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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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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1950년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대한민국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구축한 방어선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유엔군은 미군을 주축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전에서 패배한 미 제24보병사단을 포함한 연합군이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며, 부산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확보하고,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겪으며 인천 상륙 작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전투는 유엔군과 북한군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전쟁 범죄 또한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유엔군의 북진과 대한민국 수호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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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무장한 군인들이 낮은 지형지물을 감시하며 참호에 앉아 있음
1950년 9월, 부산 방어선에서 낙동강을 건너 북한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제27 미군 보병 연대 유엔군 병사들.
교전 명칭 (한국어)낙동강 방어선 전투, 부산 교두보 전투
교전 명칭 (로마자 표기)Nakdonggang Bang-eo-seon Jeon-tu, Busan Gyodubo Jeon-tu
교전 명칭 (영어)Battle of Pusan Perimeter
위치부산, 대한민국
기간1950년 8월 4일 ~ 1950년 9월 18일
결과유엔의 승리
교전 세력
참가국 1

지휘관
지휘관 1 (유엔군)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정일권
신성모
조지 스트래트마이어
아서 듀이 스트러블
지휘관 2 (북한군)최용건
김책
김웅
김무정
참여 부대
부대 1 (유엔군)제8군
제5공군
제7함대
한국군
영국군
영국 해군
호주 공군
호주 해군
네덜란드 해군
캐나다 해군
프랑스 해군
뉴질랜드 해군
부대 2 (북한군)조선인민군
조선인민군 해군
조선인민군 공군
병력 규모
병력 1 (유엔군)총 141,808명 (전투 병력 92,000명)
병력 2 (북한군)98,000명 (전투 병력 70,000명)
피해 규모
피해 1 (유엔군)약 40,000명 이상
전사 4,599명, 부상 12,058명, 실종 2,701명, 포로 401명
전사 5명, 부상 17명
전차 60대
총 60,504명의 사상자
피해 2 (북한군)총 63,590명의 사상자 (포로 3,380명 포함)
T-34 전차 239대
SU-76 자주포 74문

2. 발단

왼쪽


1950년 7월 26일,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전선을 축소하기 위한 후퇴 준비 명령을 발령했다[30]

7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바탄호를 타고 대구를 방문하여 워커와 비밀 회담을 가졌다. 맥아더는 제8군을 독려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유럽 대륙에서 쫓겨났을 때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비유하여 "한국에는 덩케르크가 없다"라고 훈시하며, 후퇴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31]

7월 31일, 진주 함락으로 금강에서 소백산맥에 이르는 서남부 전선의 상황이 파악되었다. 포로 증언과 무선 도청 정보를 통해 서남부 전선에 북한군 2개 사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소재가 파악되지 않던 북한 제6사단이 한반도 남부 해안선을 따라 동진하여 마산에 육박해 있었다. 이 정보로 인해 워커는 병력 부족으로 서남부 전선 방어를 포기하고, 휘하의 미국군, 한국군에게 낙동강 동쪽 강변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했다. 각 사단에는 8월 1일에 명령이 하달되었고, 8월 2일부터 후퇴를 시작했다[32]

이러한 상황은 9월 중순 실행 예정이었던 인천 상륙 작전 계획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부대를 부산에 배치하게 되었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나 유럽에 증파될 예정이었던 부대도 한반도에 투입되었다. 미국군의 전쟁 지도 계획은 크게 변경되었다[33]

미국 본토로부터의 증원 부대가 7월 31일부터 잇따라 부산항에 도착할 예정이었고, 증원 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는 것과 북한군이 부산을 함락시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일지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2. 1. 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유엔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병력을 투입했다.[6]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지역의 미군 병력은 약화된 상태였고,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제8군 예하 제24보병사단이 가장 먼저 투입되었다. 제24보병사단은 병력과 장비 부족에 시달렸지만, 북한군의 공세를 지연시키기 위해 오산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대전 전투 등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다.[6]

8월에 이르는 인민군의 남침 경과


특히, 대전은 서울과 부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 수도였다. 미군과 한국군은 대전을 중심으로 북한군에 맞섰으나, 7월 20일 북한군의 포위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한국 정부는 대구로 후퇴했다. 대전 전투에서 미 제24보병사단은 병력의 45%(7,305명), 장비의 60%를 잃었으며, 사단장 딘 소장포로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6]

2. 2. 북한군 진공

6.25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은 수적, 물적 우세를 바탕으로 빠르게 남하했다. 국제 연합은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북한군의 침공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지역의 미군 병력은 약화된 상태였고, 일본에 주둔하던 미국 제8군 소속 제24보병사단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제24보병사단은 북한군의 공세를 지연시키는 임무를 맡았으나, 오산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천안 전투, 평택 전투를 거쳐 대전 전투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6]

북한군의 파상공세를 보여주는 지도. 낙동강 방어선은 한반도의 동남쪽 가장자리이다.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한 후, 낙동강 방어선을 포위하기 위해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했다. 특히, 조선인민군 4사단과 6사단은 유엔군의 왼쪽 측면을 포위하며 빠르게 진격하여 미군과 한국군을 격퇴했다. 동쪽에서는 89,000명의 북한군이 6개 방향으로 공격하여 한국군을 기습적으로 섬멸하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한국군은 조직력과 장비 부족에도 불구하고 영덕-강구 전투, 안동 전투 등에서 저항하며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노력했다.

서쪽에서는 미군이 계속해서 패배하며 후퇴했다. 29보병사단은 하동 전투에서 섬멸되어 부산으로 가는 길이 열렸고, 진주가 함락되면서 19보병연대가 후퇴해야 했다. 미군은 노치 전투에서 북한군을 격퇴했지만, 큰 피해를 입은 북한군은 재정비를 위해 후퇴했고, 이는 양측 모두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3. 서막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유엔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은 대한 해협에서 동해까지 약 약 225.31km에 걸쳐 뻗어 있었다.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이 형성되었는데, 대구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진주, 김해 일대를 흐르는 남강 지역은 방어선 내부에 포함되었다. 북쪽 경계는 왜관안동에서 영덕까지 이어지는 태백산맥 위의 불규칙적인 선이었다.

김해평야포항-대구 사이의 협곡 (영천, 경산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었다. 포항 북동쪽 영역은 이동이 매우 어려워, 유엔군은 부산 부근 방어선을 동해 남쪽과 동쪽을 따라 설치하고, 낙동강을 서쪽, 산간 지역을 북쪽으로 삼아 자연적인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형은 유엔군 간의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 지역은 여름철 고온과 신선한 채소 및 깨끗한 식수 공급 부족으로 인해 병사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1950년 여름은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정상적인 강수량보다 훨씬 적은 비가 내렸고, 고온 건조한 기후는 많은 병사들, 특히 미군 병력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127]



대구 인근의 새들 능선, 유엔군이 방어한 부산 교두보의 진지 중 하나.


보급품을 전선으로 수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주요 서울-부산 철도 및 도로

3. 1. 방어선의 영역

유엔군은 1950년 7월부터 8월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방어선은 대한 해협에서 동해까지 약 약 225.31km에 걸쳐 뻗어 있었다.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이 형성되었는데, 대구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진주, 김해 일대를 흐르는 남강 지역은 방어선 내부에 포함되었다. 북쪽 경계는 왜관과 안동에서 영덕까지 이어지는 태백산맥 위의 불규칙적인 선이었다.

김해평야와 포항-대구 사이의 협곡 (영천, 경산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었다. 포항 북동쪽 영역은 이동이 매우 어려워, 유엔군은 부산 부근 방어선을 동해 남쪽과 동쪽을 따라 설치하고, 낙동강을 서쪽, 산간 지역을 북쪽으로 삼아 자연적인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형은 유엔군 간의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이 지역은 여름철 고온과 신선한 채소 및 깨끗한 식수 공급 부족으로 인해 병사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1950년 여름은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정상적인 강수량보다 훨씬 적은 비가 내렸고, 고온 건조한 기후는 많은 병사들, 특히 미군 병력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127]

3. 2. 참여 병력

북한군은 소련군 모델을 기반으로 한 지상 기반 네트워크를 통해 물자를 수송했으며, 주로 철도를 이용했다. 병력은 도보, 트럭,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개별 부대로 운반했다. 북한은 대형 활주로와 항공기가 부족하여 최소한의 공중 재보급만 실시했고, 대부분의 핵심 물품은 중국에서 수입했다.[11] 해상 수송 또한 효과적이지 못했는데, 원산과 함흥 항구는 대규모 물류 이동을 지원하기에 부족했고, 인천 항구는 항해가 어려웠다.[12]

7월 중순부터 유엔 극동 공군 폭격 사령부는 북한의 전략적 물류 목표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원산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를 철도와 해상으로 연결하는 통신 중심지였기 때문에 중요한 목표였다.[13] 7월 27일, FEAF는 철도 차단 계획을 준비하여 북한에서 전투 지역으로의 병력 및 물자 흐름을 차단하려 했다.[14] 평양 철도 교량 및 조차장, 함흥 교량 및 조차장, 한강 철도 교량이 주요 목표였다.[15] 8월 4일, FEAF는 B-29 슈퍼포트리스를 사용하여 37° 북위 북쪽의 주요 교량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8월 15일에는 경폭격기와 전투 폭격기가 합류했다.[16]

미국 항공기가 로켓과 네이팜탄으로 북한 열차를 공격, 1950년.


제5공군의 제해권으로 인해 북한군은 야간에 보급품을 이동해야 했다.[17] 철도에 의존하여 보급품을 최전선으로 이동시켰지만, 트럭 부족으로 인해 수레와 짐승에 의존해야 했다.[18] 유엔 공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통신선을 통해 최전선에 대한 수송을 유지할 수 있었다.[19] 탄약과 연료는 다른 보급품보다 우선시되었지만, 식량은 하루 한두 끼만 제공되었다.[20] 대부분의 부대는 한국 민간인에게 의존하여 식량과 물자를 찾아야 했다.[21] 9월 1일 무렵, 최전선 북한군의 식량 상황은 매우 심각하여 병사들의 체력이 저하되고 전투 효율성이 감소했다.[22]

물류의 비효율성은 북한군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초기 성공 이후 패배를 초래했다.[23] 북한군의 통신 및 보급은 대규모 공중, 장갑, 포병 공격에 직면하여 지속적인 공격을 지원할 수 없었다.[24]

유엔군은 1950년 7월과 8월에 걸쳐 부산 항구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방어선은 대한 해협에서 동해까지 뻗어 있었으며, 서쪽 경계는 낙동강을 따라, 북쪽 경계는 왜관읍안동시 위쪽에서 영덕읍까지 이어졌다.[25] 남쪽의 낙동강 삼각주와 대구포항 사이의 계곡을 제외하고는 지형이 매우 험준하고 산악 지형이었다. 특히 포항시 북동쪽은 이동이 극도로 어려웠다. 유엔군은 지형을 천연 방어선으로 활용했지만, 험준한 지형은 통신을 어렵게 만들었다.[26]

이 지역의 병력은 더위와 관련된 사상자도 겪었다. 1950년 여름 한국은 심각한 가뭄을 겪었고, 덥고 건조한 날씨는 많은 열사병 및 과로 관련 사상자를 발생시켰다.[27]

8월 1일, 제8군은 모든 유엔 지상군에게 낙동강 동쪽으로 철수하라는 작전 지시를 내렸다.[28] 유엔 부대는 주 저항선을 구축하여 부산 교두보를 형성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막는 동안 병력을 증강하여 반격을 시작하려 했다.[29] 미군은 철수 과정에서 낙동강 위의 모든 다리를 파괴했다. 한 다리에서는 난민들이 계속 다리를 건너려 하여 결국 다리를 폭파해야 했고, 수백 명의 난민이 사망했다.[30]

유엔 방어 계획의 핵심은 부산 항을 지키는 것이었다. 부산에는 미국 전투기 및 수송기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장이 있었다.[31] 제2차 세계 대전의 레드 볼 익스프레스와 유사한 시스템이 부산에서 최전선까지 보급품을 운송하는 데 사용되었다.[32] 매달 수백 척의 배가 부산에 도착했다.[33] 7월 24일, 유엔은 일본 도쿄에 맥아더 휘하의 최고 사령부를 설치했다.[34]

북한군 부대는 교두보 내에 네 가지 가능한 경로를 가지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마산을 통과하는 길, 낙동강 돌출부를 지나 밀양의 철도 노선으로 들어가는 길, 북쪽의 대구로 들어가는 길, 동쪽 회랑의 경주를 통과하는 길이었다.[35] 북한군은 8월에 대규모 공세를 펼쳐 교두보의 네 곳 모두를 동시에 공격했다.[36] 그 결과, 부산 교두보 전투는 교두보 전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대규모 전투였다.[37]

진주 방어는 중요시되어 M26 퍼싱 3대가 배치되었으나, 기관 불량으로 유기되었다.[26]

3. 2. 1. 육군 병력

조선인민군(북한군)은 10개 사단의 기계화된 제병 연합 부대로 조직되었다. 7월에는 약 9만 명의 잘 훈련된 병력과 다수의 T-34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방어전으로 인해 58,000명의 병력 손실과 다수의 전차를 잃었다.[1]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북한군은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을 징병하여 병력을 충원하였으며, 징병군의 대다수는 북한군이 점령한 남한 지역에서 왔다.[2] 부산 부근 전투에서 북한군은 13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기계화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1]

미국 해병대가 부산항에 도착한 후 트럭을 타고 전선으로 이동 중이다.


유엔군은 미국 제8군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제8군은 대구에 본부를 두고 유엔군의 사령부 역할을 맡았다.[3] 휘하에는 3개의 미군 사단이 있었는데, 제24보병사단은 7월 초에, 제1기병사단제25보병사단은 7월 14일부터 18일 사이에 한반도에 도착했다.[4] 이들은 낙동강을 따라 방어선의 서쪽 지역을 점령했다.[1] 대한민국 국군은 58,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5] 2개의 군단과 5개의 사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1군단은 제8보병사단과 수도사단을, 제2군단제1보병사단제6보병사단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재편성된 제3보병사단은 대한민국 육군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었다.[6] 당시 유엔군은 잦은 패배로 인해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7] 미군은 7월에만 6,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대한민국 국군은 70,000명 정도의 병력을 잃었다.[8]

양측의 병력 수는 정확히 추정하기 어려웠다. 북한군은 8월 5일 기준으로 약 70,000명의 전투 병력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싸우고 있었으며, 대부분 전투력이 약했다.[9] 약 3,000명 미만이 기계화 병력이었고, 약 40대 정도의 T-34 전차가 전선에 있었는데, 이는 전쟁터에서 큰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다.[10]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8월 4일 기준으로 대한민국에 유엔군 병력 141,808명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 중 47,000명이 미 육군 병력이었고, 나머지 45,000명이 대한민국 국군 전투 병력이었다. 따라서 유엔 육상 전투 병력은 북한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10]

3. 2. 2. 해군 병력

US Navy|미국 해군영어 제7함대가 전반적인 해군 병력 지휘를 맡았으며, 대부분의 해군 병력 또한 미국에서 왔다.[14] 영국 해군 또한 항공모함과 몇몇 순양함을 포함한 소규모 해군 기동 부대를 지원했다.[14]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도 함대를 제공했고, 네덜란드 또한 영국과 함께 함대를 파견했다.[15] 유엔 해군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미국 공군과 함께 육상 병력에 대한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했다.[13]

3. 2. 3. 증원

1950년 9월, 전투가 확산되자 미국과 다른 국가로부터 더 많은 유엔군 병력이 도착했다.[1] 제2보병사단, 제5연대전투단,[2] 제1임시해병여단, 영국 제27보병여단이 부산에 도착하여 유엔군의 전력을 강화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병력과 장비, 800대의 탱크도 들어왔다.[3][4]

4. 수송

윌리엄 B. 킨 미 제25보병사단장의 이름을 딴 ''킨 기동 부대''는 제25사단, 제27보병연대, 제5연대 전투단, 제1임시 해병 여단 등 약 20,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마산 근처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진주 고개를 점령하고 남강까지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 공세는 제2보병사단 전체와 3개 이상의 미군 전차 대대의 도착에 의존했다.

''킨 기동 부대''는 8월 7일 공격을 시작하여 마산에서 이동했지만, 조선인민군의 동시 공격과 조우전으로 이어졌다. 이 지역에서 3일 동안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8월 9일까지 ''킨 기동 부대''는 진주를 탈환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8월 12일에 제1임시 해병 여단은 다른 지역에 재배치하기 위해 부대에서 철수했다. ''킨 기동 부대''는 계속 전진하여 천동리 주변 지역을 점령했고, 제8군은 여러 부대에 낙동강 돌출부, 특히 대구 등 전선의 다른 지역에 재배치할 것을 요청했다.

전차가 언덕을 올라가고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다
미군 전차가 마산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다


제25보병사단의 사단 수송 부대는 8월 10일에서 11일 밤 사이 계곡을 통해 이동하려다 진흙탕에 빠졌고, 다음 날 아침 조선인민군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49] 혼란 속에서 조선인민군 장갑차는 바리케이드를 돌파하여 미군 지원 포병 진지를 공격했고, 제555 및 제90 야전 포병 대대 대부분과 장비가 파괴되었다. 조선인민군과 미군 장갑차 모두 현장으로 몰려들었고, 미 해병대 항공기가 엄호를 제공했지만, 양측 모두 큰 사상자를 내고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49]

4. 1. 유엔군

1950년 7월 1일, 미국 극동 사령부는 미국 제8군에게 대한민국에서의 미국[41]과 대한민국 군대를 포함한 UN 병력의 병참을 담당하도록 지시했다. 미국과 대한민국 군대에 대한 지원은 미국 본토와 일본으로부터 왔다.[42] 대한민국 군대에 대한 재정비 과정에서 유엔 병력이 7월에 겪고 있던 주요한 병참 문제가 드러났다.[43] 가장 큰 문제는 탄약 부족이었다. 병참 상황은 점차 개선되고 있었지만, 탄약은 대부분의 전장에서 부족했다.[44] 지원품 소비는 병력마다 달랐고, 초기 계획 부족으로 유엔 군수 담당자들은 상황에 맞춰 일을 처리해야 했다.

M4 셔먼 전차가 캘리포니아주오클랜드 항구에서 수송함의 짐칸으로 이동하는 모습 (1950년 부산행).


해상 재보급의 대부분은 미 육군 및 해군의 수송선에서 이루어졌다.[43] 배에 대한 엄청난 수요는 복무 중인 군함을 늘리기 위해 유엔군이 비축 함대에서 배를 가져오거나 개인용 배를 전세 내서 얻게 하였다.[44] 국제연합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발달된 항구가 한반도 남동쪽 끝인 부산이었기 때문에 해상 수송에서 주요한 이익을 얻었다. 부산은 큰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갑문 시설이 있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항구였다.[131] 매우 중요한 물품의 긴급 공중 수송이 미국으로부터 극동 지역까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태평양 군단의 군 공수 서비스(MATS)는 전쟁 직후 급속히 확장되었다.[41] 극동에서 이용 가능한 매우 제한된 보급품에 대한 부담과 더불어 전투기와 수송기 때문에 전쟁 초에 항공유 소비가 엄청났는데, 그것이 심각한 수송 문제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이다.[42] 일본인이 건설한 부산 출발 철도 시설도 수송에 도움을 주었다.[43] 철도는 대한민국에서 유엔의 수송 체계 기반이었다.[44] 한국의 차량 도로는 미국이나 유럽의 기준에서 부차적인 유형의 수송 체계였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보한 유엔군은 엄청난 보급품을 쏟아부었다. 7월 중에 양륙된 물자는 31만 용적 톤이었고, 7월 하순에 부산에 입항한 화물선은 230척(1일 평균 16척)이었다. 긴급하게 필요해진 M20 슈퍼 바주카(3.5인치 로켓 런처)와 공군용 신형 로켓탄 등은 미국 본토에서 공수되었다.[42]

다만, 제8군이 개전부터 부산 교두보 확보까지 소비한 탄약은 일본 방위용으로 일본 본토에 비축해둔 것이었고, 잇따른 격전으로 인해 9월 상순에는 1문당 1일 사용량이 25발에서 50발로 제한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1문당 1일 보급량이 적으면 100발, 많으면 200발이었던 미군에게 이 보급량은 너무 적었다. 미국 본토에서 오는 탄약선이 부산에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말경부터였고, 탄약 부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43][44]

4. 2. 북한군

북한의 수송 책임은 최용건이 이끄는 북한 국방부와 후방 시설부로 나뉘어 있었다. 북한 국방부는 철도 수송 및 군수 지원품 조달을, 후방 시설부는 도로 수송을 담당했다. 북한군은 유엔군보다 빈약하고 적은 수송 체계에 의존했다. 이러한 수송망의 한계는 전방 병력에게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했다. 소련식 효율적 모델에 기반한 육상 수송망은 철도를 우선시했지만, 병력들은 물품을 직접 걷거나, 트럭, 마차, 손수레를 이용해 운반해야 했다. 이러한 방식은 덜 효율적이고 전선까지 이동하는 데 너무 느려 지속적인 불이익을 야기했다.

7월 중순, 유엔 극동 사령부 폭격기 사령부는 북한 수송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전역을 시작했다.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동해안의 원산으로, 시베리아블라디보스토크와 철도 및 해로로 연결되는 중요한 수송 중심지였다. 7월 27일, 극동 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철도 차단 계획을 준비하여 북한군 병력 및 물자 흐름을 끊고자 했다. 평양의 대동강 철교 및 조차장, 함흥 다리 및 조차장, 서울 근처 한강철교 파괴 등이 주요 목표였다. 8월 4일, B-29 폭격기의 차단 공격이 시작되었고, 8월 15일에는 경폭격기와 전폭기가 작전에 참여했다. 북한군은 항공기나 활주로 부족으로 공중 재보급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대부분의 물자를 중국에서 수입했다. 해상 수송 역시 원산항이나 함흥(정확히는 흥남) 항구가 낙후되었고, 남쪽 항구들은 폭이 좁아 활용이 어려웠다.

제5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북한군은 밤에만 보급품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트럭 부족으로 철도에 의존했지만, 개별 병력에게 물자를 전달하기는 어려웠고, 손수레나 마차에 의존해야 했다. 지속적인 공습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긴 통신 및 수송 체계를 통해 전선에 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다. 항공유나 휘발유는 계속 보급되었지만, 전투식량은 하루 1~2회분으로 부족했다. 대부분의 병력은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떨어져 밤에 음식과 보급품을 찾아야 했다. 9월 1일, 식량 사정 악화로 병사들의 전투 효율성이 저하되었다. 수송 체계 비효율성은 북한군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전투 병력의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큰 패배를 초래했다. 통신 및 보급 문제는 중요한 순간에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지원에 차질을 빚게 했다.

북한군은 유엔군의 제공권 아래에서 1개월여 동안 300km에 달하는 공세로 큰 손실을 입었다. 개전 당시 150대였던 전차는 40대 이하로 줄었고, 병력 손실은 7월 초까지 5만 8천 명에 달했다. [45] 북한군 점령지에서는 강제적인 지원과 길거리 연행, 가택 수색에 의한 강제 징집이 이루어져 추정 6만 명에서 12만 명이 병사로 전선에 투입되었다.[46] 서울에서는 1만 6천 명의 학생이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47]

한반도 북쪽에서 오는 교통망은 서울에 한 번 집중되어 지나가는 형태로 좁아져 있었고, 서울에서 방사형으로 남하했다. 유엔군은 이 보급로에 격렬한 저지 공격을 가했다. 제공권을 확보한 유엔군은 북한군의 보급을 방해하기 위해 한반도의 도로·철도망에 폭격을 반복했고, 다수의 교량이 파괴되었다. 8월 2일부터는 38선 이북에 대한 폭격도 시작되었고, 8월 말까지 주요 도로의 80%를 파괴했다.[48]

그러나 항공 공격에는 한계가 있어 북한군의 보급을 완전히 저지할 수 없었다. 북한군은 점령지에서 대량으로 강제 동원한 시민 30만 명을 노역 인부로 사용하여 인해전술로 보급품을 운반했고, 소화기 탄약 등 경량품의 보급에는 충분했다. 야간에는 열차 운행과 자동차 수송도 이루어져 최소한의 보급은 유지되었고, 상당수의 전차와 야포가 보급되었다. 하지만 식량은 작전 지역이 산간 지역에 들어가면서 현지 조달이 어려워졌고, 작전 시기도 곡물 수확기 사이여서 쌀도 입수할 수 없었다. 병사에게의 식량 공급은 각 사단 모두 2분의 1에서 3분의 1까지 공급량이 감소했다. 때마침 맹서의 영향도 있어, 병사의 체력은 한계까지 저하되었다.[49] 북한 본토에 대해서는 B-26와 B-29에 의한 전략 폭격이 조차장이나 정유소 등에 가해졌고, 북한의 전쟁 수행 능력을 파괴했다.[50]

5. 8월 공세

제1해병임시여단은 "힐 전술부대"와 함께 8월 17일 클로버리프 고지와 오봉니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51] 처음에는 조선인민군(KPA)의 끈질긴 방어로 진격이 막혔으나, 이후 조선인민군의 반격은 실패했다. 8월 18일 밤, 조선인민군 제4사단은 거의 전멸했고 오봉니와 클로버리프 고지는 미군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다. 다음 날, 제4사단의 잔여 병력은 강 건너편으로 완전히 철수하면서 다수의 포병 무기와 장비를 남겨두었고, 이는 미군에 의해 사용되었다.[52]

한편, 낙동강 동쪽 강변에서는 게릴라 활동이 빈번해져 주민들이 강제로 철수당했다. 북한에서 탈출해 온 피난민들은 낙동강 서쪽 강변에 발이 묶였지만, 부산 교두보 안에는 70만 명에서 80만 명의 피난민이 있었다. 부산 교두보 안에서는 통신 시설 파괴, 보급로 습격, 후방 지휘소 공격 등 게릴라 활동이 벌어졌고, 마산에서는 미군 제25보병사단의 킨 소장이 저격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개전 이전부터 부산 북방의 산악 지대에서 활동하던 게릴라 외에도, 제766부대 등 게릴라 훈련을 받은 특공대, 북한 각 사단이 파견한 유격대 등이 침투했다. 유엔군은 그 총수를 3만 명으로 추정했지만 실체는 불분명했다. 유엔군은 8월 상순부터 9월 중순에 걸쳐 약 4,000명의 게릴라를 사살했지만, 부산 교두보 내의 피난민 문제와 게릴라의 선동에 의한 파업과 폭동 등에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53]

이러한 게릴라들로 인해 미군은 긴장했지만, 북한 사투리를 한국인들이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이 관할하는 지역에서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5. 1. 방어선과 방어 목표

1950년 8월 1일, 미 제8군은 낙동강 동쪽으로 철수하며 대한민국 내 모든 유엔군 육상 병력에 작전 지시를 내렸다.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주요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미군이 반격을 준비하는 동안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고자 했다. 이는 유엔군이 전쟁 초기 지속적인 패퇴를 겪은 후의 최후 방어선으로, 더 이상의 후퇴는 제8군에 심각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었다.[110]

부산항은 미국 및 일본으로부터 중요한 육상 보급품과 새로운 병력이 도착하는 곳이었다.[108] 또한 부산에는 미군 전투 병력 및 화물기가 더 많은 보급품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공항도 있었다. 부산항의 크레인 시설은 중무기 및 중량 화물 처리를 용이하게 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레드볼 익스프레스와 유사한 체계로 부산에서 전선까지 보급품을 신속하게 이동시켰다. 매달 수백 척의 배가 부산에 도착했으며, 7월에는 230척이 도착했고 이후 꾸준히 증가했다.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올 수 있는 주요 경로는 크게 네 가지였다.[120]

경로설명
남쪽 경로마산을 통과하여 남강낙동강을 건너는 방법
낙동강 돌출부 경로밀양의 철도(경부선)를 이용하는 방법
대구 경로대구를 통과하는 방법
동쪽 협곡 경로경주를 통과하는 방법



북한군은 이 네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8월 내내 대규모 공세를 지속했다.

5. 2. 반격 (마산 전투)

월턴 워커 중장이 이끄는 제8군은 8월 동안 첫 반격을 준비했으며, 이는 마산 지역의 미군 병력에 의한 공격으로 북한군에게 타격을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8월 중순 금강 일대에서 큰 공세를 받은 이후였다. 워커의 목표 중 하나는 남쪽으로 향하는 북한군을 우회시켜 대구 지역에서 예상되는 적의 공격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8월 6일, 제8군은 미 제25보병사단 사령관인 윌리엄 B. 킨의 이름을 딴 킨 특수부대에 의한 공격 작전 지시를 내렸다. 킨 특수부대는 제25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육군 포병대대, 제5전투여단, 제1임시해병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2만 명이었다. 공격 계획에는 마산 근처를 고수하며 서쪽으로 이동, 진주로 가는 길을 포위하고 남강을 확보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제2보병사단 전체가 도착하는 것과 미군 전차가 있는 3개의 기갑여단에 의존했다.[127]

킨 특수부대는 8월 7일 공격을 시작해 마산을 떠났다.[128] 도시 북쪽 통로이자 전초전의 장소였던 마산 협로에서 제35보병사단이 500명의 북한군 보병을 만나 격퇴했다. 특수부대는 반송리를 향해 진격하며 또 다른 북한군 350명을 사살하고 북한 제6사단의 본부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나머지 미군의 진격은 적군의 저항으로 늦어졌다. 킨 특수부대는 지동리 지역을 압박했는데, 혼란스러운 전투 속에서 분산된 병력은 공습과 보급품에 의존해야 했다. 킨의 공격은 북한군 제6사단과 직접 충돌하면서 붕괴되었다.[127]

거센 공세는 3일 동안 지속되었다. 8월 9일, 킨 특수부대는 진주에 거의 도달했다. 공군의 지원 하에, 미군은 북한군의 저항이 거셌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빠르게 진전했다.[129] 8월 10일, 해병대는 진전을 시작하여[24] 북한군 제105기갑사단의 83기계화여단을 발견했다. 제1해병공군의 F4U 콜세어들이 후퇴하는 북한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200명을 사살하고, 100대의 전투 차량을 격파했다.[130] 그러나 제1임시해병여단은 8월 12일부터 방어선 인근으로 재배치되기 위해 물러났다.[127] 킨 특수부대는 지속적으로 해군 및 육군 포병의 협조 하에 진격을 거듭하여 지동리 부근의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제8군은 낙동강 돌출부를 중심으로 한 대구 중심으로 킨 특수부대의 병력을 재배치할 것을 요구했다.

25보병사단의 유지여단이 협곡을 통해 이동하려는 시도는 8월 10일부터 11일 사이의 밤에 이루어졌고, 고지에서 미군을 몰아낸 북한군으로부터 아침에 공격을 받았다. 혼란 속에서 북한군은 차단로를 돌파할 수 있었고, 미국 지원포병 지점을 공격할 수 있었다. 기습 공격은 555 및 90 야전포병여단을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그들의 물품 다수를 노획했다. 북한군과 미군 병력 모두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미 해병대 공군은 계속 엄호를 하고 있었지만, 양측 모두 서로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미군은 북한군에게 빼앗긴 지역을 탈환하는 데 실패했고, 수많은 손실이 탈환 시도에서 동반되었다.[131] 이후 조사에 따르면 제555야전포병대대에서 55명의 사망자가, 제90야전포병대대에서 2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왔고, 이들은 다시 미군 지대로 회복되었을 때 참수된 것으로 나타났다. 킨 특수부대는 마산으로 후퇴하여 8월 14일 그들의 소득을 회복할 수 없었으며, 공세를 시작한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킨 특수부대는 북쪽에서 북한군 병력을 우회시키는 데 실패했으며, 진주로 가는 길에 도달하는 것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25보병사단의 사기를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131] 북한군 제6사단은 3천 명에서 4천 명으로 줄어들었고, 안동으로부터의 대한민국 징집병으로 보충해야 했다. 그 지역에서의 전투는 몇 달 동안 더 지속되었다.

5. 3. 낙동강 돌출부 전투

낙동강 돌출부는 낙동강이 영산 서쪽에서 반원 형태로 굽이쳐 흐르는 지역으로, '낙동강 벌지(Naktong Bulge)'라고도 불렸다. 이 지역은 미국 제24보병사단이 방어를 담당했는데, 연이은 전투로 전력이 약화된 상태였다.[60] 북한군 제4사단(이권무 소장)은 이 지역을 통해 진격하려 했다. 제24보병사단은 낙동강 하안 8킬로미터 범위의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켜 많은 피난민이 발생했다.[60]

8월 6일 새벽, 북한군 제4사단은 영산으로 향하는 기습 도하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고, 병력 부족과 무더위로 인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미 제24보병사단은 제9연대[61](힐 대령)를 증원받아 반격했지만 실패했고, 북한군은 이틀 만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8월 10일에는 중기관총과 유탄포 등 중장비를 도하시켜 영산은 위기에 처했다.

미군은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아 제9연대장 힐 대령을 중심으로 '힐 지대'를 편성했다. 8월 13일, 예비 병력이었던 제27연대가 투입되어 영산 동쪽 고지를 탈환하고 주변을 소탕하면서 제24보병사단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이후 제27연대는 대구로 이동하여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었다.

계속된 전투로 제24보병사단은 전력이 20%까지 감소했고, 8월 15일부터 방어 전투로 전환했다. 북한군 제4사단 역시 도하 지점에 대한 공습과 포격으로 보급이 지연되어 사기와 체력이 크게 저하되었다.[62]

미군은 제5해병연대(말레이 중령)를 투입했고, 8월 18일 북한군은 낙동강 서안으로 밀려났다. 북한군 제4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이후 낙동강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62]

5. 4. 동부 협곡 (포항 전투)

대한민국 국군의 동부 회랑 전선은 지형 때문에 이동이 극도로 어려웠다. 대구에서 동쪽으로 약 80.47km 떨어진 주요 도로는 한국 동해안의 포항으로 이어졌다.[7] 이 노선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주요 남북 도로는 안동에서 출발하여 대구와 포항 중간 지점인 영천을 거쳐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이 노선을 관통하는 또 다른 자연적 진입로는 포항에서 서쪽으로 약 19.31km 떨어진 안강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곳은 대구로 물자를 수송하는 전진 기지였던 주요 철도 허브인 경주로 이어지는 자연적인 험준한 지형의 계곡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7] 월턴 워커는 지형이 의미 있는 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판단하여 이 지역을 대대적으로 증원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신 수송 경로에서 증원 병력을 투입하고 포항 남쪽에 위치한 영일 비행장에서 공중 지원을 받아 공격에 대응하는 방식을 선호했다.[7]

A map showing troops moving north and destroying opposing formations there
8월 11일부터 20일까지 한국군의 움직임.


한국군이 지키는 동북부 전선에서는 동해안의 영덕을 방어하는 한국군 제3사단(김석원 준장, 8월 6일 부임)[67]청송을 지키는 수도사단(백인엽 대령)[68] 사이에 병력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된 험준한 산악 지대가 있었다.

8월 8일,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이 이곳으로 30킬로미터 침투하여 동북부 전선에 큰 구멍을 냈다. 조선인민군은 기계, 흥해에 도달하여 영덕의 남쪽을 차단하고, 한국군 제3사단은 고립되었다. 제8군은 이 위기에 대응하여 미국 제9연대 제3대대를 기간으로 브래들리 지대를 편성하여 포항의 남쪽에서 연일비행장 확보를 명령했다.

연일비행장에는 미군 제5공군이 F-51 전투폭격기 2개 중대를 전개하고 있었지만, 비행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다른 곳으로 전용되었다. 이 비행장을 잃는 것은 대지상 지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인민군이 연일비행장에 접근했기 때문에 F-51은 야간에 일본으로 대피했다. 연일의 F-51은 이륙한 후, 주 다리를 접을 틈도 없이 근거리에서 반복적인 지원 공격을 했다. 맥아더의 중지 권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5공군은 8월 13일에 규슈쓰이키 기지로 비행대를 피난시켰다.[69]

8월 13일, 수도사단에 의한 역습이 시작되어 18일에는 기계를 탈환했다. 포항에는 미군에 의해 철저한 함포 사격과 폭격이 가해졌다. 8월 13일에 병력 630명으로 포항에 침입한 조선인민군 제12사단 제1연대 제2대대가, 8월 18일에는 병력 20명까지 감소했을 정도로, 폐허가 된 시가지는, 대구에서 차출된 한국군 민병대와 브래들리 지대에 의해 8월 18일에 무혈 탈환되었다.[70][71]

포항에서 기계의 조선인민군은 일소되었고, 전선은 정리되었다. 브래들리 지대는 8월 20일에 해산되었다. 연일비행장에는 미국 제9연대 제3대대가 경비 부대로 남았고, 민병대는 대구로 이동했다.[72]

5. 5. 대구 전투

부산 교두보의 중심에 위치한 대구낙동강 계곡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북한군이 대규모로 진격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대구는 주요 교통 요충지이자 부산을 제외하고 UN군이 확보하고 있는 마지막 주요 도시였다.[7] 남쪽에서 북쪽으로, 미 제1기병사단, 대한민국 제1사단, 제2군단 제6사단이 대구를 방어했다. 미 제1기병사단은 제5기병연대와 제8기병연대가 강을 따라 24km의 방어선을 유지했고, 제7기병연대는 예비대로 배치되었다.[7]

북한군 5개 사단이 대구에서 UN군에 맞서 집결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10사단,[7] 제3사단, 제15사단, 제13사단,[7] 그리고 제1사단이 뚝송동에서 왜관을 거쳐 군위까지 이어지는 전선을 점령했다.[7] 북한군은 상주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낙동강 계곡의 자연적인 통로를 주 공격 축으로 삼을 계획이었다.[7] 제105기갑사단의 일부 부대도 이 공격을 지원했다.[7]

8월 7일, 북한군 제13사단은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약 64.37km 떨어진 낙동리를 건넜다.[7] 대한민국 육군은 13사단이 도하를 완료한 직후 공격하여 북한군 병력을 산으로 흩어지게 했다. 이 사단은 동쪽에서 재결집하여 야간 합동 공격으로 대한민국 육군의 방어선을 뚫고 낙동리에서 남동쪽으로 32km 떨어진 대구로 향하는 주 도로를 따라 진격했다. 일주일 이내에 북한군 제1사단과 제13사단은 대구 북쪽 약 약 24.14km 지점인 다부동 지역으로 집결하고 있었다.[7]

A large artillery piece fires as several soldiers look on
미군 포병대가 왜관 인근에서 낙동강을 건너려는 북한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다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북한군 제15사단은 다부동에서 북서쪽으로 약 4.83km 떨어진 유학산 부근의 낙동강 동쪽에 전열을 갖추고 즉시 대한민국 제1사단과 전투를 벌였다.[7]

왜관 남쪽에는 두 개의 북한군 사단이 북쪽 사단과 연계된 공격으로 낙동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7] 숙련된 북한군 제3사단은 성주 부근에, 훈련되지 않은 북한군 제10사단은 고령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7] 이 두 사단은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의 방어선을 넘어 진격해 왔다. 북한군 제3사단의 제7연대는 8월 9일 낙동강 도하를 시작하여, 발각되어 사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대부분이 동쪽 강둑에 안전하게 도달하여 언덕 안쪽으로 이동했다.[7] 다른 두 연대는 경계 태세를 갖춘 제5기병연대와 지원 포병대에 의해 발각되어 서쪽 강둑으로 밀려났다.[7] 소수의 북한군만이 동쪽에 도달하여 포로가 되거나 다음날 밤 강을 다시 건너기 전까지 숨어 있었다.[7]

8월 9일 새벽, 제1기병사단은 북한군의 도하 소식을 알게 되었다.[7] 북한군 보병은 왜관에서 남동쪽으로 약 4.83km 떨어진 곳이자 대구에서 북서쪽으로 약 16.09km 떨어진, 삼각산으로도 알려진 268고지에 집결했다.[7] 이 고지는 주요 남북 고속도로와 주요 복선 서울-부산 철도가 기슭을 지나가기 때문에 통신망에 인접해 있어 중요했다.[7] 제1기병사단은 북한군을 강 건너로 몰아내기 위해 반격을 가했지만, 초반 공격은 격퇴되었다. 8월 10일 아침, 공습과 포격으로 268고지가 초토화되었고, 북한군은 강 뒤로 후퇴했다.[7]

북서쪽과 남서쪽에서 대구를 공격하려는 북한군의 계획은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사단이 합동 공격을 수행하도록 요구했다.[7] 제10사단의 병력은 8월 12일 이른 시간에 고령-대구 도로의 덕성동 부근에서 낙동강을 건너기 시작했지만 격퇴되었다.[7] 더욱 결연한 북한군의 도하 공격은 8월 14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으나 이 공격 또한 멈추었고 강으로 밀려났다.[7] 밤이 되자, 교두보용포가 제거되었다.[7]

넓은 지역에 폭탄이 떨어지는 모습
99대의 폭격기가 3,500개의 500파운드 폭탄을 투하한 왜관 인근 지역의 미 공군 폭격 후 사진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은 8월 중순까지 왜관 북동쪽 산악 지역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계속 시달렸다. 제1사단에 대한 북한군의 압박은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미국 작전 계획자들은 북한군의 주 공격이 서쪽에서 올 것이라고 믿고 대구 서쪽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대구 인근에 최대 4만 명의 북한군 병력이 있다고 잘못 판단했는데, 이는 전체 전선에 걸쳐 7만 명의 병력만 보유하고 있던 북한군의 실제 병력 수를 넘어선 것이었다.[7]

8월 14일, 맥아더 장군은 대한민국 제1사단 맞은편 낙동강 서쪽 직사각형 지역에 대한 융단폭격을 명령했다.[7] 8월 16일, 폭격기들은 해당 지역에 약 96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7] 이 공격에는 극동 공군(FEAF)의 모든 폭격 자산이 동원되었으며, 노르망디 전투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미국 공군 작전이었다.[7]

나중에 북한군 포로들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극동 사령부가 낙동강 서쪽에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했던 사단들은 이미 강 동쪽으로 건너갔으며, 폭격 지역에 없었다.[7] 폭격으로 단 한 명의 북한군 병사도 사망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7] 그러나 폭격은 상당수의 북한군 포병 부대를 파괴한 것으로 보이며, 이 작전 이후 UN군 진지에 대한 포격이 실질적으로 감소했다.[7] UN 지상군과 공군 지휘관들은 적의 집중 배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있고 상황이 위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향후 대규모 융단 폭격을 반대했다.[7] 대신, 그들은 전투폭격기급강하폭격기가 지상군을 더 잘 지원할 것이라고 권고했다.[7]

6. 9월 공세 (낙동강 대공세)

8월 말, 조선인민군은 한계에 도달하여 많은 부대들이 전력과 효율성이 크게 감소했다.[54] 보급 문제에 시달렸고, 식량, 무기, 장비 및 보충 병력 부족이 흔했다.[55] 반면, 유엔군은 더 많은 전투 병력을 배치했으며, 공중과 해상에서 거의 완전한 우위를 점했다.[56] 조선인민군의 전차 손실은 수백 대에 달했고, 9월 1일 기준으로 100대 미만이 남은 반면, 미국군은 60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57]

소련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북한군은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 주변에서 전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곧 공격을 감행하지 않으면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58]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며,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은 유엔 해군의 지원 때문에 측면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59] 대신 정면 공격으로 교두보를 돌파하고 무너뜨리는 것을 선택했다.[60] 부차적인 목표는 대구를 포위하고 그곳의 유엔군 부대를 격파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인민군은 먼저 대구로 가는 보급선을 차단할 계획이었다.[61]

북한군 계획자들은 새로운 공세를 대비하여 병력을 증강했다.[62] 원래 2개 군단에 10개 사단이었던 조선인민군은 14개 사단과 여러 독립 여단으로 확대되었다.[63] 새로운 병력은 북한 내 예비군에서 충원되었다.[64] 최용건 원수가 조선인민군 부사령관을 맡았고, 김책 장군이 전선사령부를 지휘했다.[65] 그 아래에는 동부의 제2군단과 서부의 제1군단이 있었다. 이 병력은 약 97,850명에 달했으나, 그 중 3분의 1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된 신병들이었고, 무기와 장비가 부족했다.[66]

8월 20일,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하급 부대에 작전 지령을 배포했다.[67] 이 지령은 유엔군 전선에 대해 동시다발적인 5개 공격을 요구했다. 5개의 전투 집단 편성은 다음과 같다.[68]

공격 집단담당 지역 및 목표
제6, 7사단마산에서 미 제25보병사단 돌파
제9, 4, 2, 10사단낙동강 돌출부에서 밀양영산으로 미 제2보병사단 돌파
제3, 13, 1사단미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로 진격
제8, 15사단대한민국 제8사단과 대한민국 제6사단을 돌파하여 하양영천으로 진격
제12, 5사단대한민국 수도사단과 대한민국 제3사단을 돌파하여 포항경주로 진격



8월 22일, 김일성 수상은 9월 1일까지 전쟁을 끝내라고 명령했지만, 공세의 규모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69] 제1, 2집단은 8월 31일 23시 30분에 공격을 시작하고, 제3, 4, 5집단은 9월 2일 18시에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다.[70] 공격은 각 지점에서 유엔군을 동시에 압도하여 유엔이 증원할 수 없는 여러 곳에서 돌파구를 강요하기 위해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했다.[71] 조선인민군은 또한 유엔의 공중 우위와 해군 화력의 주요 장점에 대응하기 위해 주로 야간 공격에 의존했다. 조선인민군 장군들은 그러한 야간 공격이 유엔군의 효과적인 사격을 방해하고 많은 수의 유엔군 아군 오사 사상자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72]

공격은 유엔 기획자들과 병사들을 놀라게 했다.[73] 8월 26일까지, 유엔군은 교두보에 대한 마지막 심각한 위협을 파괴했다고 믿었고, 11월 말까지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74] 한편, 대한민국 부대는 지금까지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실패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75] 유엔군은 9월 15일에 인천 상륙 작전이라는 북한 후방의 상륙 작전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그전에 조선인민군이 심각한 공세를 펼칠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76]

낙동강 대공세는 한국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다.[77] 5개 공격은 함안, 경주, 낙동강 돌출부, 남강, 영산, 다부동가산 주변에서 격렬한 전투로 이어졌다.[78] 조선인민군의 공격은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고 부산 교두보를 따라 유엔군이 얇은 방어선을 형성하도록 강요하여 조선인민군 공격자를 격퇴하기 위해 기동 예비대에 의존했다. 9월 1일부터 8일까지 이 전투는 치열했고, 전투는 두 과도하게 확장된 군대에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교착 상태였다.[79] 조선인민군은 처음에는 여러 곳에서 유엔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유엔 부대를 포위하고 후퇴시키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80] 9월 4~5일, 유엔군에게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제8군과 대한민국군은 본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하여 포위되는 것을 막았지만, 워커는 작은 전방 분견대와 함께 대구에 남았다. 그들은 또한 "데이비슨 선"이라고 불리는 더 작은 방어 교두보로의 후퇴를 위해 물류 시스템을 준비했다. 그러나 9월 6일까지 워커는 또 다른 후퇴가 필요하지 않다고 결정했다.[81]

9월 15일, 지친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후방에서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했다. 15일 동안의 전투 이후 남아있는 병력은 완전히 궤멸되거나 완전히 고립될 위험을 감수하며 후퇴를 강요받았다.[82]

7. 결과 및 영향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6.25 전쟁 초기 수세에 몰렸던 대한민국과 유엔군이 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전투였다. 유엔군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이후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9월 15일의 부산 교두보. 파란색 화살표는 교두보에 대한 공격을 종식시킨 인천 상륙 작전을 나타낸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미군의 공식적인 사상자 수는 전사 4,599명, 부상 12,058명, 실종 2,701명, 포로 401명이었다.[112] 한국군 사상자 수는 정확히 추정하기 어려우나, 최소 40,000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113] 북한군 역시 50,000명에서 60,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T-34 전차 239대와 SU-76 자주포 74대 등 대부분의 장갑차를 잃었다.[114]

왜관 인근에서 미 공군의 폭탄에 의해 파괴된 북한 T-34 전차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과 함께, 월턴 워커 중장은 제8군에 "슬레지해머 작전"을 하달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총반격을 개시했다.[115] 1950년 9월 23일,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했고, 유엔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잃었던 지역을 탈환했다.[116]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승리로 유엔군은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후 대한민국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로 중국군의 개입이 초래되었고, 전쟁은 2년 반 동안 더 계속되었다.[117]

북한군 점령지에서는 시민과 포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한국 경찰, 공무원, 지주 등 300명이 형무소와 함께 소각되었고, 원주에서는 약 2천 명의 시민이 무차별 살상되었다.[118] 대전 근교에서는 1950년 9월 23일부터 수천 명의 한국 군인과 일반인, 40명의 미국군 포로가 살해되었다.[119]

8. 전쟁 범죄

주로 북한군 측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쟁 범죄 사례가 있었다. 북한군은 한국을 점령하면서 전투 중 포로로 잡힌 유엔군 포로를 고문하고 처형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포로 구타, 거세, 화형, 총검술 연습에 사용된 사건들이 발생했다. 대구 지역에서는 손이 묶인 채 처형된 포로들이 발견되었고, 마산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북한군은 포로를 인간 방패로 사용하거나, 치명상을 입은 유엔군 병사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무장하지 않은 군종장교와 의무병들이 공격받은 사건도 있었다. 북한군은 대규모로 한국 민간인을 강제로 징집하여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을 모두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89]

가장 악명 높은 북한의 전쟁 범죄는 303고지 학살이었다. 1950년 8월 17일, 대구로 진격하는 북한군이 41명의 미군 전쟁 포로를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북한군에게 이러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 북한군 지휘관들은 이후 전쟁 포로 처우에 대해 더욱 엄격한 명령을 내렸지만, 잔학 행위는 계속되었다.

303고지 학살 희생자들의 시신.


유엔군, 특히 한국군도 포로로 잡힌 북한군 병사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도 연맹 학살에서는 좌익 또는 공산주의 동조자였던 한국 민간인들이 체계적으로 투옥되거나 살해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전투 중에 발생했다. 노근리 학살에서는 퇴각하는 미군 제1기병사단 병력과 미군 전투기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약 250~300명의 한국 민간인을 살해했다. 미군 지휘관들은 북한군 침투를 우려하여 접근하는 피난민 집단에 발포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러한 살해는 낙동강 전투 중에도 계속되었으며, 지휘관들은 피난민을 "사냥감"으로 선언하고 "강을 건너는 모든 피난민을 사살하라"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왜관읍 북쪽의 303고지(작오산)는 왜관 시가지와 교통을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미국 제5기병연대 제2대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나, 조선인민군 제3사단에 의해 포위되었다. 1950년 8월 16일 융단 폭격이 이루어진 밤, 303고지의 G중대는 포위를 뚫고 탈출했지만, 박격포 소대는 행방불명되었다. 8월 17일 오후에 미군이 산 정상을 탈환하자, 전선으로 뒤로 수갑처럼 연결된 채 사살된 포로 41명(이 중 26명이 박격포 소대)의 시신을 발견했다. 8월 18일에는 파괴된 M26 퍼싱 2량의 승무원이 포로가 된 후 사살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조선인민군의 행위를 강력히 비난하며, 조선인민군 고위 간부에게 보내는 전단을 수송기에서 공중 살포했다.[90]

참조

[1] 서적 朝鮮戦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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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서적 朝鮮戦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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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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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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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문서 黄埔軍官学校、抗日軍政大学出身。八路軍ののちソ連軍少佐。
[56] 문서 新編成部隊であり、練度は低かった。
[5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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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문서 第1・第3大隊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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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문서 捕虜の証言から、手違いにより主力の渡河が遅れたものと思われる。
[64] 서적
[65] 서적 朝鮮戦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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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문서 仁川上陸作戦時に再び第17連隊長。
[69] 서적 朝鮮戦争2
[70] 서적 朝鮮戦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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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서적 朝鮮戦争5
[119] 서적 朝鮮戦争 (上) (歴史群像シリーズ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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