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기
1. 개요
김응기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1477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좌의정을 역임했다. 연산군 시대에 관직을 수행하다 갑자사화로 파직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재등용되어 여러 요직을 거쳤다. 그는 학문에 능통하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재상으로서의 역량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1519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문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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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 -
허적
조선 중기 문신 허적은 예송논쟁의 남인 주요 논객이자 탁남 영수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당쟁과 정치적 음모로 처형 후 복권되었으며, 평안도 관찰사 시절 대동법 확대에 기여했으나 허목과의 갈등과 천막 남용 사건으로 몰락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사림파 -
김전
김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훈구파의 중진으로 활동하며 기묘사화에 가담하여 사림 세력을 숙청하는 데 협력한 인물이다. -
1519년 사망 -
호조 소운
호조 소운은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으로 이세 종수이나 이세 신쿠로 등으로 불렸으며, 이마가와 가문의 가독 다툼에 개입하고 이즈, 사가미 등지를 정복하며 고호조씨의 기반을 마련한 센고쿠 시대 초기의 중요 인물이다. -
1519년 사망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다재다능한 천재로, 미술, 과학,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와 같은 걸작 회화로 유명하다. -
1455년 출생 -
폐비 윤씨
조선 성종의 왕비였던 폐비 윤씨는 질투심과 후궁을 해하려 했다는 의혹 등으로 폐위되어 사사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은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어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455년 출생 -
아카마쓰 마사노리
아카마쓰 마사노리는 무로마치 시대에 가키쓰의 난으로 몰락한 아카마쓰 가문을 재건하고 오닌의 난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옛 영지를 회복했으며, 막부 내에서 높은 신임을 얻고 문화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2. 생애
1477년(성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충청도도사, 시강관, 시독관, 수찬, 검토관을 거쳐 우승지, 좌승지에 이어 도승지가 되고 홍문관의 직제학이 된다. 이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때 도총관, 동지사, 호조참판에 이어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로 있다가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민정을 잘 다스렸으며 지의금부사를 거쳐 지춘추관사, 지중추부사, 특진관, 세자우부빈객을 지내고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다 갑자사화로 파직되고, 중종 때 재등용되어 예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상의원제조,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 예조판서에 이어 영중추부사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1517년(중종 12)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자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519년(중종 14) 졸했으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2.1. 관직 생활
1477년(성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충청도도사, 시강관, 시독관, 수찬, 검토관을 거쳐 우승지, 좌승지에 이어 도승지가 되고 홍문관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때 도총관, 동지사, 호조참판에 이어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로 있다가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민정을 잘 다스렸다. 지의금부사를 거쳐 지춘추관사, 지중추부사, 특진관, 세자우부빈객을 지내고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다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 중종 때 재등용되어 예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상의원제조,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 예조판서에 이어 영중추부사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1517년(중종 12)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자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519년(중종 14) 사망했으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2.2. 갑자사화와 중종반정
김응기는 1477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충청도도사, 시강관, 시독관, 수찬, 검토관을 거쳐 우승지, 좌승지에 이어 도승지가 되고 홍문관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때 도총관, 동지사, 호조참판에 이어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로 있다가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다스렸다. 지의금부사를 거쳐 지춘추관사, 지중추부사, 특진관, 세자우부빈객을 지내고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다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
중종반정이후 재등용되어 예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상의원제조,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 예조판서에 이어 영중추부사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1517년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자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519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2.3. 말년
1517년(중종 12)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자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519년(중종 14) 사망했으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