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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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태진은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극작가로, 배우로 활동을 시작하여 영화 《아리랑》에 출연했다. 1927년에는 영화 《뿔빠진 황소》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고, 이후 좌파 문화운동에 참여하여 카프 계열의 연극 운동을 펼쳤다. 1933년 영화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전향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연극을 제작했다. 광복 후 좌파로 복귀하여 북한으로 월북, 역사극 《리순신 장군》을 집필했다. 김태진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1957년까지 생존하여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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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극작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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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필명 | 남궁운 |
출생일 | 1905년 |
출생지 | 대한제국 함경남도 원산 |
사망일 | 1949년 |
직업 | 작가, 연출가, 배우 |
장르 | 희곡, 시나리오 |
2. 생애
김태진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단천에서 성장했다. 1925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아리랑》에 출연하며 배우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나운규와의 갈등으로 주인규와 함께 계림영화사로 옮겼다가 다시 조선키네마로 돌아왔다.[1]
1927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주연한 영화 《뿔빠진 황소》를 연출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김태진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으며, 지주의 아들과 소작인의 아들이 한 여성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통해 식민지 현실과 계급 모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1]
1929년 《혼가》에 특별출연한 것을 계기로 김유영, 임화 등과 교류하며 좌파 문화운동에 참여했다.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창립에 참여하고, 신건설, 동방키노에서 카프 계열의 진보적 연극 운동을 이끌었다. 1933년 영화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며, 이 사건 관련자 중 강호와 김태진 두 사람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출옥 후에는 전향하여 일제강점기 말 '국민연극' 극작가로 활동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열린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행복의 계시〉를, 1943년 제2회 대회에 〈아름다운 고향〉을 출품했다.[2] 이러한 활동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과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에는 다시 좌파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이후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인기 배우 황철이 출연하고 월북 연출가 나웅이 연출한 《리순신 장군》을 집필하여 북한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역사극으로 남았다.[3] 1949년 이후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지만, 1957년에 시나리오 《도화선》을 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 생존하여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1. 초기 생애 및 배우 활동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여 함흥과 단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25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아리랑》에 출연하면서 배우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나운규와의 갈등으로 주인규와 함께 계림영화사로 옮겨갔다가 다시 조선키네마로 복귀했다.[1]2. 2. 영화 감독 데뷔와 카프 활동
1927년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가 주연을 맡은 영화 《뿔빠진 황소》를 연출하여 영화계에 뚜렷이 이름을 알렸다. 김태진이 직접 시나리오도 쓴 이 영화는 지주의 아들과 소작인의 아들이 한 여성을 함께 사랑한다는 줄거리로, 식민지의 현실과 계급 모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파적 성향을 보였다.[1]1929년 《혼가》 특별출연을 계기로 김유영, 임화 등과 교류하면서 본격적인 좌파 문화운동에 합류했다. 이후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창립에 참가하였고, 신건설, 동방키노에서 카프 계열의 진보적 연극 운동을 펼쳤다. 1933년 카프 미술인 강호, 이상춘이 《영화부대》 발간을 빌미로 체포된 영화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 사건 관련자 가운데서는 강호와 김태진 두 사람이 실형을 언도받았다.
2. 3. 친일 행적
1934년 출옥한 뒤 전향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에 '국민연극' 극작가로 활동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열린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행복의 계시〉를 출품했고, 1943년 열린 제2회 대회에도 〈아름다운 고향〉을 출품했다.[2]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김태진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28~44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2]
2. 4. 광복 후 활동과 월북
광복 직후 김태진은 좌파 계열로 복귀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3] 카프에서 활동했던 그는 다시 좌파적 성향의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1948년 이후, 그는 북한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예술 활동을 계속했다. 북한에서 그는 인기 배우 황철이 출연하고 월북 연출가 나웅이 연출을 맡은 《리순신 장군》을 집필했는데, 이 작품은 북한 문학사에서 역사극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3] 1949년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57년에 시나리오 《도화선》을 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 생존하여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3]참조
[1]
뉴스
"
[2]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3]
뉴스
북한에선 이순신장군 어떻게 볼까
http://ohmynews.com/[...]
연합뉴스
2007-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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