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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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주 나씨는 송나라 예장 출신인 나부를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나주는 본래 백제의 발라현이었으나 신라 신문왕 때 금산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시대에 나주로 불리며 나주 나씨의 관향이 되었다. 나주 나씨는 고려 시대 감문위상장군을 지낸 나부를 시조로 하며, 조선 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27명을 배출했다. 주요 인물로는 대종교 창시자 나철, 독립운동가 나중소, 국회의원 나용균 등이 있다. 5대파로 분파되었으며, 충청남도 서천군에 집성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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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의 후궁인 숙의 나씨는 나주 나씨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26세에 출산 중 사망하여 경빈 박씨와의 관계 속에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그녀의 묘는 이천시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 나주 나씨 - 나웅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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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시조 나부(羅富)는 송나라 예장(豫章) 사람으로, 나라가 위급해지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송이 멸망하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전라도 여황(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 정착하였는데, 어질고(累仁) 덕(德)을 많이 베풀었으므로 호남(湖南)의 망족(望族)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시조 나부(羅富)는 송나라 예장(豫章) 사람으로 나라가 위급해지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송이 멸망함에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전라도의 여황(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 정착하였는데, 어질고(累仁) 덕(德)을 많이 베풀었으므로 호남(湖南)의 망족(望族)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세조 나득규부터 4세 나수영까지는 독자로 내려오다가 나수영이 5형제를 두었고, 이들 모두 관계에 진출하였다. 이들을 중시조로 하여 전서공파(典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금양군파(錦陽君派), 연안군파(延安君派), 직장공파(直長公派) 등 5대파로 분파되었다.
나부(羅富)는 고려에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이라는 무관직(武官職)을 지냈다. 감문위(監門衛)는 중앙군(中央軍)의 일부로서 궁성(宮城)의 수비(守備)를 담당(擔當)하는 부서이고, 상장군(上將軍)은 그 부서(部署)의 책임자로서 품계는 정삼품(正三品)으로 정의대부(正議大夫)이다. 시조의 중국 행적은 사료로 밝혀지지 않는다.
선계를 고증할 수 없어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에 오른 '''나득규'''(羅得虬)를 1세조로 한다.[7] 나부(羅富)는 중국 출신 인물로, 고려 시대에 한반도로 건너와 나주에 정착했고, 그의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나주시 대호동에 있는 성향공원에는 나주를 본관으로 하는 다른 여러 성씨들과 함께 "나주 나씨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3][4]
3. 본관
나주는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현(發羅縣)인데 신라 신문왕 5년에 금산군이라 개칭하고 성을 금성(錦城)이라 하였다. 그 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이 곳을 차지하였으나 후고구려의 궁예가 왕건을 시켜 해로로 금성을 공략하여 빼았고 나주로 고쳤으며, 고려 조에서도 그대로 나주로 불렀다.
고려 성종 14년에 나주에 절도사를 두었고 진해군(鎭海軍)이라 칭하여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해양도는 나주, 광주, 정주, 승주, 구주, 담주, 낭주 등의 주현이다. 고려 현종 원년에 나주로 거란의 난을 피하였다가 귀환한 바 있어 9년에는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나주 나씨의 관향(貫鄕)이 나주로 정해진 것은 조선 초기로 보여진다. 이는 조선조 초에 여황현이 폐현(廢縣)되고 나주에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시조인 나부(羅富)는 중국 출신 인물로, 고려 시대에 한반도로 건너와 나주에 정착했고, 그의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았다.[3][4][7]
4. 분파
금성나씨는 1767년에 나주 나씨에서 분파되었다.
5. 인물
- 나공언 :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의 아들. 전농시정(典農寺正)을 역임하고, 1381년(우왕 7) 무등산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 나득강(1378년 ~ 1444년) : 전라도 김제 출신. 조부는 나석(羅碩)이고, 부친은 조선 태조가 우의정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은 나중우(羅仲佑)이다.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1431년(세종 13)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전농시소윤(典農寺少尹),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을 거쳐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로 승진하였다.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는데, 세종이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曺判書) 겸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으로 임명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으며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 나덕헌(1573년 ~ 1640년) : 아버지는 이성현감(尼城縣監) 나사침(士忱)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635년 창성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하고 항거하여 병자호란 후 도통어사로 특진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 나무춘(1580년 ~ 1619년) :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담양의 구산사(龜山祠)에 제향되었다.
- 나위소(1583년 ~ 1667년) : 1623년(인조 1)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 임천군수, 예조정랑, 태상시정 등을 거쳐 경주부윤에 이르렀다.
- 나철 : 대종교 창시자, 독립운동가.
- 나중소(1867년 ~ 1928년) : 독립 운동가. 북로군정서 참모장. 신민부 참모부 위원장.
- 나용균(1895년 ~ 1984년) : 제6대 보건사회부 장관. 제4·5·6대 국회의원.
- 나길조(1923년 ~ 2008년) : 전 대법원 판사. 제11대 국회의원.
- 나상목(1924년 ~ 1999년) : 한국화가. 1954~ 4연속 국전 특선, 국전 추천작가/심사위원.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장 역임. 벽골제 벽천미술관 기부. 한국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동양화'라 부르지 말고 '한국화'라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 나병선(1934년 ~ ) : 제14대 국회의원. 前 한국석유공사 사장.
- 나웅배(1934년 ~ ) : 제2대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제11~14대 국회의원.
- 나혜석 : 일제강점기 화가
6. 과거 급제자
7. 항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