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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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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익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1833년에 태어나 1907년에 사망했다. 그는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고,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을사늑약 체결 후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순국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개항과 외세 침략에 저항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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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채용신 화백이 그린 최익현 초상화
채용신 화백이 그린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화
이름최익현
한자 표기崔益鉉
로마자 표기Choe Ikhyeon
출생일1833년 12월 5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 (현재 대한민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사망일1906년 11월 17일
사망지일본 쓰시마국 이즈하라
사망 원인병사
국적조선
본관경주(慶州)
초명최기남
찬겸
면암
종교유교(성리학)
아버지최대(崔岱)
자녀최영조 (첫째 아들)
최영학 (둘째 아들)
최영복 (셋째 아들)
손자최창규
직업 및 활동
직업학자
정치인
철학자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주요 활동신창현감 (1860년 ~ 1861년)
관직호조참판 (1871년 12월 5일 ~ 1873년 12월 30일)
경기도 관찰사 (1898년 ~ 1899년)
정치 성향
정당노론 후예 세력 잔존 위정척사파
학력
학력1855년 과거 급제
훈장
훈장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기타 정보
웹사이트두피디아 최익현

2. 주요 이력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1]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 도정 등의 벼슬을 거쳤다.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지지했으나, 1873년 음력 10월1874년 음력 11월 두 차례에 걸쳐 흥선대원군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2] 이후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반대하여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를 올리고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다.[7] 을사늑약 이후에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했다.[9]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 1906년 임병찬 등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하였으나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14][15][16] 대마도에서 일본식 단발 요구에 항의하여 단식을 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3개월 뒤 발병(풍증)[19]단식 후유증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3. 생애

1855년 관직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 때 여러 관청의 관리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는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인 고종 시대에도 계속 벼슬을 했다.[1]

1872년, 흥선대원군의 아들 고종은 20세의 나이로 즉위할 준비가 되었지만, 대원군은 권력을 내놓으려는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여러 악행, 즉 관직 매매, 경복궁 중건을 위한 국민 세금의 불필요한 사용, 성리학 강학의 폐쇄, 그리고 외국 선박의 조선 입항 저지 실패 등을 지적하는 강력한 탄핵을 제기했다.[2]

최익현의 이념은 외국 배척이라는 점에서 대원군과 매우 유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익현은 섭정의 행동에 크게 실망했고, 곧 왕비가 될 명성황후 가문의 정치적 지원 또한 그가 섭정을 탄핵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3]

대원군의 지지자들은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지만, 그의 탄핵 시도는 불만을 품은 다른 사람들이 섭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대원군은 양주로 은퇴하게 되었다.[4] 그리고 최익현은 고종에 의해 곧 관직에 복귀했다.[5][6]

1876년, 고종은 강화도 조약 체결에 앞서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최익현은 수구파 양반들을 이끌고 조약에 반대하며, 이 조약이 서구 사상(천주교)의 유입과 일본 상품에 의한 한국 시장의 경제적 침탈로 이어져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주장했다.[7] 조약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반대로 인해, 최익현은 조약 체결 직후 일본에 의해 벼슬에서 쫓겨났다.[8] 이후 최익현은 항일 의병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갑오개혁 추진 세력은 국왕에게 모든 한국 남성은 상투를 잘라야 한다는 칙령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최익현과 다른 유교 보수 관료들은 분노했고, 최익현 자신은 머리를 자르기 전에 차라리 목을 베겠다고 선언했다.[11][12] 최익현과 그의 동료들은 시골 지역에서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 상인, 그리고 친일파들을 공격했다.[13]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당시 70세였던 최익현은 고종에게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직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14] 최익현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침략에 맞서 무기를 들고 의병의 정신을 되살릴 것을 선언했다.

최익현은 빠르게 400명의 지지자를 얻었고, 1906년 태인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순창군[15]에서 일본군과 직접 싸웠다.[16] 그러나 그는 곧 체포되어 쓰시마섬으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일본이 준 음식을 거부한 채 3개월 후 객사하였다.[17]

최익현의 의병 운동을 통한 무장 저항 격려 노력은 그가 사망한 후에도 1911년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민족주의와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심어준 결과였다. 그의 저서인 『면암집』은 일본 관리들에 의한 여러 차례의 민족주의 서적 숙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보존되었다.[18]

1873년 호조 참판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재정 정책과 쇄국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 실각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최익현은 2년간 제주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에는 “개국 통상은 망국을 가져온다”고 하며,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나타나 이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그 과격한 행동을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3년 후 풀려났지만, 현실에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갑오개혁 반대론, 단발령 거부를 주장했다. 1896년1898년에 재출사를 요구받았으나, 일본과 독립협회를 비난하는 의견서를 내고 곧바로 사임했다. 을사늑약 체결 직전, 고종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워 재출사에 응했으나, 독립운동가로서 일본 측에 의해 체포되어 한성에서 추방되었다.

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현재 정읍시 태인면)에서 문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어 가택연금(근처 외출은 자유)되었다.

대마도에서의 구금 첫날, 일본군 사령관으로부터 관(국왕으로부터 받은 모자)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국왕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일본군의 명령으로 벗을 수 없다”고 거부하고, 항의의 단식을 시작했다. 절식으로 죽더라도 일본군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유서까지 썼으나, 일본군 사령관이 절식으로 인한 죽음을 우려하여 명령을 철회했다.

최익현 사후, 독립운동에 대한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그의 저서는 모두 焚書되었고, 소유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나, 지하에서 돌려 읽히며 각지에서 비밀리에 보관되었다. 1989년에 전집이 발행되어, 국왕에게 보낸 「유소」도 수록되어 있다.

3. 1. 유년기와 수학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 내북면 가범리(嘉范里)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4세 때 단양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 때 부친의 명에 따라 이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군 벽계(蘗溪)에 은퇴한 노론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격몽요결, 대학장구(大學章句), 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그는 이항로의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로 인정받았다.

스승인 이항로로부터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20]

화서 이항로는 최익현에게 '면암'(勉菴)이란 호를 지어 주고 '낙경민직'(洛敬민直)이란 글을 주면서 항상 학문을 권면하였다. 이로부터 최익현은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받아 위정척사의 '구국부도'(救國扶道)의 의리를 구현시키고자 온 생애를 바쳤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유인석, 김평묵 등을 만나게 된다. 1855년(철종 6년) 2월에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린 강경(講經)에서 1등을 하여, 생원시나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도 그 해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3. 2.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근무하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비판했다.[1] 1864년 흥선대원군의 집권 초기 개혁 정책을 지지했으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남인북인 등용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1]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 중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백성들의 생계 문제와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물가 상승 및 재정 파탄을 지적하며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했다.[1] 사간원사간 권종록이 이를 무례하다며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고종은 그를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최익현은 8일만에 돈녕부 도정직을 사퇴했다.

1873년(고종 10년)에는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려 흥선대원군 실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 그는 흥선대원군을 월권행위자로 보았으며, 서원 철폐보다는 남인북인을 등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1] 대원군이 남인북인을 등용하는 것 역시 정사를 어지럽히는 행위라 보고 대원군 집권 명분의 정당성이 없음을 들어 탄핵하였다.[1]

1873년 이현일, 윤휴남인을 복권하려는 시도에 김평묵과 함께 강하게 반대했다.[1] 최익현과 김평묵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남인윤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라고 주장하며 이들의 복권 여론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1]

3. 3.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 운동

1876년(고종 13년),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 논의가 시작되자,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에 반대하며 개항오불가(開港五不可)의 5조(條)로 된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를 올렸다.[7] 그는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조약 체결이 서구 사상(천주교)의 유입과 일본 상품에 의한 한국 시장의 경제적 침탈로 이어져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주장했다.[7] 그는 자신의 머리를 치고 가야 통상할 수 있다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 상소는 외면되었고, 최익현은 흑산도에 4년간 위리안치되었다.[8]

개항 이후, 외국 자본의 침투와 경제적 진출은 농촌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고, 정치적, 군사적 침략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정부의 개화 시책을 비판했고, 위정척사의 배일 운동이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879년 석방된 최익현은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

1894년 갑오개혁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을 조직하려다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말로 강제적 단발령에 저항했다. 이는 당시 유학자들의 뜻을 함축한 표현이었다.[11][12]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단발령이 시행되자 최익현은 유림 거두들과 연명하여 단발령은 야만적인 행태라며 규탄했다. 1896년 초, 내부대신 유길준은 유생들의 단발 반대 시위 배후로 최익현을 지목하고 체포를 지시했다. 유길준은 최익현에게 고시문을 보이며 단발을 강행하려 했으나,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질타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여 실패했다.

최익현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민권당, 민권지당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21] 그는 1898년 12월 10일 상소문에서 이들이 변란을 조장하는 발판이라며 혁파를 건의했다.[21] 그는 이들이 정부 대신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고,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속일 수 있다고 보았다.[21]

3. 4. 대한제국 시기

1898년(광무 1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제수되어 입궐했고, 이어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의정부찬정(贊政)이 되었다. 그해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후진 교육에 힘썼다.

그는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통해 위정척사론을 전파하고자 했다. 세상이 혼란한 것은 인륜과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정론과 정학의 수호를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러일전쟁 발발과 일제의 군사적 국권 침탈을 보고 '궐외대명소'(闕外待命疏)를 올려 외세 척결과 국권 수호 방책을 제시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존 심리 금지 등을 상소했다. 한성부 거리에서 당시 내각 담당자들을 규탄하며 이들의 파면과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고향으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이를 늑약으로 간주하고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늑약 체결을 나라의 멸망으로 보고, 조약 체결 당사자 5명의 처단을 주장하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불법 조약의 폐기, 취소와 의병 항일전을 천명하였다. 또한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발표하여 항일 투쟁을 호소하였으며, 포고문과 신문을 통해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 상품 불매 운동 등을 촉구하였다.

3. 5. 의병 항쟁과 순국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이를 나라의 멸망으로 간주하고 조약 체결에 참여한 5명의 대신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청토오적소'와 '창의토적소'를 올렸다.[19] 또한 8도 백성에게 항일투쟁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본 상품 불매 운동 등을 촉구했다.

1906년 1월, 최익현은 충청남도 노성 궐리사에서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국권 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이 자리에는 1896년 진주의병진에서 활약했던 정재규도 참석했다. 1906년 2월에는 자신의 제자 임병찬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거사를 계획하고, 담양 용추사에서 호남의 유학자 50여 명을 소집하여 항쟁 방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을 작성하고,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외세 척결과 부패 관료 처단을 위한 의병 봉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은 문인 수십 명과 함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15][16] 그는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악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발표했다. 이날 최익현의 호남의병진은 태인 본읍으로 진군하여 향교에서 <기일본정부서>를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에 대해 '의를 저버리고 신의를 배반한'(기의배신) 죄상을 16가지로 나누어 조목조목 논술하고, 일제의 각성을 촉구했다.

최익현 의병진은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호남 각지를 행군하면서 무기와 군사를 모아 초기 80여 명에서 900여 명으로 병력이 늘어났고, 소총 등의 화기로 무장하여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는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조칙과 관찰사 고시문을 보냈으나, 최익현은 이를 거절했다.

한국 통감부의 명령을 받은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동원해 6월 11일 순창 외곽을 봉쇄했다. 최익현은 이들이 일본군인 줄 알고 전투 태세에 돌입했으나, 곧 동족인 진위대 군사임을 알고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고자 진위대 측에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 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는 내용의 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진위대는 최익현의 호소를 묵살하고 공격을 가해 왔다. 의병 측은 '동포끼리는 싸워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응전하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진영이 와해되었다. 최익현은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은 모두 떠나라"고 하며 순창 객관에 그대로 눌러앉았고, 22명이 그의 곁을 지켰다.

1906년 6월 13일, 최익현을 포함한 13명의 의병들은 궁내부특진관에서 해임되었고, 6월 14일 전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부로 이송되어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되었다. 8월 하순, 최익현과 임병찬은 쓰시마섬 엄원 위수영으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최익현은 일본 정부 측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단식에 돌입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하자 임병찬에게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19]

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1906년 10월풍증이 발병하였고, 1907년 1월 1일 쓰시마섬 감옥에서 풍증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17]

4. 사상

최익현은 성리학적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중화사상을 굳게 지키며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는 서구 문물뿐만 아니라 개화된 일본 역시 배격했으며, 동학 농민 운동의 농민군과 동학도들을 도적으로 비판했다. 전통적 왕조 질서를 뒤흔드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대한제국의 수립과 황제 칭호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24]

최익현은 평등 사회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부와 권력, 사회적 지위를 위한 경쟁이 과열되어 천박한 사회가 될 것을 경계했다. 특히 독립협회를 민권당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국회나 의회를 통해 정부 고위층에 압력을 가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길 것을 우려했다.[25] 그는 이러한 행위를 일종의 협박으로 간주하고 강하게 비판했다. 백정 박성춘의 연설에 대해서는 패거리들의 작당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1873년부터 1876년까지 최익현은 김평묵 등과 함께 상소를 통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반역죄로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인윤휴 이후로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되었으며,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의 후손들이 백성을 선동하여 도성과 대궐을 침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이들의 복권 여론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24]

5. 평가

최익현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추구했던 가치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더불어민주당진보 진영에서는 최익현을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한 선구자로 높이 평가한다. 그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개항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고,[7] 1895년 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11][12][13]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다시 한번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였다.[14]

반면, 국민의힘보수 진영에서는 최익현을 시대착오적인 쇄국주의자로 비판한다. 이들은 최익현이 흥선대원군과 마찬가지로 개방에 소극적인 쇄국주의적 한계를 보였다고 지적한다.[2]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최익현은 수구파 양반들을 이끌고 조약에 반대하며, 이 조약이 서구 사상(천주교 등)의 유입과 일본 상품에 의한 한국 시장의 경제적 침탈로 이어져 국가에 해롭다고 주장했다.[7]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갑오개혁 추진 세력이 국왕에게 모든 한국 남성은 상투를 잘라야 한다는 칙령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을 때, 최익현은 다른 유교 보수 관료들과 함께 분노했고, 머리를 자르기 전에 차라리 목을 베겠다고 선언했다.[11][12]

이러한 상반된 평가 속에서도 최익현이 조선 말기 격동의 시기에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외세에 저항했던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며 고종의 친정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했으며, 쓰시마섬에 유배되어 단식 끝에 순국했다.[17]

5. 1. 긍정적 평가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며 개항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고,[7] 1895년 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11][12][13]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다시 한번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하였다.[14]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애국지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에는 동조하면서도 그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2][3]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에는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나타나 격렬하게 반대하였다.[7] 일본에 의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을 때에는 일본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항거하다 순국하였다.[17]

성리학적 지식인의 절의와 지조를 보여준 표상으로 여겨진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수학하였으며,[10]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개항과 개화에 반대하였다. 단발령에 대해서는 "내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11]

5. 2. 부정적 평가

최익현은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성리학적 세계관에 갇혀 근대적 개혁을 거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흥선대원군과 마찬가지로 개방에 소극적인 쇄국주의적 한계를 보였다.[2]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최익현은 수구파 양반들을 이끌고 조약에 반대하며, 이 조약이 서구 사상(예: 천주교)의 유입과 일본 상품에 의한 한국 시장의 경제적 침탈로 이어져 국가에 해롭다고 주장했다.[7] 그는 조약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로 인해, 조약 체결 직후 일본에 의해 벼슬에서 쫓겨났다.[8]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의 지원을 받는 갑오개혁 추진 세력이 국왕에게 모든 한국 남성은 상투를 잘라야 한다는 칙령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을 때, 최익현은 다른 유교 보수 관료들과 함께 분노했고, 머리를 자르기 전에 차라리 목을 베겠다고 선언했다.[11][12]

이러한 모습들은 그가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며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5. 3. 중도진보적 관점의 종합 평가

최익현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 의병장으로, 개화와 외세 침략에 맞서 유교적 가치를 지키려 했던 인물이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며 고종의 친정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특히 관직 매매,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과도한 세금 징수, 서원 철폐 등을 강력하게 비판했다.[2] 그러나 외세에 대한 배척은 대원군과 유사한 입장이었다.[3]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에는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개화 세력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7] 이러한 그의 활동은 위정척사 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최익현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단발령에 반대하며 "차라리 목을 베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고 말하며 강력하게 저항했다.[11][12] 이는 당시 유교적 가치관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저항했으며, 쓰시마섬에 유배되어 단식 끝에 순국했다.[17] 그의 항일 의병 투쟁은 이후 항일 무장 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익현은 비록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개화에 반대했지만, 그의 위정척사 사상과 항일 의병 활동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6. 저서 및 관련 자료


  • 勉庵集|면암집중국어
  • 勉庵續集|면암속집중국어
  • 최익현, 《면암집》(민족문화추진회, 1978)


시문집으로 「면암집」이 있다.[1] 최익현 사후, 독립운동에 대한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그의 저서는 모두 분서(焚書)되었고, 소유하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나, 지하에서 돌려 읽히며 각지에서 비밀리에 보관되었다.[1] 1989년에 전집이 발행되어, 국왕에게 보낸 遺疏|유소중국어도 수록되어 있다.[1]

7. 가계

이름비고
최영조(崔永朝)장남
최영학(崔永學)차남
최영복(崔永福)삼남
최창규현손, 前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1]

8. 관련 문화재

최익현 관련 문화재
명칭지정 번호
최익현 초상대한민국 보물 제1510호
화순 춘산영당 최익현 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3호
최익현선생묘충청남도 기념물 제29호
예산 최익현선생재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5호
청양 모덕사 최익현 초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하동 운암리 최익현 영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3호
곡성 오강사 최익현 초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81호
채산사경기도 기념물 제30호


9. 최익현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웹사이트 ko:최익현 http://terms.naver.c[...]
[2] 서적 Korea, A History of
[3] 서적 The History of Korea
[4] 서적 A History of Korea
[5] 서적 The History of Korea
[6] 웹사이트 http://www.koreanhis[...] 2017-08-00
[7] 서적 The History of Korea
[8] 서적 The History of Korea
[9] 서적 The History of Korea
[10] 서적 Korean History: Discovery of Its Characteristics and Developments
[11] 서적 The History of Korea
[12] 서적 The History of Korea
[13] 서적 The History of Korea
[14] 서적 The History of Korea
[15] 서적 Korean History: Discovery of Its Characteristics and Developments
[16] 서적 The History of Korea
[17] 웹사이트 Association for Asia Research- Profile of a Tonghak rebel http://www.asianrese[...] 2013-01-30
[18] 서적 The History of Korea
[19] 서적 대마도일기
[20] 뉴스 새로 쓰는 선비론 (21) - 면암 최익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1998-03-05
[21] 간행물 고종실록 38권, 1898년(고종 35년, 대한 광무(光武) 2년) 12월 10일 양력 2번째기사, 최익현이 시행해야 할 사항을 갖추어 상소를 올리다
[22] 웹사이트 최익현 선생 묘 http://www.yesan.go.[...] 예산군청
[23] 뉴스 동아일보 1928-05-11
[24] 서적 意識과歷史: 韓國의 文化傳統과 社會變動 一潮閣 1991
[25] 서적 意識과歷史: 韓國의 文化傳統과 社會變動 一潮閣 1991
[26] 서적 意識과歷史: 韓國의 文化傳統과 社會變動 一潮閣 1991
[27] 서적 意識과歷史: 韓國의 文化傳統과 社會變動 一潮閣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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