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전은 1458년에 태어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489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겪으며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중종반정 이후 예조참판 등을 거쳐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조광조 등 사림파의 개혁에 반대하고 기묘사화에 협력하여 사림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저서로는 《성종실록》 편찬 참여, 《속동문선》 편찬 참여 등이 있으며, 묘소는 고양시에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58년 출생 - 아마고 쓰네히사
아마고 쓰네히사는 센고쿠 시대 이즈모국의 슈고다이 아마고 씨 당주로, 교고쿠 씨 가신에서 시작하여 세력을 확장, 이즈모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주변 지역으로 영향력을 넓히려 혼인 정책을 펼쳤으나, 후일 가문 내 내분으로 이어졌다. - 1458년 출생 - 페르디난도 1세 (나폴리)
아라곤 알폰소 5세의 사생아로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계승한 페르디난도 1세는 즉위 초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으나 권력을 강화하고 르네상스 문화 발전에 기여했지만, 억압적인 통치로 비판받았다. - 1523년 사망 - 아시카가 요시타네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오닌의 난 중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쇼군에 올랐으나, 호소카와 가문과의 권력 투쟁 끝에 아와지 섬으로 퇴각하여 사망하며 무로마치 막부 쇠퇴의 요인이 된 무로마치 막부의 제10대 쇼군이다. - 1523년 사망 - 루카 시뇨렐리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루카 시뇨렐리는 인체 해부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역동적인 누드 묘사에 능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최후의 심판》이 있다. - 사림파 - 허적
조선 중기 문신 허적은 예송논쟁의 남인 주요 논객이자 탁남 영수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당쟁과 정치적 음모로 처형 후 복권되었으며, 평안도 관찰사 시절 대동법 확대에 기여했으나 허목과의 갈등과 천막 남용 사건으로 몰락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사림파 - 김응기
김응기는 조선 시대 문신으로, 문과 급제 후 예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재등용되어 요직을 거치고 1519년에 사망하여 시호는 문대이다.
김전 | |
---|---|
기본 정보 | |
![]() | |
본관 | 경주(慶州) |
자(字) | 성중(聲仲) |
호(號) | 지재(止齋) |
시호(諡號) | 문정(文靖) |
생애 | |
출생 | 1394년(태조 3년) |
사망 | 1462년(세조 8년) |
관력 | |
주요 관직 | 지신사 형조판서 예조판서 좌찬성 |
2. 생애
2. 1. 생애 초반
김전은 1458년에 태어났다. 증조부는 개성유수 김자지(金自知)이고, 조부는 내자시윤 김해(金侅),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우신(金友臣)이며, 어머니는 지청풍군사 이계충(李繼忠)의 딸 이천이씨이다. 김안로는 그의 조카였다. 배위는 판관 노후(盧昫)의 딸 풍천노씨와 결혼했다가 사별하고 감역 송환주(宋環周)의 딸 진천송씨와 재혼하였다. 소년기때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김종직의 문하에서 이름을 알리고, 글재주를 익혔으며 그로부터 춘추대의와 주자에 대한 것을 수학하였다.
1472년(성종 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480년에는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2. 2. 관료 생활과 사화
1489년(성종 21년)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안 현감으로 올라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칭송을 받았다. 이때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그의 생사당[1]을 세웠고, 홍문관수찬을 거쳐 1496년(연산군 2년) 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였다.그 뒤 홍문관전한으로 승진하였으며,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년) 조의제문 필화 사건이 확대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그도 김종직의 문인이고, 수사관으로서 조의제문을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으며, 김일손, 신용개 등과 친분관계인 이유로 파직을 당했다가 1501년(연산군 7년) 왕명으로 특별히 복직하여 부호군으로 다시 서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년) 성균관대사성에 올랐으나 갑자사화로 다시 좌천되었다.
2. 3. 중종반정과 정치 활동
성희안, 유순정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킬 때 동참 요청을 받았으나 소극적이었다. 중종반정 뒤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사로 승진했으며, 이조참판, 호조참판,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1515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다가 죽자, 훈구파 대신들은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경빈 박씨를 새 왕비로 추천했다. 조광조가 제안한 구언제도에 의해,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등은 단경왕후 신씨의 복귀를 상소했다. 그러나 단경왕후 복직에 대한 반대여론 및 서열문제 발생 등으로 조정에서는 반대가 심했고, 이행은 박상과 김정을 죄를 줄 것을 상주하였다. 1515년 9월 김전, 남곤은 박상, 김정의 처벌은 과하다며 용서를 청하였다가 이행의 논박을 받았다.
1513년부터 지중추부사, 의정부우참찬,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으로 나갔다가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그는 조광조, 김정, 김식 등의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다. 남곤 등과 함께 신진 사림의 위훈삭제, 현량과의 설치 등 사림파의 개혁 정치에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1518년 찬집청당상으로 신용개, 남곤 등과 함께 《속동문선》을 편찬하는데 참여하고, 1519년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2. 4. 기묘사화와 말년
1519년 심정, 홍경주, 고형산 등과 함께 모의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데 협력, 조광조와 그의 신진 세력들을 숙청시키기도 했다. 남곤, 안당 등이 조광조 일파의 사형에는 반대하고 유배나 감형을 주장한 반면 그는 조광조 일파를 도와주기를 거절하였다. 그 뒤 기묘사화에 참여한 공로로 그는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의정부우의정으로 승진했다가 1520년(중종 15년) 의정부 영의정 겸 세자사가 되었다.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에서는 남곤, 김전 등을 배신자로 인식하고 비판, 경멸하게 되었다. 김종직 학파 출신으로 중종 반정에 참여했으며 그와 교류하던 성희안과 유순정 역시 이미 사망하여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인물은 없었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등을 구명하지 않은 일로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이었던 안처근 형제가 후에 훈구파의 영수인 심정, 홍경주 등을 제거할 때 배신자, 변절자로 지목된 남곤, 김전 역시 제거하려 모의하였다. 그러나 안처겸 형제의 남곤, 심정 제거 모의는 송사련의 밀고로 탄로났다.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년) 송사련으로부터 안처겸 형제의 모의를 접한 남곤 등은 안처겸 등의 역모를 주장하여 안당 등의 일파를 숙청하였다.
조광조를 국문하였으며, 윤원형은 그의 손녀사위였다. 그의 아들 현감 김안수의 딸이 윤원형과 결혼하였으나 독살당했던 것이다.
3. 저술 활동
김전은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속동문선》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4. 가족 관계
김전의 할아버지는 김해(金侅)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우신(金友臣, 1424 ~ 1510)이며, 어머니는 지청풍군사 이계충(李繼忠)의 딸 인천 이씨이다. 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는 그의 형 김흔의 아들이었다. 김안로는 그의 아들 김희가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결혼하면서 외척이 되기도 했다. 동시대에 재상을 지낸 김감(金勘)은 그와는 6촌 종형제간이었다.
김전의 부인은 풍천노씨로 판관 노후(盧昫)의 딸이며, 또다른 부인은 진천 송씨로 감역 송환주(宋環周)의 딸이다.
김전은 진천 송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김안도(金安道), 김안우(金安遇), 김안수(金安遂), 김안달(金安達) 4형제를 두었다. 삼남 김안수의 후처는 강씨(姜氏)이다. 장남 김안도(金安道)는 김진(金禛), 김인(金裀), 김오(金祦) 세 아들을 두었는데, 김오는 인목왕후의 할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증조부가 된다.
5. 평가와 비판
김전은 청렴하고 사리사욕이 없었으며, 재물에 욕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개인적으로 집 한 채 소유한 바 없었고, 전답 하나 없이 오직 거문고와 술로서 스스로를 즐길 정도로 청렴결백하였고 문장도 뛰어났다.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사림파 인사였으나, 조광조 일파 숙청에 동의하면서 후대의 사림으로부터 남곤과 함께 변절자, 배신자로 낙인찍혀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의 조카 김안로는 중종의 외척인 권신이었기 때문에 이 점 역시 함께 매도당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6. 학맥
학맥상으로는 백이정과 안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전으로 이어진다.
그는 기묘사화에 동조, 협력하는 입장에 섰었으므로 사림파의 집권 이후 남곤 등과 함께 사림파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과 변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7. 묘소
경기도 고양시 원흥동 산40-1에 묘소가 있다. 농협대학 입구 삼거리에서 서삼릉 가는 길로 좌측에 그의 선영과 함께 있다. 묘소와 신도비는 1986년 6월 16일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현손인 김래(金王+來)가 서(書)와 전(篆)을 하여 신도비를 세웠으나, 비문의 훼손이 심하여 글자 판독이 어렵다. 1901년(광무 4년)에 묘를 새로 조성하였다.
참조
[1]
문서
살아있는 인물의 사당
[2]
문서
안돈후의 서녀의 아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