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통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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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통의부는 1922년 8월 만주에서 결성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군 단체들이 통합의 필요성을 느껴 결성되었으며, 한족회,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12개 단체가 참여했다. 대한통의부는 민정 활동과 군사 활동을 병행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내부 이념 갈등과 의군부와의 분열을 겪었다. 1924년에는 임시정부 직할 군단인 육군주만참의부와 정의부에 흡수되며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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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투쟁 -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은 1937년 중국 우한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항일 무장단체로 창설되어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 일부는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어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 - 무장투쟁 - 북로군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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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은 대한제국 시기 개화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독립협회, 신민회, 서전의숙, 신흥무관학교, 《대동신문》,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과 독립 운동에 헌신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 신흥무관학교 - 이시영 (1868년)
이시영은 조선 후기 관료 출신 독립운동가로, 을사늑약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임시정부 요직을 역임하고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으나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며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 대한통의부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공식 명칭 | 대한통의부 |
| 한자 표기 | 大韓統義府 |
| 로마자 표기 | Daehan Tonguibu |
| 다른 이름 | 대한통군부 (大韓統軍府, Daehan Tongunbu) 통군부 (統軍府, Tongunbu) |
| 시대 | 전간기 |
| 지위 | 역사적으로 미승인된 자치주 |
| 공용어 | 한국어 |
| 정부 형태 | 대통령제 자치 협력 조직 |
| 수도 | 환런 (사실상) 관전 (사실상) |
| 역사 | |
| 건국 | 1922년 6월 3일 |
| 재조직 | 1922년 8월 |
| 해체 | 1924년 11월 |
| 해체 이유 | 분열 |
| 이전 국가 | 중화민국 |
| 계승 국가 | 대한민국 의병 사령부 정의부 참모부 |
| 정치 | |
| 초대 대통령 | 채상덕 (1922) |
| 2대 대통령 | 김동삼 (1922-1924) |
| 경제 | |
| 기타 | |
| 현재 국가 | 중국 |
| 민족 | 한국인 |
2. 통합의 배경
만주 지역의 재건은 항일투쟁에 협력하지 않은 자들(주구배)까지 포함하여 2년간의 투쟁 끝에 이루어졌지만, 통일된 독립운동 단체는 형성되지 못했다. 이웅해 총사령, 전덕원 참모, 오동진 재무, 현정경 사법, 김우근 연락, 서기 등이 만주 지역 재건에 책임을 맡았다. 각 단체를 통합하는 국가적 통일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고할신(고활신)을 선출하기로 결정하였다.[1] 이후 독립전쟁 전선을 재편성하기 위해 한국독립협회, 광한단, 한국광복군 대표들이 남만주 통합회의를 개최하였다.[1]
2. 1. 독립군 단체들의 난립과 시련
1919년 3·1 운동 이후, 백두산 서쪽과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송화강 중상류, 서간도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등 수많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일본은 만주 지역의 한국 독립군 진압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만주에 파병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는 등 독립군 토벌 작전이 실패하자, 일본은 보복으로 1920년 간도 대학살(경신참변)을 자행하여 독립군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인 마을을 파괴하고 한국인들을 학살하였다.[1]1920년 간도 대학살과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만주 지역의 무장 독립부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운동 기반 재건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2. 2. 통합의 필요성 대두
1920년 경신참변(간도 대학살)과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역량 결집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1] 독립운동가들은 과거 여러 단체로 나뉘어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것보다 통합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1]1922년 2월, 독립군 단체 대표들은 환인현(桓仁縣)에 모여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고, 기존 조직을 해체하여 통합 조직체인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다.[1] 1922년 봄, 한국독립군, 서로군정서, 보합단, 한국독립군총사령부, 군정부, 한국독립회, 광한단 등 여러 독립군 단체 대표들이 모여 ‘남만주 통일회의’를 개최하고 각 단체를 통합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3][4] 대한통군부에는 다음 단체들이 참여하였다.
1922년 2월, 서간도 지역의 한족회, 군정부, 한국독립단,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 등이 연합하여 대규모 반일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해 5월에는 김태연이 지휘하는 부대가 영산 경찰서를 공격하여 일본 경찰 3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1] 같은 해 만주로 귀국한 양기탁은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였다.[1]
3. 대한통의부의 결성
1922년 봄, 여러 독립군 단체 대표들이 모여 ‘남만주 통일회의’를 개최하고 각 단체를 통합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3][4] 6월 3일, 통일군정은 중앙참모회의를 열고 남만주 지역의 다른 단체들과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통일군정을 개방하고 다른 단체들과 무조건 통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5]
8월 23일, 환인현에서 여러 단체 대표 71명이 모여 남만주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각 단체가 기존 체제를 해체하고 통합하며, 군부대 명칭을 대한통의부 의용군으로 변경하는 등 6개 항에 대해 결의하였다.[1]
3. 1. 남만한족통일회와 대한통의부 성립
1922년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8단 9회 17개 단체에서 71명의 대표[8]가 참석하였다. 회의 결과 각 단체는 기존의 체제를 모두 해체하고 대한통의부로 통합하며, 소속 군대의 명칭은 대한통의부 의용군(大韓統義府義勇軍)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9]
대한통의부에 참여한 단체는 다음과 같다.
| 단체명 |
|---|
| 한족회 일부 |
| 서로군정서 |
| 대한독립단 |
| 광복군총영 |
| 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 |
| 광한단 (서로군정서 게릴라부대) |
| 벽창의용대 |
| 보합단 |
| 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 |
| 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 |
| 평북독판부 |
| 백산무사단 |
3. 2. 조직 및 체계
대한통의부는 총장 아래 10개의 부서를 둔 군정부 형태였다. 중앙 조직은 처음에는 환인현 마권자에 위치했으나, 이후 관전현 하루하로 이전했다.[7]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尙悳), 비서과장 고할신(高轄信) 등 주요 인물과 각 부서별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10]
| 직책 | 이름 | 비고 |
|---|---|---|
| 총장 | 김동삼(金東三) | |
| 부총장 | 채상덕(蔡尙悳) | |
| 비서과장 | 고할신(高轄信) | |
| 비서 | 김현배(金鉉培), 서정해(徐正海) | |
| 민사부장 | 이웅해(李雄海) | |
| 민사부감 | 강제의(康濟義) | |
| 민사부원 | 이태익(李泰翊), 임시형(林時瑩), 김동현(金東鉉), 이기신(李寄信), 김연수(金連秀), 최죽림(崔竹林), 홍순모(洪淳模) | |
| 검무국장 | 최명수(崔明洙) | |
| 검무감 | 김관성(金觀聲) | |
| 검무원 | 김태연(金泰淵), 강수영(姜壽永), 이만성(李萬聲), 이석수(李析洙), 정창화(鄭昌化) | |
| 교섭부장 | 김영만(金永萬) | |
| 교섭부감 | 김신택(金信澤) | |
| 교섭부원 | 김원상(金元常) | |
| 선전국장 | 김창의(金昌義) | |
| 선전원 | 정천욱(鄭干昱), 김동준(金練俊) | |
| 군사부장 | 양규열(梁圭烈) | |
| 군사부감 | 김혁(金赫) | |
| 사령장 | 김창환(金昌煥) | |
| 법무부장 | 현정경(玄正卿) | |
| 법무부감 | 박규수(朴奎洙) | |
| 법무부원 | 김창빈(金昌賓), 백세창(白世昌), 고민제(高民濟), 한봉조(韓鳳朝) | |
| 사판소장 | 이영석(李永植) | |
| 사판원 | 김구명(金九明) | |
| 재무부장 | 이병기(李炳基) | |
| 재무부감 | 정석태(鄭碩泰) | |
| 재무부원 | 백세희(白世熙), 최동원(崔東元), 김지섭(金志涉), 김영수(金永洙), 윤창철(尹昌哲), 백일룡(白日龍), 백신규(白紳圭) | |
| 학무부장 | 신언갑(申彥甲) | |
| 학무부감 | (결원) | |
| 학무부원 | 남정도(南延都), 이세준(李世俊), 곽상하(郭尙夏) | |
| 실업부장 | 변창근(邊昌根) | |
| 실업부감 | 유응하(劉應夏) | |
| 식산국장 | 박득산(朴得山) | |
| 권업부장 | 강제하(康濟河) | |
| 교통부장 | 오동진(吳東振) | |
| 교통부감 | 신태익(申泰翼) | |
| 교통국장 | 황동호(黃東浩) | |
| 교통국원 | 문경학(文景學), 장형옥(張亨玉), 고재윤(高在允), 박지수(朴枝秀), 고일준(高一俊) | |
| 참모부장 | 이천민(李天民) | |
| 참모부감 | 전덕원(全德元) | |
| 참모 | 윤세용(尹世溶), 손병헌(孫炳憲), 오석영(吳錫泳), 독고욱(獨孤旭) | |
| 도서국원 | 강병회(姜炳會), 한용숙(韓龍淑) |
민사, 군사, 재무, 학무, 법무, 교통, 실업, 권업, 참모부 등 10개 부서 외에도 입법기관 역할을 하는 중앙의회가 있었다.[10]
4. 대한통의부의 활동
대한통의부는 만주 지역 한인 사회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해 민정 활동과 군사 활동을 병행하였다.
민정 활동으로는 각 현에 총관사무소를 설치하여 한인 사회를 통할하고 주민 보호, 세금 징수,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11] 1923년 겨울 무렵까지 통화현, 환인현, 집안현, 관전현, 흥안현, 유하현, 임강현, 장백현 등에 총관사무소가 설치되었다.[11] 또한,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기관지 '경종보'와 '대한통의부공보(大韓統義府公報)'를 발행하여 한인 사회의 결속을 다졌다.[11]
군사 조직인 의용군은 1개 대대, 5개 중대, 유격대, 헌병대로 편성되었으며, 러시아식, 일본식 소총, 권총, 폭탄 등을 주 무기로 사용하였다.[13] 의용군은 군자금 모금, 친일파 처단, 일제 침략 기관 공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에는 국내 진입 작전을 통해 평안북도 신의주, 청성진 등지의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였으며, 1924년 1월 1일에는 남만주 독립군의 완전 통일, 군사교육기관 설립, 적극적인 국내 진입 작전 전개를 결의하였다.[14]
4. 1. 민정 활동
각 현에 총관사무소를 설치하여 한인 사회를 통할하고, 주민 보호, 세금 징수,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11] 총관은 1천 호의 장(長)으로 삼았고, 각 지방의 실정에 따라 100호 또는 200호로 1구(區)를 조직하였으며, 관할 지역을 4, 5개 구역으로 나누어 구장(區長)을 두었다. 1923년 겨울 무렵까지 총관사무소가 설치된 주요 지역은 다음과 같다.| 현 | 총관사무소 |
|---|---|
| 통화현 | 통화(通化)·통남(通南) |
| 환인현 | 환서(桓西)·환남(桓南)·환동(桓東) |
| 집안현 | 집안(輯安)·집서(輯西)·집남(輯南) |
| 관전현 | 관동(寬東)·관남(寬南)·관북(寬北) |
| 기타 | 흥안현(興安縣)·유하현(柳河縣)·임강현(臨江縣)·장백현(長白縣) 등 |
[11]
여러 자치사업을 벌였다. 흥경현에만 9개의 민족학교(소학교)를 설립하였고, 그중 하나인 광동학교는 교과목에 한국사와 한국어 및 군사학을 포함하였다. 기관지 '경종보'와 '대한통의부공보(大韓統義府公報)'를 발행하여 중앙기관의 활동을 보고하고 각 지역의 소식을 실어 한인사회의 결속을 다졌다.[11] 가구당 7원의 부과금을 걷어 예산을 조달했다.[12]
4. 2. 군사 활동
대한통의부의 군사 조직인 의용군은 1개 대대, 5개 중대, 유격대, 헌병대로 편성되었다. 주 무기는 러시아식, 일본식 소총, 권총, 폭탄 등이었다.[13] 의용군은 통의부에 참여했던 기존 단체들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편성되었으며, 각 중대에는 관할 구역과 임무가 부여되었다.[1]의용군은 한인 사회와 국내를 무대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파를 처단하며, 일제 침략 기관을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에는 국내 진입 작전을 통해 평안북도 신의주, 청성진 등지의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또한, 평안북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14]
1924년 1월 1일, 지휘부는 남만주 독립군의 완전 통일, 군사교육기관 설립, 적극적인 국내 진입 작전 전개를 결의하였다.[14]
의용군의 부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1923년 12월 기준, 일제 정보기관 자료).[13]
| 구분 | 지휘관 | 병력 | 무기 | 비고 |
|---|---|---|---|---|
| 본부 사령장 | 김창환 | |||
| 부관 | 김창훈 | |||
| 제1대대장 | 강남도 | |||
| 제1중대장 | 백광운 | 100여 명 | 100여 정 | 전성기 인원 800~900명 |
| 제1~3소대장 | 김보국, 전봉도, 김기준 | |||
| 제2중대장 | 최석순 | 130여 명 | 136정 | 전성기 인원 600~700명 |
| 제1~3소대장 | 김전, 이규성, 신태봉 | |||
| 소대 경리부장 | 현용환 | |||
| 제3중대장 | 최시흥 | 미상 | 미상 | 전성기 인원 500명, 국내진공전이 주임무 |
| 제4중대장 | 불명 | 50명 | 37정 | 전성기 인원 500명 |
| 제1~3소대장 | 장세룡, 김국보, 신홍영 | |||
| 제5중대장 | 김명봉 | 120명 | 123정 | 전성기 인원 500명 |
| 제1~3소대장 | 김창천, 김광추, 김일 | |||
| 독립소대장 | 김우근 | 독립부대 | ||
| 유격중대 | 김창룡, 김하석, 문학빈 | 150명 | ||
| 헌병대 | 김창헌, 송헌 |
5. 대한통의부의 분열과 재편
1922년 통군부 결성 당시에는 채상덕, 이웅해, 전덕원 등 복벽적 성향을 띤 인물들이 주도했으나, 8월 통의부가 결성되면서 점차 김동삼, 오동진, 현정경 등 공화적 성향의 인물들이 새로운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었다.[1] 그러나 의용군의 실질적 리더인 중대장 백광운, 최석순, 최지풍, 김명봉은 의병 출신이라 대개 복벽주의를 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덕원과 양기탁의 의견 불화가 표면화되었다. 전덕원은 최익현 휘하의 소모장 출신으로 대한독립단의 간부로 활약하였고, 양기탁은 애국계몽운동의 주도 인물로 1920년 말 만주로 온 이후 남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두사람의 개성 차이와, 통의부 결성과 함께 드러난 복벽주의 세력의 상대적 약화는 이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결국 1923년 2월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 계열은 통의부를 탈퇴하고, 환인현 대황구(大荒溝)에서 의군부를 결성하였다.
통의부와 의군부 간의 무력 충돌로 통의부의 무장 투쟁 역량과 한인 사회에 대한 통치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1924년 1월 8일 통의부 총장 대리인 민사부장 이웅해 명의로 조직 및 제도 정비, 군사력 강화, 재정 정비, 한인 교육 강화에 주안점을 두는 23개 항의 주요 내용을 발표하였다.[1] 1924년 3월 10일 행정 위원으로 현정경, 김이대, 이웅해, 김동삼, 오동진, 이종건, 강제하 등이 있었다.[1]
5. 1. 이념 대립과 의군부의 분리
1922년 2월 통군부 결성 당시에는 채상덕, 이웅해, 전덕원 등 복벽적 성향을 띤 인물들이 주도했으나, 8월 통의부가 결성되면서 점차 김동삼, 오동진, 현정경 등 공화적 성향의 인물들이 새로운 지도부를 형성하게 되었다.[1] 반면에 의용군의 실질적 리더인 중대장 백광운, 최석순, 최지풍, 김명봉은 의병 출신이라 대개 복벽주의를 따랐다.이런 가운데 전덕원과 양기탁의 의견 불화가 표면화되었다. 전덕원은 최익현 휘하의 소모장 출신으로 대한독립단의 간부로 활약하였고, 양기탁은 애국계몽운동의 주도 인물로 1920년 말 만주로 온 이후 남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두 사람의 개성 차이와, 통의부 결성과 함께 드러난 복벽주의 세력의 상대적 약화 추세는 곧 이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1922년 10월 14일 전덕원 계열의 의용군 20여 명이 관전현에 있던 양기탁 일행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1] 이 사건으로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가 현장에서 사살되고, 양기탁·현정경·김관성·황동호·고할신 등의 간부들이 체포·구금당하였다. 이후 통의부 내 복벽주의 계열과 공화주의 계열의 대립은 더욱 악화되어 12월 하순에는 교전이 있었고, 1923년 1월에는 홍경현 홍묘자(紅廟子) 방면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제5중대장 김명봉과 부대장 조태현은 통의부를 불신한다는 혐의로 피살되고, 제5중대의 무기가 타 중대에 의하여 강제로 압수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1]
결국 전덕원을 비롯하여 채상덕·김평식·오석영·박대호 등 복벽주의 계열은 1923년 2월 통의부를 탈퇴하고, 따로 환인현 대황구(大荒溝)에서 의군부를 결성하였다.
5. 2. 대한통의부의 재정비
통의부와 의군부 간의 무력 충돌로 통의부의 무장 투쟁 역량과 한인 사회에 대한 통치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1924년 1월 8일 통의부 총장 대리인 민사부장 이웅해 명의로 23개 항의 주요 내용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조직 및 제도 정비, 군사력 강화, 재정 정비, 한인 교육 강화에 주안점을 두는 내용이 포함되었다.[1]헌장 개정을 통해 최고 행정기관으로 10인으로 구성되는 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지방조직을 15개 지역으로 재구획하였으며, 각 총관소의 기구 중 참사를 폐지하고 서기(書記) 1인을 추가하였다. 군사 자문 기구인 군사참의회(軍事參議會)를 구성하였고, 장교 양성소(將校養成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1]
재정 강화를 위해 공동 경작제(共同耕作制)를 실시하고, 직공(織工)·철공(鐵工)·목공(木工)의 3개 공장을 설치하기로 계획하였다. 또한 각 지방에 1개의 공립 소학교(公立小學校)를 설치하고, 노동 강습소(勞動講習所)를 개설하여 17~35세의 청년들에게 기본 지식을 교육하기로 하였다. 이 외 대한민국 연호(大韓民國年號)를 사용하고, 특별 재판소(特別裁判所)를 설치하여 의군부 이탈파들을 재판하기로 하였다.[1]
1924년 3월 10일 행정 위원으로 현정경, 김이대, 이웅해, 김동삼, 오동진, 이종건, 강제하 등이 있었다.[1]
6. 해체와 계승
1923년 8월,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1·2·3·5 중대는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다 통의부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에 대표 5인을 보내 임시정부 직할 군단을 요청하였고, 1924년 6월 26일 임시정부는 육군주만참의부(참의부)를 수립하였다. 한편, 대한통의부의 남은 조직은 1924년 11월 정의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서간도 독립운동은 참의부와 정의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6] 대한통의부 잔존 세력은 1927년까지 활동하였다.[15]
6. 1. 참의부와 정의부로의 통합
1923년 8월, 중립적 태도를 유지해 온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1·2·3·5 중대는 각 중대장을 중심으로 500명 이상이 통의부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들은 백광운, 조능도, 박응백, 김원상, 조태빈 등 대표 5인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 임시정부 직할 군단을 요청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김승학과 이유필을 파견하여 1924년 6월 2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를 수립하였다. 참의부는 장백산 아래 즙안현을 중심으로 무송, 장백, 안도, 통화, 유화 등 압록강 연안 지역을 관할하였다.[6]한편, 대한통의부의 남은 조직은 1924년 11월에 결성된 정의부에 대부분 합류하였다. 이후 서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참의부와 정의부로 이동하였다.[6] 대한통의부의 잔존 세력은 1927년까지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15]
참조
[1]
웹사이트
일시 침체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다시 일으키다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0-0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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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kpedi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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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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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8]
인물
남만한족통일회 회장 김승만, 군정서 백광운, 김선풍, 김소하, 박태호, 이범천, 성오관, 김해운, 한응렬, 유상엽, 대한독립군 이웅해, 이영식, 최석순, 전창례, 정경순, 정강진, 김동식, 정득영, 김성산, 이봉주, 문창현, 맹철호, 김용칠, 이웅태, 사병희, 손병헌, 신세용, 김유성, 박수양, 신중집, 최해진, 조칠능, 강병회, 관전동로한교민단 이형갑, 이영해, 한일선, 한용숙, 곽상언, 대한광복군영 변창근, 이영선, 대한정의군영 박정석, 대한광복군총영 백남준, 김창의, 장영해, 이달성, 정도산, 평안북도독판부 신언리, 김동준, 김태현, 이관목, 임시형, 선우맹, 이덕숭, 안학세, 최한신, 권형걸, 문동승 등
[9]
서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10]
서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11]
서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12]
서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13]
서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14]
서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 :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2009
[15]
웹사이트
통의부[統義府] "일시 침체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여 다시 일으키다"
http://contents.kore[...]
2017-01-13 #웨이백 머신 날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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