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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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화집은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난 축구 선수, 심판, 감독, 행정가이다. 광성보통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 보성전문학교를 거치며 선수로 활동했고, 1929년과 1930년 경평전에서 경성 대표로 뛰었다. 대한민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무학여자중학교 축구부,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농구 선수로도 활동했다. 1949년 대한체육회 공로자 표창장을 수상했다.

김화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화집
한글 이름김화집
한자 이름金和集
로마자 표기Gim Hwajip
출생일1909년 5월 26일
출생지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
사망일2006년 7월 8일
사망지서울, 대한민국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
신장168cm
포지션수비수
선수 경력
청소년 클럽배재고등보통학교 (1924-1928)
대학교보성전문학교 (1929-1932)
클럽경성축구단 (1933-1934)
지도자 경력
대학교동아대학교 (1948, 교수 겸 코치)
중앙대학교 (1953-, 교수 겸 코치)
건국대학교 (-1975, 교수 겸 코치)
국가대표팀대한민국 (1952–1954)
여자대한민국 여자 (1984-1986)
중학교마산무학여자중학교 (1949)
행정가 경력
조선축구협회발기위원 (1933)
심판위원 (1933)
서무위원 (1939-???)
대한축구협회이사 (1945-1948, 1950-1956)
평의원 (1949-1955)
부회장 (1957-1959)
선수선발위원 (1959)
여자축구위원장 (1986)
소년체육협회이사장 (1955-???)
대한체육회이사 (1957-1958)
IOC위원 (1963)
한국OB축구회명예회장 (1993-???)
연맹전임원 (1934-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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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1909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광성보통학교에서 처음으로 축구를 시작한 뒤, 1924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고 1929년에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29년과 1930년에 경평전에서 경성 대표로 뛰기도 하였다.

3. 심판 경력

1933년 선수 생활을 마치고 심판으로 전향하여 경평전 심판을 맡았다. 같은 해 조선축구협회 창립 발기 위원으로 참가하고 심판 이사가 되었다. 1937년 전국 축구 대회 결승에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심판을 맡았다. 1951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 축구 연맹(FIFA) 공인 국제 심판 자격을 취득하여 1954년까지 심판 활동을 하였다.

4. 감독 경력

김화집은 1952년 4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1952년 하계 올림픽 참가를 준비했으나, 정부 예산 부족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무산되었다. 1953년 동남아시아 원정에서 과도한 비용 사용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949년 6월 무학여자중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전국 여자 체육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1985년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을 창단했으나, 1년도 안 되어 해산되었다. 1988년 재창단 후 1989년 일본과의 데뷔전에서 크게 패하고, 이후 대회에서도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다시 해산되었다.

4.1. 대한민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1952년 4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1952년 하계 올림픽 참가를 위해 같은 해 3월 15일부터 3월 17일까지 선수 선발전을 치렀다. 그러나 정부 예산 부족으로 구기 종목인 축구와 농구 중 한 종목만 보내기로 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두 종목 모두 출전을 금지시켜 올림픽 참가가 좌절되었다. 1953년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원정 순회 경기를 통해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열세 경기를 가진 후 귀국하였다. 하지만 원정 비용으로 14600USD를 사용해 김화집은 대표팀 감독에서 자진 사퇴하였다.

4.2. 무학여자중학교 축구부

1949년 6월, 체육신문사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전국 여자 체육 대회에서 김화집은 무학여자중학교 감독으로 출전, 우승을 차지하였다.

4.3.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1985년 4월 12일 대한민국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을 창단하였다. 하지만 1년도 못 되어 흐지부지 해산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88년에 대표팀을 재창단하고, 1989년 일본과의 데뷔전을 치렀으나 1:15로 패하였다. 이어 열린 대회 5연전에서는 2득점 30실점(1승 4패)을 기록한 뒤 다시 해산되었다.

5. 기타 경력

농구 선수로도 활동하여 농구연맹전에 참가하는 등 축구보다 농구에서 더 활약했다.

6. 사망 및 사후

2005년 5월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 생활을 거쳐 2006년 7월 8일에 사망하였다.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김화집상이 제정되었다. 2005년 6월 서울 월드컵 경기장 내에 개관된 축구 명예의 전당에 공헌 부문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7. 수상

1949년 대한체육회 공로자 표창장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