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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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웅은 일제강점기 영화 배우이자 연극인으로, 좌파 활동과 친일 행적을 보인 인물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1928년부터 영화 배우로 활동하며 촉망받았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등 좌파 단체에서 활동했다. 1932년 영화구락부 사건,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으나,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참여하며 친일 행위로 전환했다. 조선연극문화협회에서 친일 연극을 연출하고 친일 영화에 출연했으며, 조선총독부 주최 연극경연대회에서 연출상을 받기도 했다. 광복 후 좌파로 다시 활동하다 1946년경 월북했으며, 북조선에서 연극 연출 활동을 이어갔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연극/영화 부문으로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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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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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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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나준영 |
출생일 | 1909년 |
출생지 | 한성부 |
사망일 | 1965년 이후 |
활동 기간 | 1928년 ~ 1960년 |
직업 | 연극연출가, 영화배우 |
친척 | 나도향(사촌 형) |
2. 생애
한성부 출생인 나웅은 1928년경부터 영화 배우로 활동하며 곧 촉망받는 연기자로 부상했다.[1]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의 연극인이자 극단 신건설과 동방키노에서 활동하는 등 좌파적 활동을 펼쳤다. 1932년 영화구락부 사건과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신건설사 사건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로 참여하며 친일 행보를 보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연극문화협회에 가담하여 친일 연극을 연출하고,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 《망루의 결사대》 등 친일 영화에도 출연했다.[1] 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송영의 〈산풍〉으로 연출상을 수상했고, 이후 1945년 제3회 대회까지 친일 성향 작품을 연출했다. 특히, 제3회 대회에서는 징병제를 선전하는 조명암의 〈현해탄〉을 연출했다.[1]
1945년 광복 직후,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 이튿날 조선연극건설본부를 결성하며 좌파 계열로 복귀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과 조선연극동맹에서 송영, 신고송, 김승구 등과 활동하다 1946년경 월북했다.
1933년 극단 신건설 창립 작품인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광복 후 조명암의 〈독립군〉, 월북 후 김태진의 〈리순신 장군〉 등을 연출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북조선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으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1]
2. 1. 일제 강점기 초기: 진보적 예술 운동 참여
1928년 경부터 《나의 친구여》, 《지나가의 비밀》 등에 출연하며 영화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곧 촉망받는 연기자로 떠올랐다.[1]영화 배우로 활동하면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계열의 연극인으로서 조직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29년 진보적 영화인들이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창립했을 때 창립회원으로 가입했다. 이 단체는 약 6개월 후 카프 영화부로 흡수되었다.[1]
나웅은 극단 신건설과 동방키노에도 참여하는 등 좌파적 활동을 하다가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32년 영화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으나, 이 사건에서 강호와 김태진만이 실형을 선고받고 나웅은 풀려났다. 그러나 제2차 카프 검거 사건 때 송영, 박영희, 한설야, 이기영 등과 함께 다시 체포되었다.[1]
2. 2. 일제 강점기 말기: 친일 행적
나웅은 신건설사 사건 이후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경성지부 간사로 참여했다.[1]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연극문화협회에 가담하여 친일 연극을 연출했고, 그 사이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1943), 《망루의 결사대》(1943) 등 친일 영화에도 출연했다.[1]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개최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화전민을 소재로 한 송영의 〈산풍〉을 연출해 출품, 연출상을 수상했다.[1] 1943년 열린 제2회 대회에도 친일 성향이 농후한 송영의 〈역사〉를 출품하였고, 1945년 제3회 대회에는 조명암의 〈현해탄〉을 연출하였다.[1] 〈현해탄〉은 징병제를 선전하는 내용이다.[1]
2. 3. 해방 이후: 좌익 활동 및 월북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 이튿날 조선연극건설본부를 결성하였다.[1] 이후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 조선연극동맹에도 가담하여 송영, 신고송, 김승구 등과 함께 좌익 계열에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1946년 경에 월북했다.[1]월북 후 북조선에서 김태진의 〈리순신 장군〉 등을 연출했다.[1] 1960년대 초반까지 북조선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1]
3. 주요 작품
나웅은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 활동했다.
분야 | 작품명 | 연도 | 기타 |
---|---|---|---|
연극 | 서부전선 이상 없다 | 1933년 | 극단 신건설 창립 작품, 연출[1] |
연극 | 독립군 | 해방 후 | 조명암 작, 연출[1] |
연극 | 리순신 장군 | 1946년경 (월북 후) | 김태진 작, 연출[1] |
연극 | 산풍 | 1942년 | 송영 작, 조선총독부 후원 제1회 연극경연대회 출품, 연출상 수상[1] |
연극 | 역사 | 1943년 | 송영 작, 제2회 연극경연대회 출품[1] |
연극 | 현해탄 | 1945년 | 조명암 작, 제3회 연극경연대회 출품, 징병제 선전[1] |
영화 | 나의 친구여 | 1928년경 | 출연[1] |
영화 | 지나가의 비밀 | 1928년경 | 출연[1] |
영화 |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 | 1943년 | 출연[1] |
영화 | 망루의 결사대 | 1943년 | 출연[1] |
3. 1. 연극
1933년 극단 신건설 창립 작품으로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연출했다.[1] 해방 후에는 조명암의 〈독립군〉을 연출했고,[1] 1946년경 월북 후 북조선에서 김태진의 〈리순신 장군〉 등을 연출했다.[1]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연극문화협회에 가담하여 친일 연극을 연출했고,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1943), 《망루의 결사대》(1943) 등 친일 영화 몇 편에도 출연했다. 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개최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화전민을 소재로 한 송영의 〈산풍〉을 연출해 출품, 연출상을 수상했다.[1] 1943년 열린 제2회 대회에도 친일 성향이 농후한 송영의 〈역사〉를 출품하였고,[1] 1945년 제3회 대회에는 조명암의 〈현해탄〉을 연출하였다.[1] 〈현해탄〉은 징병제를 선전하는 내용이다.[1]
3. 2. 영화
1928년경부터 《나의 친구여》, 《지나가의 비밀》 등에 출연하여 영화 배우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1943년), 《망루의 결사대》(1943년) 등 친일 영화에 출연했다.[1]4. 평가
나웅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진보적인 예술 운동에 참여했지만, 이후 친일 행적을 보이다가 광복 후 월북하는 등 복잡한 행보를 보였다.
1929년 신흥영화예술가동맹 창립회원으로 참여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영화부에서 활동하는 등 진보적 예술 운동에 기여했다. 1932년에는 영화구락부 사건과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다.[1]
그러나 신건설사 사건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참여하면서 친일 행적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연극문화협회에 가담하여 친일 연극을 연출하고, 친일 영화에 출연했다.[1]
광복 후에는 다시 좌파 계열로 돌아가 조선연극건설본부를 결성하고 조선연극동맹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경 월북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북조선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1]
4. 1. 진보적 예술 운동 기여
1929년 진보적 영화인들이 신흥영화예술가동맹을 창립했을 때 창립회원으로 가담했으며, 이 단체는 약 반년 후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영화부로 편입되었다.[1] 나웅은 극단 신건설과 동방키노에서 활동하며 좌파적 활동을 펼쳤다.[1] 1933년 극단 신건설의 창립 작품으로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연출했다.[1] 광복 직후에는 조선연극건설본부를 결성하였고,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 조선연극동맹에도 가담하여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1]4. 2.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
나웅은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연극문화협회에 가담하여 친일 연극을 연출하고, 《우러르라 창공(仰げ大空일본어)》(1943), 《망루의 결사대》(1943) 등 친일 영화에 출연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1]1942년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개최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화전민을 소재로 한 송영의 〈산풍〉을 연출해 출품, 연출상을 수상했다. 1943년 제2회 대회에도 친일 성향이 농후한 송영의 〈역사〉를 출품하였고, 1945년 제3회 대회에는 조명암의 〈현해탄〉(징병제를 선전하는 내용)을 연출하였다.[1]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1]
4. 3. 월북 이후 행적에 대한 평가
나웅은 광복 후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다 1946년경 월북했다. 월북 후 김태진의 〈리순신 장군〉 등을 연출했다.[1]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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