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현 (1941년)
1. 개요
김달현은 194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북한의 정치인이다. 김일성종합대학과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국가과학원 부원장을 시작으로 정무원 위원회 위원장, 부총리 등을 역임했다. 1992년에는 김일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으며, 같은 해 강성산 총리 대행을 지냈다. 김일성의 신임을 받았으나, 김정일과의 갈등으로 인해 1993년 좌천되었고, 200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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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 표기 | 김달현 |
|---|---|
| 한자 표기 | 金達鉉 |
| 로마자 표기 | Gim Dalhyeon |
| 출생 | 1941년 1월 1일 |
|---|---|
| 출생지 | 평안남도 |
| 사망 | 2000년 8월 |
|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 모스크바 대학교 |
| 소속 정당 | 조선로동당 |
|---|---|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3회 |
|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임기 | 1982년 2월 ~ 1998년 7월 |
| 정무원 부총리 | 1990년 ~ 불명 |
| 정무원 국가계획위원장 | 1988년 2월 ~ 1993년 |
| 정무원 총리 대행 | 1992년 12월 ~ 1993년 |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8년 3월 ~ 불명 |
|---|---|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92년 2월 ~ 불명 |
| 훈장 | 김일성훈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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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살한 정치인 -
허가이
허가이는 소련파 북한 정치인으로,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에 핵심 역할을 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에는 암살 의혹이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살한 정치인 -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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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의 정치인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로동당의 정치인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
* 모스크바대학교
3. 경력
| 연도 | 직책 |
|---|---|
| 1977년 11월 | 국가과학원 부원장 |
| 1982년 2월 |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 |
| 1984년 8월 | 참사실장 |
| 1986년 11월 |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
| 1987년 3월 | 정무원 화학 및 경공업 위원회 위원장 |
| 1988년 2월 | 정무원 국가 계획 위원회 위원장 |
| 1988년 3월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
| 1988년 6월 | 정무원 대외 경제 위원회 위원장 |
| 1988년 9월 | 조선 국제 합영 총회사 이사장 |
| 1988년 10월 | 정무원 대외 경제 위원회 위원장 겸 정무원 무역부장 |
| 1990년 4월 |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 |
| 1990년 5월 | 정무원 부총리 |
| 1992년 12월 | 정무원 부총리 겸 국가 계획 위원회 위원장, 조선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
| 1993년 12월 | 2.8 비날론 연합 기업소 지배인 |
| 1994년 7월 | 김일성 국가 장의 위원회 위원 |
| 1995년 2월 | 오진우 국가 장의 위원회 위원 |
| 1996년 2월 | 리승기 국가 장의 위원회 위원 |
4. 활동
김달현은 1977년 국가과학원 부원장에 취임한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과학기술 및 경제 협력 관계 구축에 주력했다. 1988년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극받은 김일성 주석에게 경제 개혁에 대해 조언하고, 동유럽 혁명 당시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1990년부터 정무원 부총리에 취임하여, 1992년에는 김일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제 시찰을 위해 대한민국 서울을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을 하기도 했다.
1993년 9월 전국 가격 일꾼 대회(전국 상업인 대회) 개막식에 참석하였고, 11월에는 오스트리아 스노르덱스 社 대표단을 면담했다. 1999년 10월에는 함경남도에 건설되고 있는 제염소에 김정일 총비서 격려 메시지 전달하는 집회에서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참사로 소개되었다.
4.1. 해외 방문 및 외교 활동
* 1977년 11월 과학원 대표단장으로 동독, 불가리아를 방문했다.
* 1979년 8월 과학원 대표단장으로 제14차 태평양 학술 토론회 참석차 소련을 방문했다.
* 1988년 10월 정부 대표단장으로 니카라과, 쿠바, 페루를 방문했다.
* 1989년 8월 경제권 대표단장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 1989년 10월 경제권 대표단장으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 1990년 5월 경제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이란을 방문했다.
* 1990년 9월 경제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리비아를 방문했다.
* 1990년 10월 경제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 1990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와 무역 협정 조인, 연형묵 총리 수행 중국 방문했다.
* 1991년 6월 대외 경제 대표로 필리핀을 방문했다.
* 1991년 8월 경제권 대표단장으로 이란을 방문했다.
* 1992년 6월 러시아 사하 공화국 가스관 건설 의정서 조인했다.
* 1992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장으로 남북한간 경제 협력 논의차 서울을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을 했다.
* 1993년 7월 경제권 대표단장으로 비밀리 중동 지역 국가를 방문했다.
* 1993년 11월 오스트리아 스노르덱스 社 대표단을 면담했다.
4.2. 남북 관계
김달현은 1992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장으로 남북한 간 경제 협력 논의차 서울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김일성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으며, 김달현은 서울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4.3. 기타 활동
| 방문 국가 | 시기 | 내용 |
|---|---|---|
| 동독, 불가리아 | 1977년 11월 | 과학원 대표단장 |
| 소련 | 1979년 8월 | 과학원 대표단장, 제14차 태평양 학술 토론회 참석 |
| 니카라과, 쿠바, 페루 | 1988년 10월 | 정부 대표단장 |
| 소련 | 1989년 8월 | 경제권 대표단장 |
|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 1989년 10월 | 경제권 대표단장 |
| 이란 | 1990년 5월 | 경제 및 정부 대표단장 |
| 리비아 | 1990년 9월 | 경제 및 정부 대표단장 |
| 쿠바 | 1990년 10월 | 경제 및 정부 대표단장 |
| 체코슬로바키아, 중국 | 1990년 11월 | 체코슬로바키아와 무역 협정 조인, 연형묵 총리 수행 |
| 필리핀 | 1991년 6월 | 대외 경제 대표 |
| 이란 | 1991년 8월 | 경제권 대표단장 |
| 러시아 사하 공화국 | 1992년 6월 | 가스관 건설 의정서 조인 |
| 서울 | 1992년 7월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장, 남북한간 경제 협력 논의 |
| 중동 지역 국가 | 1993년 7월 | 경제권 대표단장, 비밀 방문 |
| 북한 | 1993년 9월 | 전국 가격 일꾼 대회(전국 상업인 대회) 개막식 참석 |
| 북한 | 1993년 11월 | 오스트리아 스노르덱스 社 대표단 면담 |
| 북한 함경남도 | 1999년 10월 |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참사, 건설 중인 제염소에 김정일 총비서 격려 메시지 전달하는 집회 |
5. 김일성, 김정일과의 관계 및 갈등
김달현은 1941년 일제강점기 평안남도에서 태어났으며, 북한의 초대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은 그의 외삼촌이다. 김일성은 김달현을 높이 평가하여 "우리나라에 김달현만큼 유능한 경제 간부는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경제 문제에 관해 항상 그와 상담하는 등 각별한 신뢰를 보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자극받은 김일성에게 경제 개혁에 대해 조언했고, 동유럽 혁명 당시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논의를 제기했다. 1992년에는 김일성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제 시찰을 위해 대한민국 서울을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12월 강성산 총리가 병으로 쓰러지자 김일성에 의해 총리 대행으로 지명되었다. 취임 후 경제 재건을 위해 군수 부문의 전력을 민수 부문에 투입하도록 지시했지만, 김정일의 측근인 전병호 군수공업부장이 따르지 않아 실패했다. 이후에도 식량 문제 등에 대해 계속 문제를 제기하자 김정일이 격노했다.
결국 1993년 국가계획위원장에서 해임되어 함경남도에 있는 2·8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김달현은 김정일에게 "노동자 계급의 배신자"로 비판받으며 좌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에는 김정일의 보복으로 김달현의 정적인 연형묵이 검열을 오자 이를 알고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