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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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중건은 함경남도 영흥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서당을 운영하다가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고 천도교에 입교하여 일진회를 비판했으나,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천도교를 떠나 원종을 창립했다. 이후 북간도에서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사상 단체인 대진단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1929년에는 북만주에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인 어복촌을 건설했으나,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퇴하여 공산주의 계열 부대와 갈등을 겪다 1933년 일본, 소련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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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어린 시절이나 가정 환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한학을 익혀 서당을 운영하다가 1907년 무렵부터 신학문에 눈을 떴고, 1909년 천도교에 입교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천도교를 통한 구국 운동에 한계를 느껴 1913년 원종을 창립했다.

1914년 원종 신도들과 북간도로 망명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민족 교육을 실시하다 191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간도에서 원종 포교 활동을 하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사상을 설파했는데, 이는 아나키즘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1920년에는 무장 조직인 대진단을 조직, 1921년 대한국민단 결성에 참가했다.

1929년 북만주에 이상적 농촌 공동체인 어복촌을 건설했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1933년 일본, 소련 연합군과 길림구국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남양주시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고 문집으로 《소래집(笑來集)》(1969)이 있다.

2.1. 초기 생애 및 천도교 활동 (1889년 ~ 1913년)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어린 시절이나 가정 환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한학을 익혀 서당을 운영하다가 1907년 무렵부터 신학문에 눈을 떴다. 1909년에는 천도교에 입교했다.

서당을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는 연명학교(鍊明學校)로 개편했다. 이용구 계열이 중심이 된 일진회가 일한합방상주문을 제출하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재촉하자, 《천도교월보》에 〈토일진회(討一進會)〉라는 제목으로 일진회를 비판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기존의 천도교단을 통한 구국 운동에 회의감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독자적인 우주관을 정립하고 천도교 교단의 개혁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천도교에서 출교당했다. 1913년 원종(元宗)을 창립했다.

2.2. 원종 창시와 독립운동 (1913년 ~ 1920년)

김중건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천도교단을 통한 구국 운동에 회의를 느껴 고향으로 돌아가 독자적인 우주관을 정립하고 천도교 교단의 개혁을 촉구하다가 출교당했다. 결국 1913년 원종을 창립했다.

1914년 원종 신도들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민족 교육을 실시하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다시 간도 지역을 무대로 원종 포교 활동을 벌이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자신의 이념을 설파했다. 그의 사상은 농촌 중심의 개혁을 통해 국가가 없는 이상촌을 건설한다는 것으로, 아나키즘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1920년 원종교도들을 규합하여 대진단을 조직했다. 대진단은 기본적으로 사상 단체였으나 무장 조직이었고, 1921년 무장 독립 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대한국민단이 결성될 때 참가했다.

2.3. 대진단 결성과 무장 투쟁 (1920년 ~ 1929년)

1920년 김중건은 원종 교도들을 모아 대진단(大震團)을 조직했다. 대진단은 사상 단체이자 무장 조직이었다. 1921년 무장 독립 운동 단체들이 연합하여 대한국민단이 결성될 때 대진단도 참가했다.

이후 김중건은 《새바람》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다가 다시 체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1929년 북만주 황무지에 공동 생산, 공동 분배가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 어복촌을 건설해 운영했다. 어복촌에서는 평소 교육과 군사 훈련을 했기 때문에, 만주사변 이후 부대를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2.4. 어복촌 건설과 최후 (1929년 ~ 1933년)

그는 《새바람》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다가 다시 체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1929년에 북만주의 황무지 지역에 공동 생산, 공동 분배가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 어복촌을 건설해 운영했다. 이 공동체에서는 평소 교육과 군사 훈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주사변 이후 부대를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원종 부대가 일본군에게 패퇴하여 어복촌으로 물러나 있던 중, 그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 부대인 장참모의 길림구국군과 이광 부대 등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1933년 일본, 소련 연합군과 길림구국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