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토 이에나가
1. 개요
나이토 이에나가는 미카와의 나이토 가문 출신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 후다이 가신이다. 뛰어난 궁술 실력으로 '무쌍의 궁수'라 불렸으며, 미카와 잇코잇키 당시 이에야스 편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오다와라성 공격 등 도쿠가와 군의 주요 전투에 참여하여 공적을 쌓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1590년에는 가즈사 사누키 번 2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1600년 후시미 성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장남 나이토 마사나가가 가문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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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 무장 -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마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워 유라쿠류를 창시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호 유라쿠는 도쿄도 유라쿠초 지명의 유래 설이 있다. -
센고쿠 무장 -
사나다 노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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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사람 -
정지용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생으로 모더니즘 문학을 선도했으며, 시문학 동인과 구인회 활동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
전사한 사람 -
정기원 (1559년)
정기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85년 문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사에 배향, 시호는 충의이며 저서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다. -
나이토씨 -
나이토 기요카즈
나이토 기요카즈는 에도 시대 다이묘이자 시나노 다카토 번의 초대 번주로서, 번의 재정 안정과 법도 정비에 힘썼으며 나이토 신주쿠 개설과 관련이 있고 에도 막부 요직을 역임한 예술가이다. -
나이토씨 -
나이토 마사아쓰
에도 시대 다이묘인 나이토 마사아쓰는 유나가야 번의 4대 번주로서 "충효·검약·부조"를 으뜸으로 하는 번법을 제정했으며, 영화 《초고속! 참근교대》 시리즈에서 사사키 쿠라노스케가 연기하기도 했다.
2. 생애
나이토 이에나가는 미카와 나이토 가문 출신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무장이다. 특히 활 솜씨가 뛰어나 '무쌍의 궁수'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미카와 잇코잇키 진압,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전봉되었을 때 가즈사 사누키 2만 석을 하사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후시미 성 전투에서 도리이 모토타다,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등과 함께 후시미성을 수비하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2.1. 초기 생애와 가문 계승
나이토 이에나가는 미카와 나이토 가문 출신으로, 조부 때부터 마쓰다이라씨(훗날의 도쿠가와씨)를 섬긴 후다이 가신 가문이다. 일찍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의형인 나이토 노부나리에게서 나이토 가문의 상속자 지위를 양보받아 그 뒤를 이었다.
아버지 나이토 기요나가와 함께 무용이 뛰어난 무장으로, 특히 활의 명수였기 때문에 "무쌍의 궁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후타마타성 공격 때에는 성주 요다 노부시게로부터 "근대 무쌍. 지금 벤케이(弁慶)라 칭할 만하다"고 칭찬받기도 했다.
한때 아버지와 함께 일향종(一向宗일본어) 문도였지만,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일본어) 발생 당시 이에나가는 아버지와 결별하고 잇키 무리에 가담하지 않았다. 대신 의리의 백부에 해당하는 이에야스 측에 가담해 잇키 무리를 진압하는 등 이에야스를 위해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 이로 인해 이에야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다.
이후에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등 도쿠가와 군의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오다와라성 공격 때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그 용모, 장수의 그릇에 해당한다"고 칭찬받아 조총 30정을 하사받기도 했다.
2.2. 무쌍의 궁수와 미카와 잇코잇키
나이토 가문은 이에나가의 조부 때부터 마쓰다이라씨(훗날의 도쿠가와씨)를 섬겼던 후다이 가신 가문이다. 이에나가는 일찍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의형인 나이토 노부나리에게서 나이토 가문의 상속자 지위를 양보받아 그 뒤를 이었다.
아버지 나이토 기요나가와 함께 무용이 뛰어난 무장으로, 활의 명수였기 때문에 '무쌍의 궁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때는 아버지와 함께 정토진종({{lang) 문도였지만, 미카와 잇코잇키(三河一向一揆일본어) 발생 당시 이에나가는 아버지와 결별하고 잇키 무리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의붓 백부에 해당하는 이에야스 측에 가담해 잇키 무리를 진압하는 등 이에야스를 위해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 이로 인해 이에야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다.
2.3. 도쿠가와 가문의 주요 전투 활약
나이토 이에나가는 아버지 기요나가와 함께 무용이 뛰어난 무장으로, 활의 명수였기 때문에 "무쌍의 궁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카와 잇코잇키에서 이에야스 측에 가담하여 잇키 세력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었다.
이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등 도쿠가와 군의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에나가의 용모를 칭찬하며 "장수의 그릇에 해당한다"고 평가하고 조총 30정을 하사하기도 했다.
1590년에는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옮겨 봉해졌을 때, 가즈사 사누키 2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1600년 (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후시미 성 전투에서 도리이 모토타다,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등과 함께 후시미성을 수비하다가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사후, 장남 마사나가가 뒤를 이었고, 아버지의 공적을 인정받아 영지 1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
2.4. 후시미 성 전투와 최후
게이초 5년 (1600년), 도리이 모토타다, (후코즈)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등과 함께 후시미성 수비를 담당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서군의 거병을 유도하는 데 있었다. 계획대로 미쓰나리 등의 서군은 거병하였으나, 이에나가는 모토타다, 이에타다 등과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후시미 성 공방전에서 미쓰나리의 대군에 끝까지 대항하다 전사하였다. 향년 55세였다. 사후 장남 마사나가가 뒤를 이었고, 전사한 아버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영지 1만 석을 추가받았다.
2.5. 사후
게이초 5년 (1600년), 도리이 모토타다,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등과 함께 후시미성 수비를 담당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 서군의 거병을 유도하는 데 있었다. 계획대로 미쓰나리 등의 서군은 거병하였으나, 이에나가는 모토타다, 이에타다 등과 함께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후시미 성 공방전에서 미쓰나리의 대군에 끝까지 대항하다 전사하였다. 향년 55세였다.
그의 사후, 장남 마사나가가 그 뒤를 이었고, 전사한 아버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영지 1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
이에나가는 오쓰시 미이데라(三井寺) 정의 다이렌지에 묻혔으며, 후에 사누키 하나가야의 젠쇼지(현재의 옛 쇼리진지(勝隆寺) 터)로 개장되었다.
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아버지 | 나이토 기요나가 |
| 어머니 | 불명 |
| 부인 | 마쓰다이라 다다나가의 딸 |
| 장남 | 나이토 마사나가 |
| 자녀 (생모 불명) | 마사키 요시노리의 부인 |
| 자녀 (생모 불명) | 아카마쓰 우지오키의 정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