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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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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인협은 동학, 천도교 관련 인물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고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했으며,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해방 후 천도교 원로로 활동하다 한국 전쟁 중 월남하여 부산에서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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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협
기본 정보
이름나인협
원어 이름羅仁協
매장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서울현충원)
출생일1872년 10월 08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성천(成川)
사망일1951년 04월 16일
사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범일동 피난민촌
거주지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국적대한민국
민족한민족(나주 나씨)
별칭천도교 도호(天道敎 道號)는 홍암(泓菴)
활동 기간1890년~1951년
교파동학(훗날 천도교로 개칭)
직업천도교인 겸 독립운동가
칭호 기간1906년~1919년 3월 2일
부모나석항(부)
친척형 2명
칭호대한제국 천도교 대교당 예하 제14대교구장
상훈[[파일:건국훈장2대통령장.png|x10px]]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추서)
웹사이트나인협(독립유공자 공훈록)

2. 생애

나인협은 1872년 5월 15일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태어났다.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고, 1904년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1906년 천도교 대교구장을 역임했으며,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가 투옥되었다.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의 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하다 평양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한국 전쟁 중 월남하여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 1951년 4월 16일 81세로 사망했다.

2. 1. 동학 입교와 동학 농민 운동 참여 (1890년 ~ 1894년)

1890년 동학에 입교하였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때 평안도 지역의 동학 교도들을 이끌고 참가했다.

2. 2. 갑진개화운동과 천도교 활동 (1904년 ~ 1919년)

1904년 나인협이 관장하던 동학교도가 급속도로 늘어나 10,000명 이상을 관리하는 대접주로서 의창대령에 임명되었다.

1904년 3월 나인협은 문학수, 이령수, 나용환, 김안실, 홍기억, 홍기조, 노양기, 임예환 등 평안도 지역 동학 지도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를 만났다. 손병희는 이들에게 국내에서 민회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1904년 9월 나인협을 비롯한 이들은 평양 영문 뜰 안에서 진보회를 개회하고,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일제히 단발을 행하였다. 이것이 소위 갑진개화운동이다.

1906년 천도교는 전국 각지에 72개 대교구를 설치하였는데, 나인협은 14교구장에 임명되었다.

2. 3.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년 ~ 1921년)

1919년 2월 25일, 경성부에서 평안도 지역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을 만나 3·1 운동 참가를 권유받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2월 27일,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 서명했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 4. 해방 이후 활동과 월남 (1945년 ~ 1951년)

1945년 해방 후 평안남도 성천에 머무르면서 천도교 원로로 활동하였다. 1946년 김달현을 중심으로 천도교청우당이 세워지고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자 나인협은 이에 반대 입장을 펼쳤다. 그로 인해 평양 감옥에서 6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4 후퇴 때 월남하였다.

월남 이후 부산 범일동 피난민촌에서 어렵게 생활하였으며, 1951년 4월 16일 오전 9시 25분 향년 81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4월 20일 정부 주관으로 영결식이 열렸다.

3. 사후

나인협은 1951년 4월 16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1973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기 전까지 22년간 부산 범일동에 안장되어 있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나인협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 1. 유해 이장 (1973년)

1951년 4월 16일 사후 22년간 부산 범일동의 어느 양지바른 야산 터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3. 2. 서훈 추서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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