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원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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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능원대군은 조선 선조의 손자이자 원종(정원군)의 아들로, 임진왜란 중 평안도에서 태어났다. 1608년 숙부인 의안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광해군 시대에 정운원종공신과 익사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인조 반정 이후 1632년 능원대군으로 봉해졌고, 인조로부터 노비와 사랑채 등을 하사받았다. 1656년에 사망하여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능원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능원대군
한자 표기綾原大君
로마자 표기Neungwon Daegun
본관전주 이씨
이보 (李俌)
경숙(敬叔)
담은당(湛恩堂)
시호정효(貞孝)
출생
출생일1598년 5월 15일 (음력 1598년 4월 11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성천
사망
사망일1656년 1월 26일 (음력 1656년 1월 1일)
사망지조선 경기도 양주 이현, 시누이 저택
묘소능원군 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
가족 관계
아버지 (생부)원종
어머니인헌왕후 구씨
아버지 (양부)의안군 이성
배우자문화 유씨 문화부부인
영암 김씨 부부인
작위
수여 내역정원군의 아들, 능원수 → 능원군 → 능원대군
책봉 시기능원수: 1608년 (추정)
능원군: 1608년 ~ 1623년 5월 4일 (추정)
능원대군: 1623년 5월 4일
기타 정보
참고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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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천군 출신 - 박상준 (1876년)
    박상준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료이자 유학자로, 평안남도 참여관, 강원도지사 등을 역임하며 일제에 협력한 친일 행적으로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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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원종의 자녀 - 인조 (조선)
    인조는 조선의 제16대 왕으로, 인조반정으로 즉위했으나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침과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청나라의 신하국이 되었다.
  • 조선 원종의 자녀 - 능창대군
    능창대군은 조선 선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아들로 신성군의 양자가 되었으나, 광해군 때 역모 혐의로 유배되어 자결한 뒤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었고, 인평대군이 양자로 입적되어 왕실 가계에 영향을 미쳤다.
  • 조선 인조 - 인조반정
    인조반정은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의 폭정을 명분으로 일으킨 쿠데타이며, 광해군 폐위 후 인조가 즉위했으나 서인 세력 간의 갈등과 외침으로 조선 사회에 혼란을 가져왔다.
  • 조선 인조 - 정축하성
    정축하성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조선이 청나라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으나 청군의 빠른 진격과 보급 부족으로 인조가 항복을 결정하며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된 사건이다.

2. 생애

임진왜란 중이던 1598년(선조 31년)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원종)과 연주군부인 구씨(인헌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으며 한성부 정원군 사저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정원군은 선조인빈 김씨의 아들이며, 어머니 구씨는 구사맹의 딸이다. 형 능양군은 1623년(인조 원년)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동생 능창대군은 1615년(광해군 7년) 역모 혐의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살해당했다.

1608년(선조 41년), 11살 때 백부 의안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능원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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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
친아버지조선 원종 (1580년 ~ 1619년)
양아버지 (숙부)의안군 이성 (1577년 ~ 1588년)
조부조선 선조 (1552년 ~ 1608년)
조모인빈 김씨 (1555년 ~ 1613년)
어머니능성 구씨 인헌왕후 (1578년 ~ 1626년)
외조부구사맹 (1531년 ~ 1604년)
외조모평산 신씨 (1538년 ~ 1562년)
능양대군 이종 (1595년 ~ 1649년)
동생능창대군 이전 (1599년 ~ 1615년)
부인자녀
문화부부인 문화 류씨 (1598년 ~ 1676년)
영암 김씨 부부인 (1610년 ~ 1696년)


광해군의 왕비인 문성군부인 유씨의 사촌 유효립의 딸과 결혼했다. 광해군의 폐비 유씨와 그의 처 문화군부인 유씨는 친정쪽으로는 5촌 당고모와 당질녀간이지만 시가로는 시숙모-조카딸 간이 된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17년(광해군 10)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종척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참여한 다른 관료들은 처벌받았지만, 그는 처벌받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친형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1624년(인조 2년) 속공전 20결을 하사받았으며, 소덕대부에 가자되었다. 그러나 1625년(인조 3년) 양부 의안군의 종 정영신을 때려 죽여 물의를 빚었다.

1625년(인조 3년) 계운궁(인헌왕후)이 위독해지자 인조는 생모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현록대부를 제수하였다. 1626년(인조 4년) 계운궁이 사망하자 예조의 건의로 인조를 대신해 상주가 되었는데, 여러 대신들이 이미 의안군의 양자가 된 능원군이 계운궁의 상주가 될 수 없음을 간하였으나 인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인조는 능원군에게 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한성부 이현(梨峴)의 별궁(別宮)을 하사하였다. 1628년(인조 5) 9월 17일 소무원종공신 1등(昭武元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28년 유효립의 옥사가 발생하자, 능원군의 부인 유씨가 역적의 딸이므로 사묘(인조의 사친 묘)의 주부로 둘 수 없다며 파직을 청하였으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 옥당과 예조에서도 유효립의 딸이 낳은 자손들을 사묘에 봉사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인조는 군부인 유씨와의 이혼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는 능원군의 뜻을 받아들여 유씨를 첩으로 강등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631년(인조 9년) 자신의 종들을 풀어 금리의 처와 어미, 장모를 붙잡아다가 폭행하여 물의를 빚었다.

1632년(인조 10년) 음력 5월 4일, 인조능원군의 생부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고, 어머니 구씨는 인헌왕후로 추존되면서 능원대군(綾原大君)으로 진봉되었다. 이후 노비, 사랑채 등을 하사받고, 1645년(인조 23년)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이 보내온 예단의 일부를 받기도 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에게 역병이 돌아 도살을 금하고 소를 도살하는 자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문에 도살자들이 적발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노비 신분이 되어 소를 도살하는 일이 있었다. 이 도살자 중 38명이 능원대군 소속 노비가 되었는데, 1647년(인조 25년) 음력 2월 인조에 의해 전가사변 되었다. 1649년(인조 27년) 음력 3월에는 전국에서 바쳐지는 을 중간에서 불법으로 매수하고 되파는 수법으로 고가 이익을 챙겨 물의를 빚었으나, 인조의 배려로 별다른 처벌 없이 지나갔다.

1644년 심기원의 모반 사건이 진압된 이후, 1646년(인조 24년) 9월 영국공신(寧國功臣) 책봉 때 특별히 영국원종공신(寧國元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56년(효종 7년) 음력 1월 1일 향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며, 사후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에 있으며, 2002년 9월 16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하였다.

병자호란 발발 당시 청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여론이 거세짐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조판서였던 김상헌과 함께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호란이 진압된 뒤 척화파 신하들의 명단인 명나라 배신록에 실렸다.

초장지는 양주 풍양현 순강원 국내에 매장되었다가 정원군의 묘소는 후에 이장되고, 능원대군의 묘소는 숙종 기사 1689년(숙종 15) 8월 양주군 하도면 백록동 자좌(子坐)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우의정 조사우가 썼다.

후에 문화군부인 류씨와 합장하였고, 계부인 영암군부인 영암김씨는 합장묘소 앞에 매장하였다. 능원대군이보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에 있으며, 2002년 9월 16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2.1. 출생과 가계

아버지 정원군(원종)
아버지 정원군(원종)


임진왜란 중이던 1598년(선조 31년) 평안도 성천(지금의 평안남도 성천군)에서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원종)과 연주군부인 구씨(인헌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평안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으며 한성부 정원군 사저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정원군은 선조인빈 김씨의 아들이며, 어머니 구씨는 구사맹의 딸이다. 능원대군에게는 친형 능양군과 친동생 능창대군이 있었다. 형 능양군은 1623년(인조 원년)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동생 능창군은 1615년(광해군 7년) 역모 혐의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살해당했다. 정원군은 이 일로 상심하여 술을 가까이 하다가 1619년(광해군 11년) 음력 12월 29일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608년(선조 41년), 11살 때 백부 의안군의 양자로 입양되어 능원군에 봉해졌다.

능원대군은 20명의 손자와 45명의 증손자를 두었다. 그의 《신도(神道)》는 송시열과 조사우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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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
친아버지조선 원종 (1580년 ~ 1619년)
양아버지 (숙부)의안군 이성 (1577년 ~ 1588년)
조부조선 선조 (1552년 ~ 1608년)
조모인빈 김씨 (1555년 ~ 1613년)
어머니능성 구씨 인헌왕후 (1578년 ~ 1626년)
외조부구사맹 (1531년 ~ 1604년)
외조모평산 신씨 (1538년 ~ 1562년)
능양대군 이종 (1595년 ~ 1649년)
동생능창대군 이전 (1599년 ~ 1615년)
부인자녀
문화부부인 문화 류씨 (1598년 ~ 1676년)
영암 김씨 부부인 (1610년 ~ 1696년)

2.2. 광해군 재위 시기

그는 광해군의 왕비인 문성군부인 유씨의 사촌 유효립의 딸과 결혼했다. 광해군의 폐비 유씨와 그의 처 문화군부인 유씨는 친정쪽으로는 5촌 당고모와 당질녀간이지만 시가로는 시숙모-조카딸 간이 된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17년(광해군 10) 인목대비 폐비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종척의 자격으로 폐비 논의에 참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참여한 다른 관료들은 처벌받았지만, 그는 처벌받지 않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이 옥사한 직후, 능원대군은 정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이후 1613년(광해군 5년), 임해군이 투옥된 후 익사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그러나 4년 뒤인 1617년(광해군 10년)에는 인목왕후 폐위에 관한 논의에 궁궐의 어른으로서 참여했다.

2.3. 인조 재위 시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능원군의 친형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1624년(인조 2년) 능원군은 속공전 20결을 하사받았으며, 같은 해 소덕대부에 가자되었다. 그러나 1625년(인조 3년) 양부 의안군의 종 정영신을 때려 죽여 물의를 빚었다. 당시 대신들은 능원군의 치죄를 간하였으나, 인조는 헌부가 배반한 종들의 말만 믿고 수사를 공정하게 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대신들을 나무랐다. 이후 윤순지와 김유 등은 국가의 언로가 막힐까 두렵다는 상소를 올렸고, 인조는 자신에게 지나친 면이 있었다고 사과하였다.

1625년(인조 3년) 계운궁(인헌왕후)이 위독해지자 인조는 생모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능원군에게 현록대부를 제수하였다. 1626년(인조 4년) 계운궁이 사망하자 예조의 건의로 인조를 대신해 능원군이 상주가 되었는데, 여러 대신들이 이미 의안군의 양자가 된 능원군이 계운궁의 상주가 될 수 없음을 간하였으나 인조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능원군은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해임되는 관례에 따라 녹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았는데, 인조는 능원군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인조는 능원군에게 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한성부 이현(梨峴)의 별궁(別宮)을 하사하였다. 1628년(인조 5) 9월 17일에는 소무원종공신 1등(昭武元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1628년 유효립의 옥사가 발생하자, 양사는 능원군의 부인 유씨가 역적의 딸이므로 사묘(인조의 사친 묘)의 주부로 둘 수 없다며 파직을 청하였으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 옥당과 예조에서도 유효립의 딸이 낳은 자손들을 사묘에 봉사하게 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인조는 군부인 유씨와의 이혼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는 능원군의 뜻을 받아들여 유씨를 첩으로 강등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631년(인조 9년) 능원군은 자신의 종들을 풀어 금리의 처와 어미, 장모를 붙잡아다가 폭행하여 물의를 빚었다. 능원군은 인조에게서 추고하라는 명을 받자 오히려 화를 내며 이들을 가두고 고문까지 하였다. 이에 헌부에서 능원군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인조는 능원군의 종들에게만 죄를 주고 능원군의 파직은 윤허하지 않았다.

2.3.1. 대군 진봉 이후

1632년(인조 10년) 음력 5월 4일, 인조능원군의 생부 정원군이 논란 끝에 원종으로 추존되고, 어머니 구씨는 인헌왕후로 추존되면서 능원군도 능원대군(綾原大君)으로 진봉되었다. 이후 능원대군은 인조로부터 노비, 사랑채 등을 하사받고, 1645년(인조 23년)에는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이 보내온 예단의 일부를 받기도 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조선에서는 에게 역병이 돌아 도살을 일체 금하고 소를 도살하는 자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문에 도살자들이 적발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노비 신분이 되어 소를 도살하는 일이 있었다. 이 도살자 중 38명이 능원대군 소속 노비가 되었는데, 1647년(인조 25년) 음력 2월 인조에 의해 전가사변 되었다. 1649년(인조 27년) 음력 3월에는 전국에서 바쳐지는 을 중간에서 불법으로 매수하고 되파는 수법으로 고가 이익을 챙겨 물의를 빚었으나, 인조의 배려로 별다른 처벌 없이 지나갔다.

1644년 심기원의 모반 사건이 진압된 이후, 1646년(인조 24년) 9월 영국공신(寧國功臣) 책봉 때 특별히 영국원종공신(寧國元從功臣)에 책록되었다.

2.4. 사망과 사후

1656년(효종 7년) 음력 1월 1일 향년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며, 사후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지난 날 여러 사람을 죽이고 폭행했던 것을 비롯하여 여러 번 물의를 빚은 것과 달리, 《실록》의 능원대군 졸기에는 "집에서 거처할 때의 조심스러움과 점잖기는 여러 종실들이 따라가지 못하였다." 라고 적혀 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에 있으며, 2002년 9월 16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하였다.

병자호란 발발 당시 청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하는 여론이 거세짐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조판서였던 김상헌과 함께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호란이 진압된 뒤 척화파 신하들의 명단인 명나라 배신록에 실렸다.

한편 불학 무식하여 대의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유효립(柳孝立)이 형벌을 당한 뒤에는 그의 처와 마주보고 울면서 상을 원망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이 종전과 같이 함께 생활하였다는 평도 있다.

초장지는 양주 풍양현 순강원 국내에 매장되었다가 정원군의 묘소는 후에 이장되고, 능원대군의 묘소는 숙종 기사 1689년(숙종 15) 8월 양주군 하도면 백록동 자좌(子坐)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우의정 조사우가 썼다.

후에 문화군부인 류씨와 합장하였고, 계부인 영암군부인 영암김씨는 합장묘소 앞에 매장하였다. 능원대군이보묘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에 있으며, 2002년 9월 16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3. 평가

실록의 능원대군 졸기에는 "집에서 거처할 때의 조심스러움과 점잖기는 여러 종실들이 따라가지 못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병자호란 발발 당시에는 김상헌과 함께 청나라에 대한 척화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호란이 진압된 뒤 척화파 신하들의 명단인 명나라 배신록에 실렸다.

한편으로는 학식이 없어 대의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유효립(柳孝立)이 형벌을 당한 뒤에는 그의 처와 마주보고 울면서 상을 원망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고, 조금도 기탄하는 바 없이 종전과 같이 함께 생활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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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 (친부)조선 원종1580년 8월 2일1619년 12월 29일
아버지 (양부)의안군 이성1577년1588년 3월 20일숙부
조부조선 선조1552년 11월 26일1608년 3월 16일
조모인빈 김씨1555년1613년 12월 10일
어머니능성 구씨 인헌왕후1578년 4월 17일1626년 1월 14일
외조부구사맹1531년1604년 4월 1일문의공 능안부원군
외조모평산 신씨1538년1562년평산부부인
능양대군 이종1595년 12월 7일1649년 6월 17일
동생능창대군 이전1599년 7월 16일1615년 11월 17일
부인문화부부인 문화 류씨1598년 10월 27일1676년 8월 3일
부인영암 김씨 부부인1610년 3월 9일1696년 1월 25일
아들영풍군 이식?1692년
아들영은군 이함|
아들영신군 이형|
아들영춘군 이정|
아들이유|
이씨 부인|
이영정1639년1657년
이씨 부인|


능원대군은 20명의 손자와 45명의 증손자를 두었으며, 대부분 번성하며 살았다. 그의 《신도(神道)》는 송시열과 조사우가 지었다.

5. 기타

그의 묘는 2002년 9월 16일 대한민국 문화재청에 의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