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코즈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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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코즈 마쓰다이라가는 1524년 마쓰다이라 모토무네가 오바 가게노리를 토벌한 후 마쓰다이라 다다사다에 의해 시작된 가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590년 이에야스의 간토 이봉으로 무사시 오시 번을 다스렸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타다가 전사한 후, 다다토시가 미카와 후코즈 번을 다스렸고, 이후 시마바라 번주를 역임하며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 자작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마쓰다이라 다다쓰구가 당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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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코즈 마쓰다이라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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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 이름 |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 (深溝松平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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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문양 명칭 | 가사네오기 (重ね扇, kasane-ogi) |
본성 | 칭칭 세이와 겐지 |
시조 | 마쓰다이라 다다사다 |
가문 유형 | 무가 화족 (자작) |
출신지 | 미카와 국 누카타 군 후코즈 |
근거지 | 미카와 국 누카타 군 후코즈 도쿄 부 도쿄 시 시부야 구 |
2. 역사
1524년(다이에이 4년), 고이의 마쓰다이라 모토무네(松平元心)가 종가 마쓰다이라 나가치카의 명에 의해 누카타군 후코즈 성주 오바 지로자에몬(大場次郎左衛門)을 토벌하여 붙잡았으나, 모토무네는 자신의 전공을 동생 다다사다에게 양보했다. 그리하여 다다사다가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를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한편, 시마바라 혼코지(本光寺)의 설에 따르면, 이와즈 마쓰다이라 지카나가(松平親長)의 딸과 혼인하여 그 영지를 물려받아 시작되었다고도 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가문은 그 뒤로도 후코즈 성주로서 이어졌다. 2대 오이노스케 요시카게(大炊助好景), 3대 도노모노스케 고레타다(主殿助伊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오카자키성 독립 이후 젠묘쓰쓰미 전투(善明堤の戦い) 등에서 활약했다. 4대 도노모노카미 이에타다(主殿頭家忠)는 사카이 다다쓰구의 지휘 아래 나가시노 전투 등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1590년(덴쇼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토 이봉으로 이에타다는 무사시국 오시 번(忍藩) 1만 석을 받았다. 그러나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후시미 성 전투(伏見城の戦い)에서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부장으로 후시미성에서 농성하다 옥쇄했다.
3대 고레타다 이후 '도노모노스케'(4대 이에타다부터는 '도노모노카미')라는 통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마쓰다이라 도노모 가'(松平主殿家)라고도 불린다.
1601년(게이초 6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에타다의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토시는 미카와의 옛 영지를 회복하여 후코즈 번 1만 석을 받았다. 1612년(게이초 17년)에는 3만 석으로 증봉되어 미카와 요시다 번으로 옮겨갔다.
마쓰다이라 다다후사 대에 가리야 번, 후쿠치야마 번을 거쳐 1668년(간분 8년) 6만 5천 석으로 시마바라번에 봉해졌다. 1747년(간엔 2년) 우쓰노미야 번의 도다 다다미쓰와 교체되어 이봉되었지만, 1774년(안에이 3년)에 다시 시마바라 번으로 돌아와 8대에 걸쳐 지배하다가 메이지 유신을 맞았다. 유신 후에는 자작 가문이 되었다.
2. 1.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1524년(다이에이 4년), 고이의 마쓰다이라 모토무네(松平元心)가 종가 마쓰다이라 나가치카의 명에 따라 누카타군 후코즈 성주 오바 지로자에몬(大場次郎左衛門)을 토벌하였으나, 모토무네는 자신의 전공을 동생 다다사다에게 양보하였다. 그리하여 다다사다가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를 일으켰다고 전해진다.[1]한편, 시마바라 혼코지(本光寺)의 기록에 따르면, 이와즈 마쓰다이라 지카나가(松平親長)의 딸과 혼인하여 그 영지를 물려받아 시작되었다고도 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1]
초기 계보에 한 세대 정도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있으며,[1] 통설에서는 고이 마쓰다이라 가의 초대 당주로 알려진 마쓰다이라 다다카게(모토무네, 다다사다의 아버지)가 다이에이 연간(1521년 ~ 1528년)에 후코즈를 거점으로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경우 다다카게가 초대 당주가 된다.[1]
2대 오이노스케 요시카게(大炊助好景), 3대 도노모노스케 고레타다(主殿助伊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카자키성에서 독립할 때부터 젠묘쓰쓰미 전투(善明堤の戦い) 등에서 활약했다.[1] 4대 도노모노카미 이에타다(主殿頭家忠)는 사카이 다다쓰구(酒井忠次)의 지휘 아래 나가시노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1]
1590년(덴쇼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면서, 이에타다는 무사시국 오시 번(忍藩) 1만 석을 받았다.[1]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후시미 성 전투(伏見城の戦い)에서 이에타다는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후시미성에서 농성하다 전사했다.[1]
3대 고레타다 이후 '도노모노스케'(4대 이에타다부터는 '도노모노카미')라는 통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마쓰다이라 도노모 가'(松平主殿家)라고도 불린다.[1]
2. 2. 에도 시대
1601년(게이초 6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에타다의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토시는 염원하던 미카와의 옛 영지를 회복하여 후코즈 번 1만 석을 받았다. 1612년(게이초 17년) 다다토시는 3만 석으로 증봉되어 미카와 요시다 번으로 옮겨갔다.마쓰다이라 다다후사 대에 가리야 번, 후쿠치야마 번을 거쳐 1668년(간분 8년) 6만 5천 석으로 시마바라번에 봉해졌다. 1747년(간엔 2년) 우쓰노미야 번의 도다 다다미쓰와 교체되어 이봉되었지만, 1774년(안에이 3년)에 다시 시마바라 번으로 돌아왔다. 이후 8대에 걸쳐 시마바라 번을 지배하다가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2. 3. 메이지 시대 이후
마지막 번주 다다카즈는 1869년 6월 19일 판적봉환으로 시마바라 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지사를 역임했다.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達)에 의해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후코즈 마쓰다이라 가문도 다이묘 가문으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五爵) 제도가 되자, 다다카즈는 구 소번지사로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다다사다 대에 후코즈 마쓰다이라 자작가(子爵家)의 저택은 도쿄 시 시부야구 온덴에 있었다.
현 당주인 다다쓰구는 대장성(현재의 재무성)을 거쳐 국제 통화 기금(IMF)에서 근무하고 있다.
3. 역대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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