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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로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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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조선로동당은 1946년 결성된 남한의 좌익 정당으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합당으로 출범했다. 초대 위원장은 허헌, 부위원장은 박헌영이었다. 초기에는 합법적인 활동과 파업 투쟁을 벌였으나, 이승만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테러와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 등을 주도했다. 1948년 북로당과 연합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으나, 남한 내에서는 남로당 명칭을 사용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2.7 파업,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 등 격렬한 활동 이후, 남로당은 대한민국에서 거의 소멸했다. 한편 월북한 남로당 출신들은 북한에서 김일성과 대립하다가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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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로동당 - [정당]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이름남조선로동당
로마자 표기Namjoseon rodongdang
한자 표기南朝鮮勞動黨
약칭남로당
창당일1946년 11월 23일
해산일1949년 6월 24일
합병 대상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합병 결과조선로동당
본부서울특별시
기관지해방일보
노력인민
이념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인민전쟁론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적 위치극좌
준군사조직조선인민유격대
노동조합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상징색빨강
남조선로동당 당기
지도부
서기장여운형
허헌
박헌영
상임위원회의 의장허헌
의장허헌
박헌영
이기석
부의장박헌영
이기석
기타 정보
회원수 (1947년 추정)360,000명

2. 남조선로동당의 초기 역사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근로인민당)이 합당하여 여운형(이후 탈당), 허헌, 박헌영을 중심으로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었다. 결당 대회에서는 "박헌영 만세!", "허헌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대한민국 내부에서 여수·순천 사건 등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남한 점령과 대한민국 단독 선거를 통한 이승만 정권 출범으로 제주 4·3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2. 1. 좌파운동의 재정립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남한에는 여러 좌파 정당들이 있었지만,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등으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은 사실상 정지된 상태였다. 이에 남한 내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3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었다. 초대 위원장에는 허헌이, 부위원장에는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내 주도권을 둘러싼 여운형과 박헌영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고, 박헌영이 주도권을 장악하며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을 비판하자, 여운형은 탈당 후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였다. 1946년 12월 2일, 허헌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회로동당(사로당)을 겨냥, 기회주의적이고 영웅주의적인 태도로 인민의 갈 바를 혼란시킨다고 비난하며, 진정한 동지들은 남로당에 합류하여 함께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2. 2. 좌익 운동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은 초기에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남한 내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노동자와 농민을 선동하여 각종 파업 투쟁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6년 10월 1일 대구 사건을 들 수 있다.[8]

이승만을 포함한 우익 세력의 단독 정부 수립 운동이 전개되면서, 남로당은 이에 반발하여 급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각종 테러, 게릴라전, 노동자 총파업 등을 주도하며 남한 정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주 4.3사건, 여순 사건, 남부군 사건 등이 발생했다.

1948년 8월, 남로당과 북로당은 연합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1949년 6월에는 비밀리에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합당 사실은 대외적으로는 물론 일반 당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1949년 6월 합당 이후에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남로당원과 게릴라들을 선동하고 격려하는 문서에는 여전히 남로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9] 이는 이들의 저항을 북한의 개입이 없는 남한 인민들의 자발적인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남로당 대신 합당된 조선로동당이라는 이름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였다.

3. 대한민국에서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근로인민당)이 합병하여 여운형(이후 탈당), 허헌, 박헌영을 중심으로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대한민국 내부에서 여수·순천 사건 등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남한 점령과 대한민국 단독 선거를 통한 이승만 정권 출범으로 제주 4·3 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3. 1. 2·7 파업과 남로당

1948년에 들어와 남로당은 강경투쟁으로 전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투쟁이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주도한 2·7 파업이다. 1948년 2월 7일 아침,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은 통신과 운송 설비의 가동을 중지시키며 총파업에 들어갔다.[8]

3. 2. 제주 4.3 사건

1947년 제주도에서 열린 독립운동 기념식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관련자들이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남로당 측을 중심으로 민관 총파업이 일어나자 경찰은 이를 무력 진압하고 다수의 경찰을 파면한 후, 이 자리를 우익 단체인 서북청년단 출신자들로 채워 강경 대응을 시작했다.

1948년 남로당의 김달삼 등은 5.10 총선거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등을 내세우며 경찰에 대해 무장 봉기를 일으켜 상호 간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후 9연대 사단장 김익렬 중령은 김달삼과 회담을 갖고 72시간 내에 전투를 중단하기로 합의했으나, 미군정 측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의 강경론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같은 해 10월, 정부 측이 파견한 군 병력이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돌입하면서 최대 수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들이 살해당하고 중산간 마을의 95%가 방화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3. 3. 여순 14연대 반란사건과 남로당

1948년 대한민국 국군 14연대의 인사계 상사이자 남로당원이었던 지창수가 4.3 사태 진압 명령에 항명하고 14연대를 이끌고 봉기하여 여수시순천시 일대를 장악했다가 진압당하고, 남은 일부는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으로 들어간 사건이다.[10]

여수는 수도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지창수가 부대원들에게 조선인민군이 남하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반란이 일어난 후에 남로당의 승인이 떨어졌다는 등의 정황 증거는 지창수가 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남로당 중앙당이 이를 사후에 승인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10월 27일 반란 사건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규모 공모자 색출이 진행되어 수많은 민간인들이 여순 반란 공모자로 몰려 희생되었다. 이후 남로당은 사실상 소멸 상태에 이르렀다.

한편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박정희 소령은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군대 내 공산주의자 색출 작업에서 남로당 하부조직책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 후 집행정지되었다.

3. 4. 이후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남로당의 대한민국 내 지상 활동은 거의 소멸했다. 남로당이 대한민국 내에서 주도한 여러 파업, 폭동, 반란 사건과 이후 이어진 한국전쟁을 겪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1공화국 시기에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대한민국 내 모든 공산주의 세력을 공권력을 이용해 축출하였다.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월북한 남로당 출신자들은 초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남로당파'로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관계로 정권을 잡은 만주파김일성과 대립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김일성은 전쟁 실패의 책임을 남로당파에게 전가하며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1953년, 이승엽, 박헌영 등이 '미제 간첩' 혐의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핵심 인물들이 연이어 숙청·처형당했다. 이후 8월 종파 사건 이전에 이미 남로당파는 와해되었다.

1953년 재판에서 이승엽 등 10명에게 사형, 윤순달에게 15년형, 이원조에게 12년형이 선고되었다. 1955년에는 박헌영이 기소되어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되었다. 1953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피고인 9명은 박헌영 재판까지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고, 박헌영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파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1956년 4월 당 대회에서 많은 남로당파가 해임되었지만, 일부는 살아남았다. 백남운, 박문규, 홍명희, 허성택은 처형을 면했고(허성택은 이후 숙청됨), 감금되었던 박갑동은 석방되었다. 박갑동은 이를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참조

[1] 논문 North Korea in 1985: A New Era after Forty Years
[2] 웹사이트 Asia Times Online :: Korea News - Part 5: Kim Il-sung and China http://www.atimes.co[...] 2016-09-04
[3] 논문 Politics in North Korea: Pre-Korean War Stage
[4] 웹사이트 Eisenhower Lecture #7: Allan R. Millett https://web.archive.[...] 2007-04-12
[5] 서적 The Korean War (Essential Histories) Osprey Publishing 2001-09-25
[6] 웹사이트 KBS WORLD Radio http://world.kbs.co.[...]
[7] 뉴스 New evidence of Korean war killings http://news.bbc.co.u[...] 2000-04-21
[8] 서적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9] 서적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나남출판
[10] 간행물 여수·순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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