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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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용무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변호사, 교육자, 정치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중앙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 변론을 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동아일보 이사, 보성전문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 문교부장, 초대 대법원장, 헌법기초위원장을 지냈다.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망했다.

김용무
기본 정보
이름김용무 (金用茂)
정당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의원 선수1
출생일1889년
출생지전라남도 무안군
국적대한민국
사망일1957년(?, 논란 있음(1951년 또는 1957년)) (향년 67세)
학력주오 대학 법과
직업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
대법원장
경력그의 친척 관계로는 아우,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용현 등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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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용무는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일본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판·검사로 진출하지 않고 귀국하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 초 보성전문학교 위탁 강사로 법률학 실무를 강의했고, 1930년 10월부터 동아일보사 이사로 재직하며 강제 폐간까지 민족 언론 창달에 기여했다. 1935년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회 상임위원, 1939년 보전학회 회원을 역임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2일부터 대법원장을 지냈고, 1945년 9월부터 한민당 문교부장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총선거에 무안갑 선거구에서 민주국민당(1949-1955) 공인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1950년 9월 19일 북한으로 끌려갔다. 1951년 9월 12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1. 일제강점기 활동

김병로, 이인, 허헌 등과 형사공동연구회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 변론을 하였으며, 의열단 김상옥 사건, 신간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광주학생의거 사건 등 여러 사건들의 변호인으로 활동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1935년 교장이 되었으나 1937년 총독부에 의해 사임하게 된다.

김성수, 송진우 등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깊은 교류를 하였고, 1930년 10월부터 동아일보 이사로 재직하며 민족 언론 창달에 기여했다.

2.1.1. 항일 변론 및 교육 활동

김용무는 1923년부터 김병로, 이인, 허헌 등과 함께 형사공동연구회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 변론을 했다. 의열단 김상옥 사건, 신간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광주학생의거 사건 등에서 변호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한 모교인 보성전문학교에서 후학들을 위해 강의하고 재단이사장을 역임했다. 1935년에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본 국왕의 교육칙어를 불경스럽게 읽었다는 이유로 총독부에 의해 1937년 사임하게 되었다.

김용무는 김성수, 송진우, 김병로, 이인, 백관수, 조병옥, 장택상 등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깊은 교류를 하였다. 1930년 10월부터는 동아일보 이사로 재직하며 강제 폐간될 때까지 10년 동안 민족 언론 창달에 기여했다.

2.2.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문교부장에 선임되었고, 미군정이 시행되면서 대법원장으로 추대되어 신생 대한민국 사법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1948년 국회 반민특위 재판관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헌법기초위원장을 맡아 대한민국 민주헌법 제정의 터전을 닦았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가지 못했다.

2.2.1. 납북 및 사망

1950년 6.25 전쟁 때 피난가지 못하고 제헌의원을 지낸 동생 김용현과 함께 북으로 납북되었다. 《민족21》의 김지형 기자가 작성한 글에 따르면, 1951년 9월 12일에 사망하였다고 하나 1957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1957년 5월 18일에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3. 이력

1923년 金秉魯중국어, 李仁중국어, 許憲중국어과 함께 형사공동연구회를 발족했다. 1930년 초 보성전문학교의 위탁 강사로서 법률학 실무에 대한 강의를 했다. 1930년 10월부터 동아일보사 이사로, 강제 폐간까지 10년 동안 민족 언론 창달에 기여했다. 1935년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회 상임위원, 1939년 보전학회 회원을 역임했다. 1935년 5월 보성전문학교 제11대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1937년 5월 26일 사퇴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2일부터 미군정 시 대법원장을 지냈다. 1945년 9월부터 한민당 문교부장을 지냈고, 1948년 대한민국 헌법기초 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제2대 총선거에 무안갑 선거구에서 민주국민당 공인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한국 전쟁 중 집에 있다가 납치되어 1950년 9월 19일 북한으로 끌려갔다. 1951년 9월 12일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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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49년1.13 재보선무소속6,922표 (49.74%)2위낙선
1950년총선민주국민당10,182표 (27.73%)1위당선초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