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락
1. 개요
김하락은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1895년 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다. 서울로 이주하여 천문, 지리, 병서 등을 탐독했으며, 이천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민승천과 연합하여 활동했다. 광주 장항시장을 점령했으나, 이현을 빼앗기고 남한산성을 점령했으나 함락되었다. 이후 영남 지방으로 이동하여 의병 활동을 이어가다 영덕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그의 유고로는 『김하락진중일기』가 있으며,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본관 | 김해 김(金海 金氏) |
|---|---|
| 출생 | 1957년 4월 25일 (66세) |
| 소속 정당 | 무소속 |
| 학력 | 부산대학교 상학과 졸업 경성대학교 대학원 졸업 (경영학 석사) |
|---|
| 경력 | 제4대 부산광역시 사상구의원 제5대 부산광역시 사상구의원 제6대 부산광역시의원 제7대 부산광역시의원 제8대 부산광역시의원 제9대 부산광역시의원 사상구 의회 의장 (제5대) 부산시의회 교육위원회 위원장 (제7대) |
|---|
| 링크 | 김하락 블로그 |
|---|
-
한말 의병장 -
최익현
-
한말 의병장 -
안중근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동양 평화를 주장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
한국 사람에 관한 -
한덕수
-
한국 사람에 관한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2. 생애
경상북도의성군 출생으로 후에 서울로 이주했다. 천문, 지리, 병서, 의서 등을 널리 탐독했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조성화, 구연영, 김태원, 신용희 등과 함께 16일 새벽에 한강을 건너 이천으로 향했다. 17일 이천군에 들러 화포군 도령장 방춘식과 포군 중에서 100여 명을 징발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천을 중심으로 포군을 확보하고 이천 서쪽의 이현에 머물면서 동지들을 양근, 지평(구연영), 광주(조성화), 안성(김태원), 음죽(신용희) 등 각지로 파견하여 의병을 모았다. 그러나 안성에서는 이미 민승천이 거병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연합하여 대오를 편성했다.
이에 민승천을 2천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각 군의 도지휘가 되었다. 12월 5일 새벽 광주 장항시장을 장악했으나 12월 30일 적 2백여 명의 습격을 받아 고전했고, 궂은 날씨까지 겹쳐 결국 이현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듬해 1월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대오를 정비하고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포진을 재편했다. 대장에는 박준영, 여주대장에는 심상희를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 겸 지휘가 되었다.
1월 30일 이천에서 남한산성을 점령, 확보했다. 그러나 의병장 박준영과 광주 유수 김귀성은 관군의 유혹에 굴복하여 성문을 열었고, 2월 21일 산성은 함락되었다.
9개 연대를 거느리고 본진을 영남 지방으로 옮기기로 결심, 안동을 거쳐 호서의진의 서상렬과 협력하여 의성에 이르렀다. 의성의 오혁주, 영덕의 신돌석 , 안동의 유시연 등과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안동 화촌으로 가는 도중, 흥해를 거쳐 영덕으로 갈 때 300여 명의 적군과 싸워 총상을 입고, 강에 투신하여 사망했다.
유고로 『김하락진중일기』가 있다. 198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1. 의병 활동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종동생 조성학(趙成學)과 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신용희(申龍熙) 등과 더불어 16일 이른 새벽에 한강을 건너 이천으로 향했다. 17일 이천군에 들러 화포군 도령장(火砲軍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포군 중에서 100여 명을 징발해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천을 중심으로 포군을 확보하고 이천의 서쪽 이현(梨峴)에 머물면서 동지들을 양근·지평(구연영)·광주(조성학)·안성(김태원)·음죽(신용희) 등 각지로 파견해 의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안성에서는 이미 민승천(閔承天)이 창의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연합해 대오를 편성하였다.
이에 민승천을 이천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각 군 도지휘가 되었다. 12월 5일 새벽 광주 노루목〔獐項〕장터를 장악했으나 12월 30일 적 2백 여명의 습격을 받아 고전하다가, 일기불순의 악조건에서 결국 이현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듬해 1월 흩어진 병사를 모아 대오를 정비하고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의진을 재편성하였다. 대장에 박준영(朴準英), 여주대장에는 심상희(沈相禧)를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 겸 지휘가 되었다.
1896년 1월 30일 이천에서 남한산성을 점령, 확보했다. 그러나 의병장 박준영과 광주 유수 김귀성은 관군의 유혹에 굴복하여 성문을 열었고, 2월 21일 산성은 함락되었다.
군사 9개 연대를 거느리고 의진을 영남지방으로 옮길 것을 결심, 안동을 거쳐 호서의진의 서상열과 합세하기도 하면서 의성에 이르렀다. 의성의 오혁주(吳赫周), 영덕의 신돌석, 안동의 유시연(柳時淵) 등과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안동 화촌(花村)으로 들어가는 길에 흥해진(興海津)을 거쳐 영덕으로 들어가려는 300여 명의 적군을 토벌하던 중 총상을 당하자 강물에 투신해 순국하였다.
2.1.1. 이천·광주 지역 의병 활동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종동생 조성학(趙成學)과 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더불어 16일 이른 새벽에 한강을 건너 이천으로 향했다. 17일 이천군에 들러 화포군 도령장(火砲軍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포군 중에서 100여 명을 징발해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천을 중심으로 포군을 확보하고 이천의 서쪽 이현(梨峴)에 머물면서 동지들을 양근·지평(구연영)·광주(조성학)·안성(김태원)·음죽(신용희) 등 각지로 파견해 의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안성에서는 이미 민승천(閔承天)이 창의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연합해 대오를 편성하였다.
이에 민승천을 이천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각 군 도지휘가 되었다. 12월 5일 새벽 광주 노루목〔獐項〕장터를 장악했으나 12월 30일 적 2백 여명의 습격을 받아 고전하다가, 일기불순의 악조건에서 결국 이현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듬해 1월 흩어진 병사를 모아 대오를 정비하고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의진을 재편성하였다. 대장에 박준영(朴準英), 여주대장에는 심상희(沈相禧)를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 겸 지휘가 되었다.
1월 30일 이천에서 남한산성을 점령, 확보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박준영과 광주유수 김귀성이 관군의 유혹에 넘어가 성문을 열어주어 2월 21일 산성이 함락되었다.
군사 9개 연대를 거느리고 의진을 영남지방으로 옮길 것을 결심, 안동을 거쳐 호서의진의 서상열과 합세하기도 하면서 의성에 이르렀다. 의성의 오혁주(吳赫周), 영덕의 신돌석(申乭石), 안동의 유시연(柳時淵) 등과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2.1.2. 남한산성 점령과 함락
1896년 1월 30일 이천에서 남한산성을 점령, 확보했다. 그러나 의병장 박준영과 광주 유수 김귀성은 관군의 유혹에 굴복하여 성문을 열었고, 2월 21일 산성은 함락되었다.
2.1.3. 영남 지역 의병 활동과 최후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종동생 조성학(趙成學)과 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신용희(申龍熙) 등과 더불어 16일 이른 새벽에 한강을 건너 이천으로 향했다. 17일 이천군에 들러 화포군 도령장(火砲軍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포군 중에서 100여 명을 징발해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천을 중심으로 포군을 확보하고 이천의 서쪽 이현(梨峴)에 머물면서 동지들을 양근·지평(구연영)·광주(조성학)·안성(김태원)·음죽(신용희) 등 각지로 파견해 의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안성에서는 이미 민승천(閔承天)이 창의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함께 연합해 대오를 편성하였다.
이에 민승천을 이천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각 군 도지휘가 되었다. 12월 5일 새벽 광주 노루목〔獐項〕장터를 장악했으나 12월 30일 적 2백 여명의 습격을 받아 고전하다가, 일기불순의 악조건에서 결국 이현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듬해 1월 흩어진 병사를 모아 대오를 정비하고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의진을 재편성하였다. 대장에 박준영(朴準英), 여주대장에는 심상희(沈相禧)를 추대하고, 자신은 군사 겸 지휘가 되었다.
1월 30일 이천에서 남한산성을 점령, 확보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박준영과 광주유수 김귀성이 관군의 유혹에 넘어가 성문을 열어주어 2월 21일 산성이 함락되었다.
군사 9개 연대를 거느리고 의진을 영남지방으로 옮길 것을 결심, 안동을 거쳐 호서의진의 서상열과 합세하기도 하면서 의성에 이르렀다. 의성의 오혁주(吳赫周), 영덕의 신돌석, 안동의 유시연(柳時淵) 등과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안동 화촌(花村)으로 들어가는 길에 흥해진(興海津)을 거쳐 영덕으로 들어가려는 300여 명의 적군을 토벌하던 중 총상을 당하자 강물에 투신해 순국하였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김하락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4. 유고
유고로는 『김하락진중일기 (金河洛陣中日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