, 동인이 심의겸을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우위를 점하면서 두 파벌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기축옥사의 기원은 중종 재위 기간 중 일어난 기묘사화와 그로 인한 두 가문 간의 앙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519년 사림의 영수 조광조가 모함으로 처형된 후, 우의정 안당은 조광조와 그 추종자들을 지지한 죄로 파직되었으며, 그의 아들들도 연루되었다. 1521년, 안당 가문의 노비 출신으로 안당의 후원을 받아 정부 고위 관리가 된 송사련은 중종에게 안당의 아들이 기묘사화의 주동자인 영의정 남곤과 심정을 죽이려 모의한다고 보고했다. 그는 안당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할 손님 명단을 공모자들의 회합 증거로 제시했다.[2] 이 사건으로 안당과 그의 가족을 포함한 12명 이상의 사림 학자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를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고 부른다. 송사련은 높은 벼슬에 오르고 안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송사련의 아들 중 한 명이 송익필인데, 그는 명성이 높아 이이와 서인 지도자들과 교우했으며, 그의 업적이 아버지의 죄를 덮을 만하다는 칭찬을 받았다.[3] 송익필이 그의 스승이자 은인을 배신한 아버지의 죄를 극복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유교 사회에서 가장 큰 죄 중 하나로 여겨지며, 특히 조광조 지지자들을 향한 사림에 대한 숙청을 야기했다. 선조 재위 동안 사림파가 정권을 잡았고 조광조와 안씨 가문은 그들의 순교자로 완전히 복권되었다.
그러나 일부 강경 동인들은 송익필을 서인의 배후 조종자로 여기고 안당의 후손들에게 30년 동안 권세와 부를 누린 채 사망한 송사련에 대한 정의와 처벌을 요구하도록 부추겼다. 1586년 재수사 결과, 안당 등이 송사련에 의해 모함당한 것으로 밝혀졌고, 송익필을 포함한 송사련의 70명 이상의 가족 구성원이 노예가 되어 안씨 가문에 보상으로 주어졌다. 억울함을 느낀 안씨 가문으로부터 보복을 받을 위기에 처한 송씨 가문은 흩어져 도망자가 되었다.[4] 존경받는 학자에서 하룻밤 사이에 도망 노비로 전락한 송익필은 정철, 그의 제자이자 유명한 학자인 김장생, 심지어 이산해와 같은 동인 지도자들과 은밀히 머물며 숨어 다녔다.
2. 1. 훈구와 사림
고려 말 사회 혼란을 개혁하려 한 신진사대부들 중 급진개혁파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합류했고, 온건개혁파는 낙향하여 성리학으로 무장하며 실력을 키웠다. 성종 대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조선 전기에 정국을 주도하던 훈구파의 부도덕함을 비판하며 정치 세력으로 성장했다. 사림파는 훈구파의 반격으로 4대 사화를 겪으며 큰 화를 입었으나, 서원 중심의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재기를 거듭한 끝에 선조 대에 이르러 훈구파가 몰락하자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곧 사림이 분열하며 붕당을 형성하였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충돌하였다.2. 2. 붕당정치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유교적 정치 이념 하에서 신하들이 붕당을 형성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었다.[23] 그러나 송나라 이후 주희를 비롯한 신유학자들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군자들이 모인 '군자당'이 소인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23][24] 조선의 사림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고, 선조 역시 붕당 행위가 역모에 버금가는 중범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공론화를 통한 발전적인 당파 정치로 이끌고 왕권 강화책으로 삼고자 붕당을 허용하였다.[25][26]선조 재위 기간 동안, 김종직 학파의 사림파는 오랜 박해와 숙청 이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명종 재위 기간에 정치에 입문한 기성세대와 선조 시대에 관료가 된 신진 세대 간의 세대 차이가 사림파 내에서 나타났다. 사림파는 왕의 외척이 궁정에 부패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 정치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의겸의 집이 궁궐 서쪽에 위치해 서인으로 불린 기성세대는 심의겸이 이황의 제자이며, 그의 삼촌에 의해 계획되었던 또 다른 사림 숙청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그를 지지했다. 반면 지도자 김효원의 집이 궁궐 동쪽에 위치해 동인으로 불린 신진 세대는 심의겸과 기성 사림 관료들이 윤원형의 횡포로 악명 높았던 명종 시대의 과오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철학적으로 동인은 이황과 조식을 따랐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을 따랐다.
이 분열은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해 공개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요직인 이조 판서 자리가 비게 되자 전임자가 김효원을 추천했는데,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의 추종자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임명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이 이 자리에 임명되자, 나중에 심의겸의 동생이 그의 후임으로 같은 자리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이는 심의겸과 김효원을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에 임명하고, 동인 이발과 서인 정철 간의 휴전을 주선함으로써 당파 분열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이 사후, 동인이 심의겸을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우위를 점하면서 두 파벌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2. 3. 동인과 서인의 분열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갈등으로 사림파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열하였다. 김효원은 도성 동쪽 건천동에 살았기에 동인(東人)이라 불렸고, 심의겸은 도성 서쪽 정동에 살았기에 서인(西人)이라 불렸다.[27] 서인의 주요 인물은 이이, 정철, 윤두수 등이었고, 동인의 주요 인물은 류성룡, 이산해, 이발 등이었다. 초기에는 견제와 비판, 공존이라는 틀 안에서 정쟁이 이어졌으며, 선조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서인을 두둔하여 붕당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점차 다툼은 격렬해졌다. 양측을 조정하고 중재했던 이이가 1584년에 사망한 뒤, 선조는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동인을 중용했고,[28]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긴 서인들은 조정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28]선조 재위 기간 동안, 김종직 학파의 사림파는 오랜 박해와 숙청 끝에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사림파 내에서는 명종 재위 기간에 정치에 입문한 기성세대와 선조 시대에 관료가 된 신진 세대 간의 세대 차이가 나타났다. 이 차이는 명종의 처남인 심의겸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났다. 사림파는 왕의 외척이 궁정에 부패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 정치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의겸의 집이 궁궐 서쪽에 있어 서인으로 불린 기성세대는 심의겸이 이황의 제자이며, 그의 삼촌에 의해 계획되었던 또 다른 사림 숙청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그를 지지했다. 반면 지도자 김효원의 집이 궁궐 동쪽에 있어 동인으로 불린 신진 세대는 심의겸과 기성 사림 관료들이 부패와 윤원형의 횡포로 악명 높았던 명종 시대의 과오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철학적으로 동인은 이황과 조식의 학풍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학풍을 따랐다.
이러한 분열은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해 공개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요직인 이조 판서 자리가 비게 되자 전임자가 김효원을 추천했으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의 추종자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임명을 반대했다. 이는 사림 학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었다. 김효원이 이 자리에 임명된 후, 심의겸의 동생이 후임으로 같은 자리에 임명되는 것에 반대했다. 이이는 심의겸과 김효원을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에 임명하고, 동인 이발과 서인 정철 간의 휴전을 주선함으로써 당파 분열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이 사후, 동인이 심의겸을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우위를 점하면서 두 파벌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3. 사건 전개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후 그를 비판하면서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바꾸었고, 이이를 존경하던 선조의 미움을 샀다. 조정에서 물러난 정여립은 고향에서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매달 모여 친목을 다지고 학문을 연구하며 군사 훈련을 받았다. 비밀 결사가 아니었던 대동계는 지방 정부의 요청으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으며, 호남 지방(오늘날의 전라도) 전역과 그 너머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던 중 황해도 관리가 선조에게 정여립을 지도자로 하는 반역 음모가 있다고 보고했다.[1]
정여립의 모반 혐의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여립은 "세상은 함께 나누는 것이므로, 한 명의 주인만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세상은 백성의 것이고 백성이 선택한 사람이 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무계급 사회, 세습 군주제 반대, 공화주의까지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혁명적인 사상과 무장한 지지자들의 존재는 그의 적들의 주목을 끌었다. 한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정여립의 반역은 동인들조차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고문받은 추종자들의 자백과 그의 집에서 발견된 편지와 문서 외에는 증거가 없으며, 이는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정여립의 반역 혐의가 수많은 동인들을 숙청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분명하다. 정철은 서인의 영수이자 이 사건의 조사 책임을 맡아,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동인들을 숙청하는 데 이용했다. 정여립이 자결한 후 그의 시신이 훼손되었을 때, 먼지가 눈에 들어가 눈물을 흘린 사람조차 정여립에 대한 동정을 보였다는 의혹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처음 고변이 이루어졌을 때, 동인들이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동인들은 선조에게 정여립이 자결하기 전까지는 반역을 꾀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정여립이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서인들은 동인들이 사건을 소극적으로 처리한다고 비난했고, 선조는 강경 서인인 정철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고 조사를 맡겼다. 곧 정여립의 조카는 좌의정 정언신, 강경파 이발 등을 포함한 동인들의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선조를 분노하게 했다. 정여립의 집에서 발견된 많은 편지들 중 일부는 왕과 그의 통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정언신은 부하들로부터 정여립과의 편지를 파기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들은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편지만 파기하고 별명으로 언급된 편지는 파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언신이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을 부인하자 선조는 "내가 눈이 없다고 생각하는가?"라며 그들이 국사를 논의한 19통의 편지를 가리키며 분노했다.[5] 정철은 정언신, 이발 등을 관대하게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동인들은 정철이 겉으로는 그들을 구하려는 척하면서 사실은 파멸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발과 그의 형제 최영경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고문이나 병으로 옥사했다. 정철은 이발에 대한 적대감이 심하여 한 번은 그에게 침을 뱉기도 했다. 이발의 80세 된 어머니와 8세 된 아들까지 죽임을 당했다. 역모 사건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1,000명이 살해되거나 유배되었다.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대규모 숙청으로 확대한 데에는 선조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사림의 분열은 왕의 권력을 강화했고, 숙청은 온건 동인(이산해, 유성룡)이 아닌 강경 동인(정여립, 이발)에게 집중되었다. 강경 동인은 사림 파벌 중 가장 급진적이었다. 반면, 이산해와 유성룡은 역모 사건에서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선조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선조는 1589년 기축옥사의 과도함을 정철의 탓으로 돌렸다.
3. 1. 정여립의 대동계
정여립은 24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목을 끌었으나, 조정에 연고가 없는 지방 출신이라 10년 동안 하위직에 머물렀다.[29] 그러나 이이(李珥)의 문하생으로 그 재주를 인정받아 서인들의 천거 속에 1583년에 예조좌랑(정6품), 이듬해에는 홍문관 수찬(정5품)에 올랐다.[30] 1584년에 이이가 사망한 뒤 서인을 탈당하고 집권 세력인 동인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서인들이 반발했고[31][32] 평판이 나빠졌다.[33] 선조 역시 그의 행위와 이당을 불쾌히 여기며 배척하자[34] 정여립은 사직하고 전주로 낙향하였다.[32][35]낙향한 정여립은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호남 지역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36] 대동계는 신분에 관계없이 양반, 중인, 노비, 승려 등도 받아들였으며,[37] 강론과 더불어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의 무술 연마도 하였다.[38] 매월 15일에는 한 곳에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38]
1587년 음력 2월, 손죽도(損竹島)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정해왜변),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출병하여 왜구를 격퇴시키기도 했다.[39] 이 일로 정여립은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호남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그의 대동계는 활동 영역을 넓혀 황해도 지역으로 조직을 확대했다.[40]
3. 2. 모반 고변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은 비밀 장계를 통해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선조에게 보고했다.[41][42] 밀고자는 안악에 사는 조구로, 정여립이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한 뒤 선조를 몰아내려 한다는 내용이었다.[11][43]선조는 즉시 삼정승, 육승지, 의금부 당상관, 도총관, 옥당 상하번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급파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하고, 춘추관 검열로 사관에 있던 정여립의 생질 이진길을 하옥시켰다. 10월 7일,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장계가 올라왔고, 17일에는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보고와 함께 그의 아들 정옥남과 관련자들이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11][44]
정여립은 이이가 죽은 후 그를 비판하면서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바꾸었고, 이이를 존경하던 선조의 미움을 샀다. 조정에서 물러난 정여립은 고향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매달 모여 친목을 다지고 학문을 연구하며 군사 훈련을 받았다. 비밀 결사가 아니었던 대동계는 지방 정부의 요청으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으며, 호남 지방(오늘날의 전라도) 전역과 그 너머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던 중 황해도 관리가 선조에게 정여립을 지도자로 하는 반역 음모가 있다고 보고했다.[1]
정여립의 모반 혐의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여립은 "세상은 함께 나누는 것이므로, 한 명의 주인만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세상은 백성의 것이고 백성이 선택한 사람이 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무계급 사회, 세습 군주제 반대, 공화주의까지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혁명적인 사상과 무장한 지지자들의 존재는 그의 적들의 주목을 끌었다. 한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정여립의 반역은 동인들조차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고문받은 추종자들의 자백과 그의 집에서 발견된 편지와 문서 외에는 증거가 없으며, 이는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정여립의 반역 혐의가 수많은 동인들을 숙청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분명하다. 정철은 서인의 영수이자 이 사건의 조사 책임을 맡아,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동인들을 숙청하는 데 이용했다. 정여립이 자결한 후 그의 시신이 훼손되었을 때, 먼지가 눈에 들어가 눈물을 흘린 사람조차 정여립에 대한 동정을 보였다는 의혹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처음 고변이 이루어졌을 때, 동인들이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동인들은 선조에게 정여립이 자결하기 전까지는 반역을 꾀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정여립이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서인들은 동인들이 사건을 소극적으로 처리한다고 비난했고, 선조는 강경 서인인 정철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고 조사를 맡겼다. 곧 정여립의 조카는 좌의정 정언신, 강경파 이발 등을 포함한 동인들의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선조를 분노하게 했다. 정여립의 집에서 발견된 많은 편지들 중 일부는 왕과 그의 통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정언신은 부하들로부터 정여립과의 편지를 파기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들은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편지만 파기하고 별명으로 언급된 편지는 파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언신이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은 것을 부인하자 선조는 "내가 눈이 없다고 생각하는가?"라며 그들이 국사를 논의한 19통의 편지를 가리키며 분노했다.[5] 정철은 정언신, 이발 등을 관대하게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동인들은 정철이 겉으로는 그들을 구하려는 척하면서 사실은 파멸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발과 그의 형제 최영경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고문이나 병으로 옥사했다. 정철은 이발에 대한 적대감이 심하여 한 번은 그에게 침을 뱉기도 했다. 이발의 80세 된 어머니와 8세 된 아들까지 죽임을 당했다. 역모 사건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1,000명이 살해되거나 유배되었다.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대규모 숙청으로 확대한 데에는 선조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사림의 분열은 왕의 권력을 강화했고, 숙청은 온건 동인(이산해, 유성룡)이 아닌 강경 동인(정여립, 이발)에게 집중되었다. 강경 동인은 사림 파벌 중 가장 급진적이었다. 반면, 이산해와 유성룡은 역모 사건에서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선조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선조는 1589년 기축옥사의 과도함을 정철의 탓으로 돌렸다.
3. 3. 기축옥사
정여립이 자결하면서 역모는 기정사실이 되었고, 그의 시신은 한양으로 이송되어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45] 선조는 정언신을 위관(委官, 사건 조사를 위해 임명된 재판관)으로 임명하여 관련자 80명을 취조하게 했으나, 정언신이 정여립의 먼 친척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송강 정철로 교체되었다.[45]서인들은 이 사건을 동인 숙청과 정권 재장악의 기회로 삼아 확대했다.[46] 위관 정철은 가혹하게 옥사(獄事)를 진행하여 '동인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47] 특히 동인 이발과 그의 노모, 어린 아들까지 심문 과정에서 사망하여 일족이 몰살되었다.
사건 초기 위관이었던 정언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48] 아들의 상소와 성혼의 권고로 죄가 감해져 유배형을 받았다. 1590년 5월 이후에는 류성룡과 이양원 등이 위관을 담당했다.
옥사는 20개월 동안 계속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1591년 5월에 끝이 났다.
3. 4. 결과
정여립이 자결하면서 역모는 기정사실이 되었고, 그의 시신은 한양으로 옮겨져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45] 선조의 명으로 정언신이 사건 조사를 위한 재판관인 위관(委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정언신이 정여립의 먼 친척이라는 점이 밝혀져 송강 정철로 교체되었다.[46] 서인들은 이 사건을 동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재장악할 기회로 삼았다. 서인 출신 위관 정철은 가혹하게 옥사(獄事)를 진행하여 '동인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7] 이발과 그의 가족을 포함한 많은 동인들이 심문 과정에서 사망했다.정언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을 받았다.[48] 1590년 5월 이후 류성룡과 이양원 등이 위관을 맡았다. 옥사는 20개월간 계속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1591년 5월에 끝났다.
이발 형제, 백유양(白惟讓) 부자, 조대중(曺大中), 유몽정(柳夢井)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다 죽었다. 영의정 노수신(盧守愼)과 우의정 정언신(鄭彦信) 등 동인의 핵심 인물들이 파직되었다. 특히 조식의 문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는데, 최영경(崔永慶)은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 옥사(獄死)했다.[49]
서산대사 휴정은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묘향산에서 끌려가 선조에게 직접 심문을 받았고, 사명당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종교인들도 고초를 겪었다.[8] 옥사로 인해 수백 명이 유배되었고,[50] 사망자는 최소 수백 명, 최대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51]
정여립의 처자와 형제는 죽임을 당했고, 정여립이 살던 집은 연못이 되었으며, 조상묘는 파헤쳐졌다.[53] 살아남은 정여립의 먼 친척들은 전주 외부로 강제 이주되었다. 금구군(金溝郡)은 전주에 편입되었고,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인재 등용에 차별을 받았다.[54] 이로 인해 호남인들은 과거 응시를 포기했고, 이후 호남 지역에서 글 읽는 소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1589년 기축옥사는 사림파 내의 갈등을 악화시켜 조선 정치의 생존 투쟁으로 변모시킨 중요한 사건이다. 동인은 정철 등 서인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한 북인과 온건한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기축옥사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무대비와 부진의 원인으로도 지목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축옥사가 호남 지역 차별로 이어졌고,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느껴진다고 비판한다.
3. 5. 억울한 죽음
조대중(曺大中)은 당시 전라도 도사로 있으면서 관내 순찰 중 전라남도 보성에서 정여립 자살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죄로 장살을 당하였다.[55] 이는 부안에서 데려온 한 관기가 이별하며 흘린 눈물이 잘못 전달되어 벌어진 일로, 한 여인의 '이별의 눈물'이 '역적의 눈물'로 오인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55]조사 김빙은 추국관(推鞫官)이 되어 추국에 참여하였는데, 원래 눈병이 있는 데다가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어 눈물을 닦은 것이, 같은 서인이었지만 김빙과 적대 관계였던 백유함(白惟咸)의 눈에 띄어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당하였다.[56] 이와 같이 정여립 사건을 빌미로 얽혀 희생당한 사람은 천여 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전라도 인사가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57]
오익창은 상소문에서 "간교한 무리들이 그 기회를 타 역적을 토벌한다는 구실을 빌어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날조를 하여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죽이고야 말았습니다."라고 지적하였다.
4. 논란
정여립 모반 사건은 그 진위와 관련하여 여러 논란이 있다.
- 타살설: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공식 기록과 달리, 선조 때 선전관 등이 정여립을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주장이다.[59] 민인백은 《토역일기》에서 정여립이 가신들을 벤 후 자결했다고 기록했지만,[58] 남하정은 《동소만록》에서 타살설을 제기했다.[59]
- 조작설: 정여립 모반 사건이 정철을 비롯한 서인 세력이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설이다.[61] 김장생의 〈송강행록〉에 따르면, 정철은 정여립의 도망을 예상했고 옥사 처리를 자청했다는 점에서 사건 조작의 주모자로 지목되기도 한다.[62][63] 송익필이 정철 배후에서 기축옥사를 조작했다는 주장도 있으며,[64][65] 선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주도했다는 설도 있다.[66]
- 역모 진위: 정여립은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같이 혈통에 따른 왕위 계승을 비판하는 혁신적인 사상을 가졌기에 역모가 사실이라는 주장이 있다.[67][68][69]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에게서도 나타나므로 모반의 근거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71]
- 증거 불충분: 정여립의 대동계가 역모 증거로 제시되지만, 서인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왜구 퇴치 협조를 요청한 점,[72][73] 대동계를 이용한 물리적 저항 흔적이 없다는 점 등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 공정성: 위관 정철은 동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로 '동인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발 가족을 몰살시킨 점은 큰 논란이다.[47] 임진왜란으로 수사 자료가 유실되어,[74] 정철의 공정성 확인은 어렵지만, 옥사 확대와 동인에 대한 가혹함에 대한 비판은 여전하다.
4. 1. 타살설
역모 고변이 나왔을 때, 동인과 서인은 정여립의 역모 사실 여부를 두고 팽팽히 맞섰다. 명재 윤증은 ‘황신(黃愼)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鄭彦信)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듯이, 고변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선전관 이용준(李用濬) 등은 ‘정여립이 자신의 서실(書室)이 있는 진안 죽도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鄭玉南)만을 잡아와 의혹이 증폭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진안현감 민인백은 《토역일기》에서 정여립이 저항하여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자는 주변 가신들을 칼로 벤 후 자결하였다고 기록하였다.[58] 그러나 훗날 남하정(南夏正:1678~1751)은 《동소만록(桐巢漫錄)》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죽이고선 자살했다고 아뢰었다.”고 기록하여 타살설을 제기했다.[59]
4. 2. 조작설
정여립 모반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설이 조선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1950년대 이후에는 당쟁을 배경으로 한 조작설이 제기되었으나 의견이 분분하다.[60] 조작설은 주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 세력이 동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이다.[61] 결과적으로 많은 동인들이 죽거나 유배를 갔고, 이산해를 얽어 넣으려고 했다는 것이다.김장생이 엮은 〈송강행록〉(松江行錄)에 따르면, 정여립 등이 모반한다는 고변이 있자 정철은 도망을 예상했고, 자진하여 옥사 처리를 담당하려 했다고 한다.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안 것과 추국관이 되기를 자청한 점을 들어 정철이 사건을 지휘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62][63]
조작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정여립이 도피할 때, 각종 수신(受信) 문서들을 집에 방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루된 점이다. 또한,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닌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갔을 것이며,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의문으로 제기된다.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 桐巢漫錄≫ 같은 야사에서는 정여립이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오자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모 조작의 주모자로 정철이 지목되기도 한다. 김장생의 〈송강행록〉에서는 정철이 정여립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고, 옥사 처리를 자청했다는 점을 들어, 정철이 정여립을 유인하고 암살을 지시한 음모의 최고 지휘자라는 주장이다. 이는 1584년 이이가 죽은 뒤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사건을 날조했다는 설로 이어진다.[64]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인물은 송익필이라는 주장도 있다. 송익필은 서인의 참모 격으로, 자신과 가족 70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64][65]
선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설도 있다. 정철은 기축옥사 이후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가 실각되었고, 사건의 주요 쟁점마다 국왕이 깊숙이 개입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66] 조선 선조의 지지 없이 서인이 독자적으로 정여립의 역모를 주장했다면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에 의해 묵살되었을 것이며, 집권 세력이 모반을 꾀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여러 조작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64]
일부 기록에 따르면 기축옥사의 기원은 중종 재위 기간 중 일어난 기묘사화와 그로 인한 두 가문 간의 앙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안당 가문이 송사련의 모함으로 몰락하고, 송익필을 포함한 송사련의 가족들이 노비로 전락하면서, 송익필이 정철과 함께 정여립 역모 사건을 조작하고 동인들을 심문했다는 것이다.
4. 3. 역모의 진위
정여립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은 당시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것이었기에 옥사를 불러왔다는 해석이 있다. 당시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가 흥할 것(木子亡 奠邑興)”이라는 도참설이 유행했고, 정여립은 왕위 계승 방식으로 선양(禪讓)을 주장했다. 또한 “천하는 공물(公物)로 일정한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며 혈통에 따른 왕위 계승을 비판하고 왕의 자격을 중시하였다.[67][68][69]정여립은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며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不事二君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혁신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과 주장으로 인해 역모가 사실이었다는 반론도 있다.[70]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정치의 도리와 의(義)를 강조한 조식의 문인이나 성리학의 주체적 해석을 강조한 서경덕의 문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모반의 근거로 볼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71]
가장 석연치 않은 점은 무술 훈련까지 한 대동계 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역모를 꾀하던 정여립이 싸워보지도 않고 자결했다는 점이다. 정여립은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고 체제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관군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역모 주모자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에 의한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의문점으로 남는다.
정여립이 반역을 꾀했는지, 아니면 서인들이 꾸민 모함이었는지에 대해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대동계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논쟁도 있다. 정여립은 "세상은 함께 나누는 것이므로, 한 명의 주인만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세상은 백성의 것이며, 백성이 선택한 사람이 왕이라고 주장했다. 정여립의 철학은 무계급 사회에 대한 열망, 세습 군주제에 대한 반대, 그리고 아마도 공화주의까지 반영했다. 이러한 혁명적인 사상과 무장한 지지자들의 존재는 그의 적들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한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정여립의 반역은 동인들조차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고문받은 추종자들의 자백과 그의 집에서 발견된 편지와 문서 외에는 증거가 없으며, 이는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4. 4. 증거 불충분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가 역모의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지만,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72][73] 대동계가 역모를 위한 조직이라면, 서인당인 남언경이 동인계로 전향한 정여립에게 녹도에 침입한 왜구 퇴치를 위한 협조를 요청한 이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72][73]서인당인 전주 부윤 남언경(1528~1594)이 알고 있을 정도의 조직이라면, 오히려 조직을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73] 정여립은 매월 공개적으로 모임을 갖고 국난에 협조했을 것이고, 만약 임진왜란을 예측했다면 그의 조직은 의병 활동에 크게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73] 또한 대동계를 이용한 물리적인 저항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의문점으로 남는다.
정여립의 철학은 무계급 사회에 대한 열망, 세습 군주제에 대한 반대, 그리고 공화주의까지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혁명적인 사상과 무장한 지지자들의 존재는 그의 적들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고문받은 추종자들의 자백과 그의 집에서 발견된 편지와 문서 외에는 증거가 없으며, 이는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4. 5. 공정성
송강 정철은 위관(委官)으로서 옥사를 주도하면서 동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옥사 확대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동인백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며, 특히 이발과 그의 가족을 몰살시킨 점은 큰 논란이 되었다.[47]정여립의 9촌 친척으로 초기 위관을 맡았던 정언신 역시 정여립과의 연루 의혹으로 유배형을 받았다.[48] 1590년 5월 이후 류성룡과 이양원 등이 위관을 이어받았으나, 20개월간 지속된 옥사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옥사로 인해 수백 명이 유배되거나 사망했으며,[50][51] 이발과 백유양의 집안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52]
임진왜란으로 인해 당시 수사 자료가 모두 유실되어,[74] 위관으로서 정철의 공정성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정철이 옥사를 확대시키고 동인에게 가혹했다는 비판은 여전히 존재한다.
5. 영향
북인에서 남인으로 당적을 옮긴 허목은 기축옥사를 겪고 서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정여립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선비들이 많다며 이들의 신원 회복을 주장했다.[55] 허목을 비롯한 북인, 남인 인사들은 서인에 대해 오랫동안 원한을 품었다.
허목은 정여립 사건 당시 호남 선비들 중 정개청을 추존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린 사람이 50명, 그 중 유배형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명, 금고된 사람이 400명에 달한다고 증언했다.[55] 그는 "정개청이 정철을 소인이라고 지탄한 한마디가 이토록 심한 화를 불렀다"며,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했다.[55]
1589년 기축옥사는 사림파 내부 갈등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켜, 조선 정치의 여러 시기를 특징짓는 생존 투쟁으로 변모시켰다. 동인은 정철과 서인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열되었고, 북인이 승리하면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기축옥사는 3년 후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보여준 준비 부족과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기축옥사가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힌 호남 지역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켰고,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비판한다. 또한,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시대를 앞선 혁명적인 사상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6. 평가 및 복원 노력
이후 동인과 그 후신인 북인, 남인이 집권했을 때 정여립의 옥사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광해군 퇴출 후 북인이 숙청당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마저 숙청당하면서 옥사, 반란으로 규정되었으며 정여립의 난이 서인에 의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75] 현재는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설, 정철이 조작했다는 설, 서인 전체가 조작에 가담했다는 설, 정여립의 혁명적인 주장이 옥사를 초래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공존하나, 정설은 없다.[75]
1589년 기축옥사는 사림파 내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어, 조선 정치의 여러 시기를 특징짓는 생존을 건 투쟁으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동인 세력은 정철과 다른 서인들을 처벌하는 문제를 놓고 강경한 북인과 온건한 남인으로 더욱 분열되었다. 북인이 승리하여 과거의 잘못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을 이어갔다. 1589년 기축옥사는 또한 3년 후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보여준 무대비와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1589년 기축옥사가 반역의 땅으로 낙인 찍힌 호남 지역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고,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도 느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한,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시대를 앞선 혁명적인 사상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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