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원 (1559년)
1. 개요
정기원(1559년)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병조정랑, 호군 등을 역임하며 외교 및 군사 분야에서 활약했다. 정유재란 때 남원 전투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의 접반사로 참여했으나, 전투 중 순절했다. 사후 자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무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문집으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으며, 시호는 충의이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본관 | 하동(河東) |
|---|---|
| 자(字) | 덕수(德叟) |
| 호(號) | 서계(西溪) 설봉(雪峰) |
| 시호(諡號) | 문정(文貞) |
| 출생 | 1559년 |
| 사망 | 1626년 |
| 묘소 | 경기도 양주군 와야면 자좌사향(子坐巳向) |
| 관직 | 이조판서 대제학 좌찬성 우찬성 지경연사 한성부판윤 |
|---|---|
| 봉작 |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
| 아버지 | 정윤복(鄭允復) |
|---|---|
| 어머니 | 숙인 남양 홍씨(淑人 南陽洪氏) |
| 배우자 | 정경부인 청주 한씨(貞敬夫人 淸州韓氏) |
| 자녀 | 정온(鄭蘊) 정호(鄭頀) 정환(鄭鐶) 정주(鄭鑄) 정식(鄭鉽) 정징(鄭鉦) 정강(鄭鋼) 정현(鄭鉉) |
| 주요 사상 | 성리학 |
|---|
-
1559년 출생 -
모리 다카마사
모리 다카마사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다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 세키가하라 전투 후 분고 사이키 번주가 되어 성 축조와 성하마을 건설을 추진하고 막부의 여러 공사에 참여했다. -
1559년 출생 -
이토 스케타케 (1559년)
이토 스케타케는 1559년 휴가국에서 태어나 이토 요시스케의 차남으로, 규슈 정벌에서 공을 세워 다이묘로 복귀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고 세키가하라 전투 후 사망했다. -
과거 급제자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과거 급제자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
동래 정씨 -
정진석 (정치인)
-
동래 정씨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2. 생애
정기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명나라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파견되어 조선의 상황을 알렸고, 1596년에는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가 되어 심유경이 강화회담을 그르치고 왜군이 다시 침입해 올 것을 알렸다. 정유재란 때는 남원 전투에 참전했으나, 전투 중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순절하였다.
2.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정상신의 아들로 태어나 1585년(선조 1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가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을 거쳐 호조, 병조, 공조 좌랑 등을 지냈고 1588년(선조 21년) 경연기사관(記事官)으로 경연에 참여하여 강론하였다. 참찬관(參贊官) 황섬(黃暹), 시독관(侍讀官) 홍인상(洪麟祥), 검토관(檢討官) 조인득(趙仁得) 등과 함께 《통감강목(通監綱目)》의 동한 헌제기(東漢獻帝紀)를 진강하였다.
1589년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가, 형조좌랑으로 재직 중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미뤘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해 복직하여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7월 형조좌랑이 되었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2.2. 임진왜란과 외교 활동
1592년(선조 25년) 7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4년 의주 행재소(行在所)에서 임금을 만나 복명한 뒤 병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95년 초 다시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사헌부장령 겸 지제교가 되었다. 이후 사간원헌납·홍문관수찬·시강원문학·사간원사간·종부시정 등을 지내고 1595년에는 승정원동부승지, 우부승지까지 지냈다.
1596년(선조 29년)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로 가 심유경이 강화회담을 그르치고 왜군이 다시 침입해 올 것을 알리고 귀국했다. 1597년(선조 30년) 초 가선대부 예조참판을 거쳐 호군이 되었다. 바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해 8월 호군으로 남원에 파견되어 전라북도에 주둔중이던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접반사가 되어 남원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전투 도중 전세가 불리해져 양원(楊元)은 50기의 부하만 데리고 탈출했고, 정기원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39세였다.
2.3. 정유재란과 남원성 전투
1596년(선조) 고급주문사(告急奏聞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로 가 심유경이 강화회담을 그르치고 왜군이 다시 침입해 올 것을 알리고 귀국했다. 1597년(선조 30년) 초 가선대부 예조참판을 거쳐 호군이 되었다. 바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해 8월 호군으로 남원에 파견되어 전라북도에 주둔 중이던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접반사가 되어 남원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전투 도중 전세가 불리해져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만이 50기의 부하만 데리고 탈출했고, 접반사 정기원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39세였다.
3. 사후 추증과 평가
1597년 8월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에 추증되었으며, 남원의 칠충신사에 배향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으로 책봉되어 증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추증되고 내성군에 추봉되었다. 1605년 청난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06년 12월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시강원이사 내성군에 가증되었다. 칠충신사는 1612년(광해군 4년) 남원 충렬사의 사액이 내려졌다. 평소 문장과 글씨를 잘 썼으며, 문집으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다. 시호는 충의이다.
1965년 묘소 앞에 후손들이 다시 비석을 세웠고, 묘소 오른쪽 앞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4. 저서
* 《현산집》
* 《현산실기》 : 시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