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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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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카프)은 1925년 사회주의 문학 단체들의 통합으로 결성된 단체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문학 활동을 통해 노동자, 농민의 계급 의식을 고취하고 일제에 맞서는 정치 투쟁을 목표로 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기관지 『문예운동』 발행, 좌익 문학 이론 연구, 부르주아 문인 비판 등이 있었으며, 김기진, 박영희, 임화 등이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카프는 1931년 조직 개편을 통해 각 분야를 독립시키고 활동을 강화했으나, 1930년대 초 내부 노선 갈등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35년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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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단체 정보
명칭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한글 명칭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한자 명칭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일본어 명칭ちょうせんぷろれたりあげいじゅつかどうめい
로마자 표기Joseon Peuroretaria Yesulga Dongmaeng
영문 명칭Korean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
약칭카프
언어별 명칭
한국어카프
영어Korean Artist Proletarian Federation
에스페란토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2. 조직

1925년 8월, 사회주의 문학 운동 단체 '염군사'와 '파스큐라'가 통합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카프)'을 결성했다. 박영희, 김기진, 이상화, 송영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이기영, 최서해, 한설야, 임화 등이 합류하여 조직을 확대했다. 1927년에는 조중곤, 김두용, 홍효민, 한식 등이 참여하여 계급 의식을 강조하는 문학 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1931년 조직을 개편하여 문학, 연극, 영화, 미술 분과를 독립시키고 중앙 협의체로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을 두었다.

2. 1. 강령

카프는 결성 당시에는 염군사의 강령을 그대로 계승하여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등을 열면서 좌익 문학 이론을 논하였다.[1] 1927년 9월에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면서 카프의 활동은 문학 이론화를 더욱 추진하였다.[1] 카프 이전의 소위 '신경향파(新傾向派)'라 불린 문학적 태도를 비판하고 발전시키면서 계급 이데올로기의 반영,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실주의 작품을 쓸 것을 요구하였다.[1]

카프의 가장 큰 목표는 당시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 부르주아 문인들의 타도였으며, 문학을 혁명적 사상의 이론과 전파에 이용하는 것이었다.[1] 그러나 한설야는 예술성을 너무 무시한 나머지 프로 문학 작가들의 작품은 문학적 재미가 부족했다고 회고한다.[1]

2. 2. 활동

1925년 카프 결성 이후 1934년까지 약 10년간 문단을 풍미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정치의식과 계급의식을 내포한 목적의식 문학이었다. 프로문학의 구심점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은 일반적인 문학 단체와 달리 정치성이 농후한 조직적인 단체였으며, 프로문학의 정치성은 이 조직에서 비롯되었다.[1] 1926년 기관지 《문예운동》을 통해 조직적인 문학운동을 전개하여 프로문학의 정치성을 보여주었다.[1] 1927년 박영희는 《문예 운동의 방향전환론》에서 "자연생장적 소설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문예운동은 계급적 혁명을 위한 목적의식을 갖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프로문학이 계급투쟁의 한 부분임을 강조했다.[1]

1926년 김기진은 《조선지광》에서 "신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서까래에 붉은 지붕만 입혀 놓은 건축이 있는가"라고 비평하며 프로문학이 형식을 무시하고 정치투쟁에만 몰두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1927년 과격파였던 박영희는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에서 "프로 작품은 군(君)의 말과 같이 독립된 건축물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큰 기계의 한 치륜(齒輪)인 것"이라고 반박하며 맹렬히 공격했다. 이 논쟁은 제1차 카프 논쟁으로, 김기진의 패배는 당시 프로문학의 공식주의적 경향을 보여준다.[1]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프로문학은 작품활동의 강조와 형식의 중요성을 반성하게 되었다. 1928년 박영희는 "예술 운동이 대중을 획득하려면 작품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최근 문예시감》)라며 작품활동을 강조했고, 작품형식 문제도 프로문학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1929년 김기진은 형식론을 제기하며, 프로문학이 계급투쟁을 위해 대중에게 계몽·선전하려면 평이한 문체와 대중적인 문학형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작품의 대중화를 위한 문학형식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1]

내용과 형식 문제와 관련하여 창작방법에 대한 재검토도 이루어졌다. 1928년 김기진의 《변증법적 사실주의》 발표를 시작으로, 1932년 이후에는 구소련 문학론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론 등으로 발전되었다.[1] 당시 창작방법을 중심으로 한 검토는 과거 프로문학의 공식적인 기계주의 문학관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프로문학의 약화 및 분열을 초래했다.[1]

1925년 8월, 좌익 문화운동 단체 ‘염군사’와 무산계급 문학 운동 단체 ‘파스큐라’가 연합하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설립했다. 박영희, 김기진, 이호, 이상화, 안석주, 송영이 발기인이었고, 이기영, 최서해, 한설야, 임화, 안막, 박팔양 등이 참여했다. 1927년에는 조중곤, 김두용, 홍효민, 한식 등이 참여하여 계급 의식적인 문학 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KAPF는 기관지 『문예운동』을 발행하며 당시 조선 좌익 문학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KAPF는 결성 초기 염군사의 강령을 계승하여 마르크스주의 연구회 등을 통해 좌익 문학 이론을 논의했다. 1927년 9월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면서 문학 이론화를 더욱 추진했다. KAPF는 이전의 ‘신경향파’ 문학을 비판하고 발전시키며, 계급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사실주의 작품을 쓸 것을 요구했다. 1931년 조직을 개편하여 문학, 연극, 영화, 미술 동맹으로 각 분야를 독립시키고 중앙 협의체로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설치했다.

KAPF의 주요 목표는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등 부르주아 문인들을 타도하고, 문학을 혁명적 사상 이론과 전파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설야는 예술성을 지나치게 무시하여 프로 문학 작가들의 작품이 문학적 재미가 부족했다고 회고한다. KAPF는 조선총독부의 탄압, ‘해외문학파’와의 대립,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1930년경 일본에서 귀국한 임화, 권환, 김남천, 안막 등이 볼셰비키주의를 주장하면서 KAPF 내 의견이 분열되었다. 1931년 6월 15일부터 10월 초까지 제1차 KAPF 일제 검거로 70여 명이 체포되었고, 1934년 4월 제2차 KAPF 일제 검거로 8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문학 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1935년 6월 KAPF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3. 문학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약칭 카프) 결성과 함께 본격화된 프로 문학은 1934년까지 약 10년간 한국 문단을 풍미하며 정치 및 계급 의식을 담은 목적의식 문학을 추구했다. 카프는 단순한 문학 단체를 넘어 정치성이 강한 조직체였으며, 프로 문학의 정치성은 이 조직에서 비롯되었다.[1]

카프는 문학을 독자적인 예술 영역으로 보기보다는 대중에게 계급 의식을 고취하고 선전하는 수단, 즉 정치 운동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했다. 초기에는 '신경향파' 문학의 자연발생적인 빈궁과 반항 의식을 비판하고, 조직적인 정치 투쟁을 의식한 목적의식 문학을 추구했다. 1927년 박영희는 《문예 운동의 방향전환론》에서 "자연생장적 소설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문예운동은 계급적 혁명을 위한 목적의식을 갖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프로 문학이 계급 투쟁의 한 부분임을 강조했다.[1]

1929년 김기진은 프로 문학이 계급 투쟁을 위해 대중에게 계몽과 선전을 하려면, 작품이 일반 하층 서민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도록 평이한 문체와 대중적인 문학 형식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품의 대중화를 위한 문학 형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1928년 11월에는 《춘향전》과 같은 가정 통속 소설의 형식을 차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프 내부의 소장파들은 작품 형식이 단순히 평이하거나 통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에 기반한 신(新)리얼리즘 수법과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식이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1]

1926년 1월, 카프의 준기관지로 발간된 《문예운동》은 3호 만에 폐간되었지만, 프로 문학 제1기에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잡지에는 김기진의 《본능의 복수》, 이익상의 《위협의 채찍》, 이기영의 《쥐 이야기》, 《팔아먹은 딸》, 최서해의 《의사》(醫師) 등이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들에는 여전히 신경향파의 자연발생적 요소가 남아 있었다. 1927년 자체적인 이론 투쟁을 거쳐 박영희의 《문예운동의 방향》이 발표된 이후, 목적의식기의 프로 문학 운동은 이론과 작품 모두에서 방향 전환을 반영했다.[1]

이러한 전환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조명희의 《낙동강》이었다. 이 작품은 제2기 프로 문학 작품으로, 이전의 신경향파 문학이 빈궁에 대한 반항을 자연발생적으로 그린 것과 달리, 빈궁의 원인을 민족적, 계급적 사정과 환경에서 찾았다. 《낙동강》에서 작가는 낙동강변 주민들의 빈궁한 삶이 자본 계급과 일제의 수탈 때문이라고 보고, 자각적인 계급 의식에 따른 반항을 시도했다. 또한, 목적 의식이 투철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계급 투쟁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중농의 몰락과 소농의 빈농화를 강조했다. 이로써 신경향파 문학에서 자각적인 계급 의식을 내세워 목적 의식에 입각한 프로 문학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명희의 다른 작품으로는 《저기압》(低氣壓, 1926), 《동지》(同志, 1927), 《한여름의 밤》 등이 있지만, 《낙동강》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박영희의 《지옥순례》(地獄巡禮), 이기영의 《천치의 윤리》, 최서해의 《홍염》(紅焰), 《가난한 아내》, 주요섭의 《개밥》, 송영의 《석공조합 대표》(石工組合代表) 등이 있으나, 목적의식기의 작품들은 이론에 비해 미숙한 점이 많았다.[1]

1929년 문학의 대중화가 강조된 이후 1932년까지는 프로 문학의 볼셰비키화 과정을 통해 작품 활동이 크게 강조되었다.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최서해의 《먼동이 틀 때》, 한설야의 《과도기》(過渡期), 이기영의 《고향》(故鄕, 1933), 《서화》(鼠火), 《홍수》(洪水) 등이 호평을 받았다. 시인으로는 유완희, 김창술, 홍양명, 임화, 박팔양 등이 활동했으며, 1929년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는 프로 시로서 널리 알려졌다. 유완희의 《우리들의 시》(1930), 이북명의 《질소비료공장》(窒素肥料工場, 1933) 등도 전형적인 프로 문학 작품이었다. 그러나 1934년 프로 문학의 지도적 이론가였던 박영희가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었다"라고 자기 비판을 한 것처럼, 당시 프로 문학은 대부분 도식적인 목적 의식이 앞서 작가의 창조성을 위축시켜 진정한 작품 생산을 이루지 못했다.[1]

3. 1. 내용과 형식 논쟁

1926년 김기진은 《조선지광》에서 프로 문학이 형식을 무시하고 정치 투쟁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기둥도 없이 서까래에 붉은 지붕만 입혀 놓은 건축이 있는가"라고 비판하며 프로 문학의 형식 경시를 지적했다.[1]

이에 대해 박영희는 1927년 《조선지광》에 기고한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에서 프로 문학 작품이 "큰 기계의 한 치륜(齒輪)"과 같다고 반박하며, 목적의식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프로 문학이 독립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한 부속품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제1차 카프 내부 논쟁으로, 김기진의 패배는 당시 프로 문학의 경직된 경향을 보여준다.[1]

이후 양주동은 1929년 예술파적 입장에서 문학 작품의 형식미를 강조하며 프로 문학의 내용 편중을 비판했다.[1]

이러한 논쟁을 거치면서 프로 문학은 작품 활동과 형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28년 박영희는 "예술 운동이 대중을 획득하려면 작품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며 작품 활동을 강조했고, 프로 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문학 형식 논의가 진행되었다.[1]

3. 2. 창작 방법론 논의

1928년 김기진이 《변증법적 사실주의》를 발표하면서 창작 방법론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1] 1932년 이후에는 소련 문학론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론이 등장했다.[1] 김기진, 박영희, 신유인, 백철, 임화, 안함광, 김남천 등이 창작 방법론 논의에 참여했다.[1] 이러한 논의는 프로 문학의 공식적인 기계주의 문학관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프로 문학의 약화와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1]

4. 주요 작품 및 작가

1926년 카프의 준기관지 《문예운동》에 발표된 김기진의 《본능의 복수》, 이익상의 《위협의 채찍》, 이기영의 《쥐 이야기》, 《팔아먹은 딸》, 최서해의 《의사》(醫師) 등은 신경향파적 요소가 남아 있었다.[1]

조명희의 《낙동강》(洛東江)은 빈궁의 원인을 민족적·계급적 사정과 환경으로 제시하고, 자각적인 계급의식에 의한 반항을 시도하여 목적의식에 입각한 프로 문학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저기압》(低氣壓, 1926), 《동지》(同志, 1927), 《한여름의 밤》 등도 조명희의 작품이다.[1]

박영희의 《지옥순례》(地獄巡禮), 이기영의 《천치의 윤리》, 최서해의 《홍염》(紅焰), 《가난한 아내》, 주요섭의 《개밥》, 송영의 《석공조합 대표》(石工組合代表) 등은 목적의식기의 작품들이다.[1]

1929년을 전후해서는 최서해의 《먼동이 틀 때》, 한설야의 《과도기》(過渡期), 이기영의 《고향》(故鄕, 1933), 《서화》(鼠火), 《홍수》(洪水) 등이 발표되었다.[1]

유완희, 김창술, 홍양명(洪陽明), 임화, 박팔양 등이 시인으로 활동했고,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가 프로 시로서 평가를 받았다.[1] 유완희의 《우리들의 시》(1930), 이북명(李北鳴)의 《질소비료공장》(窒素肥料工場, 1933) 등도 프로 문학 작품이었다.[1]

5. 발간 기관지

; 《문예운동》

1926년 1월에 창간된 프로문학파의 최초 기관지이다. 박영희가 주재했으며, 김기진, 홍명희, 김복진, 이상화, 조명희, 이익상, 최학송, 이기영 등이 집필에 참여하여 3호까지 발간되었다.[1]

; 《예술운동》

1927년 11월 창간된 카프의 기관지이다. 카프 전국대회 후 발간되어 제1차 방향전환의 계기가 되었으며, 1928년에 2호까지 나오고 《무산자》로 개칭되었다.[1]

; 《제3전선》

1927년 2월 도쿄에서 발간된 순문예지이다. 조중곤, 김두용, 한식, 홍효민 등이 1927년 7월 YMCA 회관에서 강연 후 이 잡지를 배부하다가 압수당했다.[1]

; 《조선지광》

1922년 발간된 종합지로, 학술논문 및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개벽》과 함께 프로문학의 활동 무대였으며, M·L당 기관지로 이성태가 주간했다.[1]

; 《조선문예》

1929년 5월 고병돈이 발행한 문예지이다. 박영희가 주간을 맡았으며, 카프 준기관지로 2호까지 발행되었고, 사상적 근거는 계급주의에 두었다.[1]

; 《조선문학

1936년 4월에 창간된 순문예지이다. 카프 해산 이후 이갑기, 한식, 한호 등 소장 개량주의파가 주로 활동했다.[1]

6. 중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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