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르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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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꼬르뷰로는 1922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갈등이 심화되자, 코민테른은 두 파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꼬르뷰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했으며, 국내 당 건설을 위해 국내부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각 분파를 통합하려 했다. 꼬르뷰로 국내부는 화요회를 결성하는 등 활동을 펼쳤으며, 이후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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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뷰로 | |
|---|---|
| 지도 | |
| 기본 정보 | |
| 국가 | 러시아 |
| 연방 주체 | 케메로보 주 |
| 도시 구역 | 꼬르뷰로 도시 구역 |
| 지리 | |
| 좌표 | 54°44′00″ с. ш. 86°45′00″ в. д. |
| 시간대 | MSK+4 (UTC+7) |
| 인구 | |
| 총 인구 | 25,414 명 (2023년) |
| 인구 밀도 | 168.8 명/km² |
| 역사 및 문화 | |
| 설립일 | 1726년 |
| 도시 지위 획득 | 1989년 |
| 식별자 | |
| 전화번호 | +7 38456 |
| 우편번호 | 652640 |
2. 설립 배경
1919년 3.1 운동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이념과 노선으로 분화되었다. 특히, 사회주의 운동은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을 겪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은 이 두 파벌 간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이어진 사건이다.
코민테른은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통합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상하이파 및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양 파의 해체를 선언하고, 〈조선 문제에 대한 1922년 12월 결정서〉에 의해 1923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꼬르뷰로를 설치했다.[3] 꼬르뷰로는 조선 내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다.
2. 1. 코민테른의 개입
코민테른은 1921년 11월, 벨러 쿤(Bela Kun), 오토 쿠시넨(O. Kuusinen), 게오르기 사파로프(G. Safarov) 등으로 구성된 검사위원회를 통해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통합을 지시했다.[1] 1922년 4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의 위치를 치타로 정하고, 조선 내에 국내부를 설치하도록 결정했다.[2]2. 2. 베르흐네우진스크 대회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으로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대립이 무력 충돌로까지 확대되자, 코민테른 검사위원회의 벨러 쿤, 오토 쿠시넨, 게오르기 사파로프는 1921년 11월 15일 <코민테른 검사위원회 결정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1]"서로 충돌하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서로 연락하고, 필요하다면 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서 조선 내지 및 해외의 제 단체 대표로 구성된 대의원회를 소집할 때까지 양당은 서로 연합하여 쌍방 동수로 임시중앙간부를 조직한다는 결정을 인정하는 것을 조회(照會)하여 원동(동양)비서부는 이를 준행할 책임을 갖는다"[1]
1922년 4월 22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브란델, 쿠시넨, 사파로프는 "조선(고려)공산당 중앙간부는 그 위치는 치따(Chita)로 정함과 동시에 내지에는 조선부(국내부)를 설치할 책임을 진다"[2]는 결정을 내렸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1921년 11월 결정>과 <1922년 4월 결정>은 두 고려공산당 통합을 위해 1922년 10월 15일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고려공산당연합대회’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이르쿠츠크파가 중도에 회의를 거부함으로써 상하이파만으로 회의가 진행되었다.[3]
3. 꼬르뷰로 설립
코민테른은 1922년 10월 15일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서 이르쿠츠크파가 회의를 거부하면서 두 파의 통합이 실패하자, 같은 해 12월, 상하이파 및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양 파의 해체를 선언했다.[3] 그리고 〈조선 문제에 대한 1922년 12월 결정서〉에 의해 1923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꼬르뷰로(Корбюро)를 설치했다.[3]
꼬르뷰로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부(극동총국) 산하에 설치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했다. 의장에는 보이친스키, 위원에는 상하이파의 이동휘, 윤자영, 이르쿠츠크파의 한명서, 장건산, 김만겸, 고문으로는 정재달이 임명되었다.[3]
4. 꼬르뷰로의 활동
꼬르뷰로는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 공산주의 조직을 정비하고, 국내에 통일된 공산당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이를 위해 신철, 김재봉 등을 국내에 파견하여 사회주의 분파들과 접촉하고, 꼬르뷰로의 방침을 전달했다.[4]
베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에서 코민테른은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내지 중립파, 김약수파를 통합하여 고려부(꼬르뷰로)를 조직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두었다.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회(КИМ)의 지령에 따라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은 대표를 꼬르뷰로 국내부에 파견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5]
4. 1. 꼬르뷰로 국내부
1923년 5월, 서울에서 김재봉을 책임비서로, 신백우, 김약수, 이봉수, 원우관 등을 간부로 하는 꼬르뷰로 국내부가 조직되었다.[4] 꼬르뷰로 국내부는 공산청년회와 긴밀하게 협력했으며, 김찬(김낙준), 안병진 등이 간부로 참여했다.[4]꼬르뷰로 국내부는 코민테른에서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내지 중립파, 김약수파를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부(꼬르뷰로)의 국내 조직이었다. 꼬르뷰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두었고, 국내부를 국내에 조직하였다.[5]
꼬르뷰로 국내부의 공산청년회 조직은 사실상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구성원과 동일했다. 1923년 4월, 제5차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책임자인 신철과 간부 안병진은 꼬르뷰로 국내부의 공산청년회 집행부서를 겸직하고 있었다.[6] 이는 꼬르뷰로와 국내부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계열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국제공산청년회(КИМ)에서 활동하던 이르쿠츠크파의 조훈 등은 국내부 활동에 지속적으로 개입했다.[6]
5. 화요회 결성
국내부는 윤덕병, 홍증식, 홍덕유 등 30여 명을 조직으로 끌어들이고 각 지역별 야체이카 건설에 착수했다.[7] 1923년 7월 7일 국내부는 합법적인 표면단체로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4년 11월 19일 신사상연구회는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는 화요파의 탄생을 의미한다.
6. 꼬르뷰로의 해체와 영향
꼬르뷰로는 파벌 간 갈등으로 인해 통일된 공산당 조직에 실패하고 1924년 3월 해체되었다.[1] 꼬르뷰로의 후신으로 오르그뷰로(조직국)가 설치되었지만, 이 역시 같은 문제로 1925년 2월 해체되었다.[1] 비록 꼬르뷰로는 실패했지만,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조직화와 조선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참조
[1]
서적
<第三國際共産黨(코민테른) 檢査委員會 決定書(1921년 11월 15일)>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1-11-15
[2]
서적
조선문제에 대한 코민테른집행위원회의 결정서(1922년 4월 22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1922-04-22
[3]
간행물
<コミンテルンと朝鮮>
1984
[4]
문서
<金洛俊調書(1931. 5)>
京城地方法院
1931-05
[5]
문서
<高麗共靑一般進行情況(1925년 4월 18일)>
1925-04-18
[6]
서적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과 활동(1920∼1928)
[7]
서적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과 활동(1920∼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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