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주인규는 일제강점기 영화배우이자 북한의 영화인으로, 1901년경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초 예림회에 가입하여 영화계에 입문, 영화 《아리랑》에서 악역을 맡아 이름을 알렸다. 이후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고, 해방 후 북한에서 영화계에 종사하며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대 숙청 과정에서 종파분자로 몰려 1956년 자결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배우 - 문예봉
문예봉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배우로,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여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으며, 월북 후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화 배우 - 서광제
서광제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이후까지 활동한 영화 평론가이자 영화 감독으로, 카프 참여, 친일 영화 제작, 광복 후 좌익 활동, 월북 후 시나리오 작가 활동을 했으며,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가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노동운동가 - 이현상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활동한 이현상은 6·10 만세운동 참여, 노동 및 항일 운동, 남로당 활동, 남부군 사령관으로서의 게릴라전 지휘 등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북한에서 애국렬사로 추앙받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 배우 - 문예봉
문예봉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배우로,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하여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으며, 월북 후 북한에서 공훈배우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일제강점기의 영화 배우 - 나운규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영화감독이자 배우, 각본가로, 영화 《아리랑》을 통해 조선인의 저항 의식을 고취하며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으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중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건강 악화로 요절한 독립운동가이다.
주인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주인규 |
본명 | 주인규 |
출생 | 1901년? |
출생지 | 대한제국 함경남도 함흥군 |
사망 | 1956년? |
사망지 | 북한 |
분야 | 영화배우, 영화연출, 노동운동가 |
2. 생애
2. 1. 생애 초기
주인규는 1901년경 함경남도 함흥군에서 아버지 주경팔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주경팔은 시골의 부유한 지주였고, 동생 주선규 역시 노동운동가로 활동했으며, 태평양노조사건으로 주인규와 함께 체포되기도 했다.[1] 1919년경 한 살 많은 이인동과 결혼했으나, 결혼 8년 만에 이혼했다.[1]이인동은 시집살이를 강하게 거부했다.[1] 1922년 5월 만병수라는 극약을 다량 복용해 자살을 기도했고, 며느리의 자살미수 소식에 놀란 아버지 주경팔은 1923년 1월 충격으로 사망했다.[1] 이인동은 친정에서 첫 아이를 낳은 뒤 시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산 5개월 후 아이만 보냈다.[1]
2. 2. 영화배우 활동
1922년 주인규는 우연한 기회에 고향 함흥군에서 설립된 악극단 예림회에 가입하여 문예부장 안종화를 만났다. 이어 안종화에게 발탁된 것이 기회가 되었다. 예림회는 지두한, 서정익, 박정걸 등 일본유학을 다녀온 유학파 출신들이 함흥지역에 세운 연극단체였다.[1] 예림회에는 훗날 한국영화의 선각자로 지목되는 안종화, 주인규, 김태진, 그리고 나운규가 있었는데 주인규는 이때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1]회원으로 활동하였으나 1924년 경영난으로 예림회는 문을 닫아, 일시적으로 그만두게 되었다.[1]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서울 출신의 안종화는 함흥을 떠나 무대예술연구회의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는 함흥역에서 김태진, 나운규와 함께 안종화를 배웅하였고, 떠나면서 안종화는 함흥의 친구들에게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연락했다.[1]
안종화의 연락을 받고 김태진이 최초로 내려가고 주인규도 그들을 따라 부산으로 이동하였다.[1] 안종화는 무대예술연구회원에 가입해서 활동하였는데, 무대예술연구회 회원이 우연한 기회에 일본인이 세운 조선시네마주식회사에 전원 입사하게 되어 영화를 촬영하였는데 안종화가 함흥의 옜친구들을 잊지 않고 불렀던 것이었다.[1]
윤백남은 일본에서 흥행을 해보고자 춘원 이광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를 후속작으로 정했다.[1]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는 이경손이 연출을 맡았고 주인규는 여기서 악역을 맡게 되는데,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을 맡게 된 것이었다.[1] 주인규가 맡은 역은 젊은 화학자 김성재 분으로, 주인공인 화가 민은식을 사랑하는 자신의 여동생 김성순을 자신의 연구비를 후원하는 재력가 변철학에게 시집보내려고 강요하다가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악역이었다.[1]
1925년 봄 일본으로 건너간 윤백남은 여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백남프로덕션을 떠맡게 되었다. 영화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는 무더위로 네거필름이 손상되어 상영에 실패하고 말았다.[1] 채무자들의 빚 독촉이 심해지자 주인규를 비롯하여 백남프로덕션에 남은 사람들은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를 상영하여 빚을 청산하기로 하고 손상된 필름이나마 상영하기로 결정하였다. 1925년 7월 17일 단성사에서 자신이 출연한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를 개봉하는데 주도하였으나 첫개봉 당일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서울 시내에 홍수가 났고 상영은 실패하였다.[1] 얼마 뒤, 단성사 뒤 여인숙에서 백남프로덕션은 해산되었다.[1]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에서 지주에게 아부하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청지기 오기호 역을 훌륭히 소화하여 악역 전문 배우로 명성을 얻었다.[1]
2. 2. 1. 실패한 데뷔작
윤백남은 일본에서 흥행을 해보고자 춘원 이광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를 후속작으로 정했다.[1]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는 이경손이 연출을 맡았고 주인규는 여기서 악역을 맡게 되는데,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을 맡게 된 것이었다.[1] 주인규가 맡은 역은 젊은 화학자 김성재 분으로, 주인공인 화가 민은식을 사랑하는 자신의 여동생 김성순을 자신의 연구비를 후원하는 재력가 변철학에게 시집보내려고 강요하다가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악역이었다.[1]1925년 봄 일본으로 건너간 윤백남은 여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백남프로덕션을 떠맡게 되었다. 영화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는 무더위로 네거필름이 손상되어 상영에 실패하고 말았다.[1] 채무자들의 빚 독촉이 심해지자 주인규를 비롯하여 백남프로덕션에 남은 사람들은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를 상영하여 빚을 청산하기로 하고 손상된 필름이나마 상영하기로 결정하였다. 1925년 7월 17일 단성사에서 자신이 출연한 開拓者, 개척자일본어를 개봉하는데 주도하였으나 첫개봉 당일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서울 시내에 홍수가 났고 상영은 실패하였다.[1] 얼마 뒤, 단성사 뒤 여인숙에서 백남프로덕션은 해산되었다.[1]
2. 2. 2. 영화 아리랑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에서 지주에게 아부하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청지기 오기호 역을 훌륭히 소화하여 악역 전문 배우로 명성을 얻었다.[1]2. 3. 노조 활동과 체포
1927년 11월 이혼 후, 주인규는 고향 함흥으로 돌아왔다. 당시 함흥은 중화학공장단지들이 밀집되어 있어 적색노동조합이 활발하게 조직되어 있었다.[2] 1929년 영화 《도적놈》에 출연하였는데, 카프 출신 윤기정은 그의 연기를 호평했다.[2] 이후 주인규는 조선공산당 간부들의 추천으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로 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함흥질소회사에 취업하여 적색 노동조합운동을 했다.[2]1932년 6월 19일, 함흥 흥남 적색노조 사건으로 동생 주선규와 함께 체포되었다.[2] 이들은 신흥으로 피신했으나 조선총독부 경찰관에게 검거되었다.[2] 1934년 10월 재판에서 주인규는 징역 3년, 주선규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2]
2. 4. 1940년대 이후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통제가 극도로 달하면서 조선 내 모든 영화사는 총독부 주도로 만들어진 조선영화사로 통합되었고 영화인들은 심사를 통해 이 회사에 입사하였다.[2] 주인규는 사상범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통제 회사에 입사하지 못했지만 영화출연 요청은 받았는데, 이때 주인규는 참여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2] 고려영화협회와 일본 동보영화사가 합작으로 만든 《망루의 결사대》, 통제회사인 조선영화사에서 만든 방한준 연출의 《거경전》, 최인규 연출의 《태양의 아들들》 등에 출연하였다.[2]2. 5. 해방 이후
1945년 8월 초 함경도는 소련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 끝에 해방되었고, 주인규는 청진감옥에서 풀려난 정치범, 지하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지역 자치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2] 함흥 검찰소 소장직을 맡았다.[2]1946년 소련 군정청에 불려가 북한영화 건설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소군정 후원으로 북한지역 내에 영화촬영소를 만들고 영화인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2] 1946년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산하 영화동맹 위원장에 선출되었고,[2] 1947년 2월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장이 되었다.[2] 1947년 북한 문예총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2]
1950년 영화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 연출에 참여했으나, 영화 개봉 전후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2] 주인규는 서울에서 영화인들을 소집, 교육하여 평양으로 데려가고, 전선에 종군영화인들을 투입하는 역할을 맡았다.[2]
1952년 휴전 후, 북한에서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면서 주인규 역시 탄압받게 되었다.[2]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종파분자로 몰렸고,[2] 수감 중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9월 자결하였다.[2]
3. 가계
아버지 주경팔, 동생 주선규가 있다. 일제 강점기의 노조운동가였던 주선규는 그의 동생이었다. 처 이인동과는 1926년에 이혼하였다.
참조
[1]
뉴스
영화로 혁명을 꿈꾼 사나이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
뉴스
남북 모두에 잊혀진 존재로 남은 '주인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