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 (1912년)
1. 개요
김웅은 1912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군사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중일전쟁, 팔로군 활동을 거쳐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조선인민군 제1군단장, 전선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 낙동강 대공세 등을 지휘했으나, 1958년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고, 이후 1968년 복귀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78년에 다시 숙청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는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만, 공격적인 면에 비해 방어적인 면은 약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 이름 (한글) | 김웅 |
|---|---|
| 이름 (한자) | 金雄 |
| 이명 | 왕신호 (王信虎) |
| 출생 | 1912년 |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일제강점기 조선) |
| 사망 | 1960년 추정 |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소속 | 조선인민군 |
|---|---|
| 복무 기간 | 1945년–1950년 |
| 최종 계급 | 조선인민군 대장 |
| 지휘 | KPA 전선 사령관 |
| 주요 전투 | 한국 독립 운동 만주국 토벌 중국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의정부 전투 동두천 전투 포천 전투 창동 전투 미아리 전투 한강 방어선 전투 신사동-과천 전투 시흥-안양-수원 전투 대전 전투 제1차 원주 전투 제2차 원주 전투 제3차 원주 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 경주 전투 흥남 철수 유엔군의 북진 (1950년) 유엔 9월 공세 (1950년) |
| 기타 이력 | 민족보위성 부상 아시아·아프리카단결위원회 위원장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 남예멘 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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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파 -
김두봉
김두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정치인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조선독립동맹 결성,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숙청되었다. -
연안파 -
최창익
최창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북조선에서 요직을 맡았으나 종파 사건으로 숙청되었다. -
황푸 군관학교 동문 -
안춘생
안춘생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군인, 정치인으로, 광복 후 육군 장성, 국회의원, 광복회 회장, 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하며 국가에 기여했다. -
황푸 군관학교 동문 -
김광협
김광협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한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이 되었으나, 김일성 주체사상 비판으로 숙청된 인물이다. -
조선인민군 장군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조선인민군 장군 -
김정일
김정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최고지도자로, 김일성 사망 후 권력을 승계하여 조선로동당 총비서 및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통치하며 3대 세습, 핵무기 개발, 남북 정상회담 등의 사건과 경제난, 인권 탄압 등의 문제를 겪은 인물이다.
2. 경력
1912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 뤄양 군관학교, 황푸 군관학교, 난징 중앙육군군관학교(제10기)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재학 중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난징 군관학교 졸업 이후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가담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40년 10월, 팔로군 제5종대에 따라 장쑤 성 북부로 남하했다. 신사군 제3사가 창설되자 동 사의 적공부에서 정찰, 포로 심문, 파괴 공작 등을 담당했다. 1941년 10월, 항일군정대학 제5분교 교육장을 맡았다.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1대 대대장을 맡았다. 1944년에는 조선의용군 화중지대를 조직했다. 1945년 11월, 신사군구 조선의용군 화중지대장으로서 옌안과 태항산맥에서 이동해 온 의용군과 합류, 조선의용군 제1지대장이 되었다.
김웅은 1946년 3월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같은 해 7월 중앙보안간부학교 정치교장을 맡았다. 1947년 5월에는 제1사단장이 되었다. 1948년 3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제2차 당대회)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민족보위성 전투훈련국장을 역임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웅은 조선인민군 중장으로 제1군단장이었다. 개전 전날인 6월 24일 낮, 전선 시찰 중 실종으로 오인되어 김일성에게까지 보고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1군단은 황해도에 주둔하며 서부전선을 맡아 서울 방면으로 남침했다. 김웅은 낙동강 대공세 등을 지휘했다. 1950년 9월, 강건이 전사하자 후임으로 전선사령부 총참모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자 중조 연합 지휘부 부사령원에 취임했다.
1951년, 김책의 뒤를 이어 조선인민군 전선 사령관이 되었으며, 1952년 7월, 민족보위성 부상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인민군 전선사령관은 김광협으로, 중조 연합 지휘부 부사령원은 최용건으로 교체되어 군 내 실권을 잃었다. 같은 해 12월, 동해안 지휘부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휴전 후 김웅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역임하고 동유럽 제국 방문단장을 맡았다. 1955년 1월, 방호산이 군사학원 원장에서 해임될 때 "방호산에게 동정하는 파벌 분자"로 규탄받았으며, 같은 해 4월 14일 중앙총회에서 김일성은 박일우, 김웅, 방호산을 "전 중국 공산당원 소그룹"이라고 비판했다. 김일성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몇 달 후 박일우와 김웅은 연금되었다.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1958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1960년 1월, 군사 쿠데타 음모 혐의로 비밀 재판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1968년 복귀하여 아시아·아프리카단결위원회 위원장,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 남예맨 대사 등을 지냈다. 1978년에 다시 숙청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2.1. 독립운동과 중국에서의 활동 (1930년 ~ 1945년)
1912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3년부터 1937년 사이 뤄양 군관학교, 황푸 군관학교, 난징 중앙육군군관학교(제10기)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재학 중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난징 군관학교 졸업 이후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가담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40년 10월, 팔로군 제5종대에 따라 장쑤 성 북부로 남하했다. 신사군 제3사가 창설되자 동 사의 적공부에서 정찰, 포로 심문, 파괴 공작 등을 담당했다. 1941년 10월, 항일군정대학 제5분교 교육장을 맡았다.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1대 대대장을 맡았다. 1944년에는 조선의용군 화중지대를 조직했다. 1945년 11월, 신사군구 조선의용군 화중지대장으로서 옌안과 태항산맥에서 이동해 온 의용군과 합류, 조선의용군 제1지대장이 되었다.
2.2. 북한 정권 수립과 한국전쟁 (1946년 ~ 1953년)
김웅은 1946년 3월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같은 해 7월 중앙보안간부학교 정치교장을 맡았다. 1947년 5월에는 제1사단장이 되었다. 1948년 3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제2차 당대회)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민족보위성 전투훈련국장을 역임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웅은 조선인민군 중장으로 제1군단장이었다. 개전 전날인 6월 24일 낮, 전선 시찰 중 실종으로 오인되어 김일성에게까지 보고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1군단은 황해도에 주둔하며 서부전선을 맡아 서울 방면으로 남침했다. 김웅은 낙동강 대공세 등을 지휘했다. 1950년 9월, 강건이 전사하자 후임으로 전선사령부 총참모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자 중조 연합 지휘부 부사령원에 취임했다.
1951년, 김책의 뒤를 이어 조선인민군 전선 사령관이 되었으며, 1952년 7월, 민족보위성 부상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인민군 전선사령관은 김광협으로, 중조 연합 지휘부 부사령원은 최용건으로 교체되어 군 내 실권을 잃었다. 같은 해 12월, 동해안 지휘부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2.3. 한국전쟁 이후와 숙청
휴전 후 김웅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역임하고 동유럽 제국 방문단장을 맡았다. 1955년 1월, 방호산이 군사학원 원장에서 해임될 때 "방호산에게 동정하는 파벌 분자"로 규탄받았으며, 같은 해 4월 14일 중앙총회에서 김일성은 박일우, 김웅, 방호산을 "전 중국 공산당원 소그룹"이라고 비판했다. 김일성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몇 달 후 박일우와 김웅은 연금되었다.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1958년 공직에서 물러났다. 1960년 1월, 군사 쿠데타 음모 혐의로 비밀 재판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1968년 복귀하여 아시아·아프리카단결위원회 위원장,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 남예맨 대사 등을 지냈다. 1978년에 다시 숙청되었다는 주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