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탈리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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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탈리아 공화국은 1839년 보어인들이 줄루 왕국을 격파하고 세운 국가이다. 그러나 통치력 부족으로 1842년 영국에 항복하여 나탈 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에 편입되어 나탈주가 되었고, 1994년 콰줄루나탈주로 개명되었다. 보어인들은 1830년대부터 나탈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블러드 리버 전투(1838년)에서 줄루족을 격퇴했다. 이후 영국은 나탈 지역을 점령하려 했고, 1843년 나탈을 식민지로 선포했다. 1879년 영국-줄루 전쟁 이후 줄루랜드를 합병했으며, 현재는 콰줄루나탈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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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어 공화국 - 고센국
고센국은 1882년 니콜라스 클라우디우스 게이 반 피티우스가 보어인 용병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선언하며 세워졌으나, 영국과 트란스발 공화국 간의 경쟁 속에서 1883년 영국에 합병된 남아프리카의 단명 국가이다.
나탈리아 공화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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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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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명 | 나탈리아 공화국 |
일반 명칭 | 나탈 |
존속 기간 | 대 trek 시대 |
정치 체제 | 공화국 |
수도 | 피터마리츠버그 |
공용어 | 네덜란드어 줄루어 영어 |
종교 | 네덜란드 개혁교회 |
통화 | 불명 |
정치 | |
정부 형태 | 공화국 |
입법부 | 폴크스라드 |
수상 |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 |
수상 임기 | 1839년–1843년 |
역사 | |
건국 사건 | 피의 강 전투 (1838년 12월 16일) 줄루족과의 동맹 (1840년 1월) |
건국 시기 | 1839년 10월 12일 |
멸망 사건 | 영국에 합병 |
멸망 시기 | 1843년 5월 12일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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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및 이후 | |
이전 국가 | 줄루 왕국 |
이후 국가 | 나탈 식민지 |
현재 국가 |
2. 역사적 배경
1497년 크리스마스 날,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남아프리카 동해안을 항해하며 '테라 나탈리스'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나탈리아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포르투갈은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응구니족이 거주했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인 부족 정착 상황은 불분명했다.
19세기 초, 줄루 왕국의 샤카 왕이 군사 작전을 통해 이 지역을 점령했다. 1835년에는 영국 상인들이 포트 나탈에 작은 정착지를 건설했고, 이는 더반 도시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1830년대 후반, 그레이트 트렉으로 이주해 온 보어인들이 줄루 왕국을 격파하고 1839년에 나탈리아 공화국을 건국했다.[1] 1838년 12월 16일 블러드 리버 전투에서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가 이끄는 보어인들이 줄루족을 크게 무찔렀고, 이 승리를 기념하여 서약의 날을 제정했다.[1]
보어인들은 줄루 왕국 내부의 갈등을 이용하여 딩가네 왕을 몰아내고 음판데 왕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1840년 마콩고 전투에서 딩가네 왕이 패배하면서 나탈리아 공화국은 생 루시아 만을 포함한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1]
그러나 영국은 보어인들이 해안에 독립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막기 위해 1838년 12월 4일 더반(포트 나탈)을 점령했다. 비록 1839년 12월 24일에 영국군이 철수했지만, 이는 나탈리아 공화국의 불안정한 미래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2. 1. 유럽인들의 도래와 정착
1497년 크리스마스 날, 바스코 다 가마는 현재 트란스케이로 알려진 지역을 항해하며 이 지역을 테라 나탈리스라고 명명했다. 그는 더반 항구 입구의 절벽을 발견했지만 상륙하지는 않았다. 이후 나탈리아라는 이름이 이 지역과 연관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나탈은 포르투갈인들의 무관심 속에 있었으며, 그들의 가장 가까운 정착지는 델라고아 만에 있었다.응구니족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으나, 어느 씨족이 정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투겔라강 북쪽에 거주하던 작은 씨족인 아마줄루는 지도자 샤카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으며, 1818년에서 1820년 사이에 그의 줄루 왕국의 군사 작전으로 이 지역이 점령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포트 나탈에 작은 정착지를 건설하여 1835년에 더반이라는 도시가 설립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2. 보어인들의 이주와 정착
그레이트 트렉으로 이주해 온 보어인들이 줄루 왕국을 격파하고 1839년에 나탈리아 공화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이후 보어인들이 건국한 오렌지 자유국이나 트란스발 공화국에 비해 통치 능력이 약하여 건국 초기의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1]2. 3. 블러드 리버 전투 (1838년)
연말 즈음에 보어인들은 증원을 받았다. 12월에 460명의 병력이 보어 장군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의 지휘하에 줄루족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1]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는 줄루족과의 전투와 보복전을 기록하기 위해 서기이자 비서로 얀 게릿제 반티스를 선택했다. 반티스는 1838년 11월 27일부터 1838년 12월 15일까지 부대의 진격을 매일 일기에 기록했다. 보어인과 줄루족 정찰병들은 서로의 행방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1838년 12월 9일, 보어인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이름을 기리는 기념관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세울 것을 약속한다"는 서약의 날로 알려진 맹세를 했다.1838년 12월 16일, 라거 근처 움슬라토스 강 또는 하마 웅덩이에서 줄루족 10,000명 이상에게 공격을 받았다.[1] 얀 반티스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2월 16일 일요일은 우리에게 새로 태어난 것과 같았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좋고 밝았다. (중략) 적들은 전속력으로 다가왔고, 갑자기 라거 주변 지역을 포위했다. 날이 밝아지면서, 우리는 이미 총에 맞아 물러선 그들의 선배 위로 접근하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빠른 접근(그들의 엄청난 숫자 때문에 목격하기 끔찍했지만)은 인상적인 광경이었다.영어
전투가 시작되었고 각 문에서 대포가 발사되어 매우 치열했다. 2시간 이상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후, 사령관은 기병을 보내 적과 싸우게 했다.
보어인들은 줄루족을 격퇴했다. 3시간 후, 보어인들은 수천 명의 줄루족을 죽였고 부상자는 12명 미만이었다. 줄루족은 패배하여 물러갔고, 많은 수가 피로 붉게 물든 강을 건너갔다. 이후 이 전투는 블러드 리버 전투로 알려졌으며, 현대의 보어인들은 매년 12월 16일에 서약의 날을 기념한다.[1]
2. 4. 영국군의 포트 나탈 점령
그레이트 트렉으로 이주해 온 보어인들은 줄루 왕국을 격파하고 1839년에 나탈리아 공화국을 건국했다.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와 그의 병사들은 남쪽으로 돌아가던 중, 영국군이 케이프 식민지에서 온 72연대 하이랜더 분견대를 이끌고 1838년 12월 4일 더반(포트 나탈)을 점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지 토머스 네이피어 케이프 총독(소장)은 나탈에 있던 영국 이민자들에게 식민지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고, 항구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영국 정부는 항구 점령은 승인했지만, 나탈을 영국 식민지로 만들 의도는 없었다. 영국은 보어인들이 해안에 독립 공화국을 세워 내륙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항구를 확보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하이랜더 부대는 1년 남짓 항구에 주둔하다가 1839년 12월 24일에 철수했다.2. 5. 딩가네 왕의 몰락
프레토리우스는 줄루 왕국 내의 불화를 이용하여 줄루 왕 딩가네의 형제인 음판데와 동맹을 맺었다. 딩가네는 부어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북쪽으로 왕국을 확장하려 했으나, 1839년 스와지족에게 패배하면서 그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프리토리우스는 소와 영토를 대가로 음판데가 딩가네를 몰아내려는 것을 지원하기로 했다. 부어군은 음판데의 줄루 임피가 딩가네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했다. 마콩고 전투에서 딩가네는 패배했고, 그를 따르던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프리토리우스는 36,000마리의 소를 빼앗았고, 생 루시아 만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나탈리아 공화국의 일부로 선포했다.[1]3. 나탈리아 공화국의 성립과 통치
그레이트 트렉으로 이주해 온 보어인이 줄루 왕국을 격파하고 1839년에 나탈리아 공화국을 건국했다. 그러나 오렌지 자유국이나 트란스발 공화국 등 다른 보어인 국가들에 비해 통치 능력이 약하여 건국 초기 혼란을 겪었다. 결국 1842년 영국의 공격을 받아 1843년에 항복했고, 영국의 나탈 식민지가 되었다.[1]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되면서 나탈리아 공화국은 연방을 구성하는 나탈주가 되었다. 이후 1994년 주 재편에 따라 현재의 콰줄루나탈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3. 1. 내정
보어인 지도자 피에트 레티프와 게리트 마리츠를 기려 피터마리츠버그를 건설했으며, 이곳을 수도이자 볼크스라드 소재지로 삼았다.[3]입법 권한은 24명으로 구성된 볼크스라드에 있었고, 대통령과 행정부는 3개월마다 바뀌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참석 희망자들이 모여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het publiek'' 회의가 열렸다.[3] 역사학자 조지 맥콜 틸은 "그 결과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였다. 어느 날의 결정이 다음 날 뒤집히는 경우가 많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법을 따르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 각 지역 사회의 그 시점의 여론이 그 땅의 유일한 힘이었다."라고 평가했다.[3]
3. 2. 영토 정책
줄루랜드의 줄루족은 북동쪽 영토에서 자치권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민족으로 존속했다.정착민들은 윈부르크와 포체프스트룸에 정착하여 케이프를 떠난 보어 공동체들과 느슨한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포트 나탈 공화국 및 인접 국가"라는 명칭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를 선언하고, 1840년 9월 조지 네이피어 경에게 영국의 독립 승인을 요청했다.[1]
조지 네이피어 경은 답변하지 않았지만 보어 농부들에게 우호적이었다. 1840년 12월 안드리스 프레토리우스 휘하의 코만도 부대가 코사를 공격했을 때 그는 불안해했다. 국가 정부는 나탈리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다른 유럽 열강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 수용을 조건으로 교역을 제안했다. 조지 네이피어 경은 1841년 9월 이 결정을 폴크스라드에 전달했다.[1]
3. 3. 영국과 네덜란드의 영향
보어인들은 영국이 인정된 영토 밖에서도 영국 국적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또한 영국령 나탈 항구(현재 더반으로 개명)에 대한 통제권을 원했다. 그들은 네이피어의 구애를 거절했다.[1]1841년 12월 2일, 네이피어는 보어인들의 코사족 공격을 이유로 나탈 항구에 대한 군사 점령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1842년 2월 21일 정착민들은 야코부스 보쇼프가 작성한 문서로 응답했다. 농부들은 대표 정부의 부재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영국군에 의한 그들의 영토 일부 점령에 대한 항의로 결론을 내렸다.[1]
얼마 지나지 않아 보어인들이 영국에 반대하도록 격려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42년 3월, 농민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암스테르담 상인 그레고리우스 오리그가 보낸 네덜란드 선박이 나탈 항구에 도착했다. 요한 아르놀트 스멜레캄프는 폴크스라드와 조약을 체결하여 네덜란드의 보호를 약속했다. 나탈 보어인들은 네덜란드를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라고 믿었으며, 네덜란드 정부가 영국에 저항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다.[1]
4. 식민지 정부로의 이양
보어인들이 그레이트 트렉을 통해 이주해 와 줄루 왕국을 꺾고 1839년에 나탈리아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오렌지 자유국이나 트란스발 공화국과 같은 다른 보어인 국가들에 비해 통치력이 약해 건국 초기부터 혼란을 겪었다. 결국 1842년 영국의 공격을 받고 다음 해에 항복하여 영국의 나탈 식민지가 되었다.
1843년 4월, 케이프타운에서 온 스탠리 경의 지시에 따라 나탈은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 정부는 가능한 한 국민의 의사를 따르기로 했지만, "피부색, 출신, 언어, 신앙의 차이에 따른 차별이나 자격 박탈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1]
조지 네이피어 경은 헨리 클로이트를 특별 위원으로 파견하여 나탈 민회에 이러한 정부 결정을 설명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나탈 보어인들은 여전히 영국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윈버그와 포체프스트룸에서 드라켄즈버그를 넘어온 보어인들이 이들의 반대 의사를 강화했다. 윈버그의 사령관 얀 모케 등은 민회가 영국에 복종하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고,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와 같은 지도자들을 살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국가의 혼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닫고 항복했다.[1]
1843년 8월 8일, 나탈 볼크스라드는 드라켄즈버그를 나탈의 북쪽 경계로 설정하자는 로드 스탠리의 제안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영국 통치를 거부한 많은 보어인들은 다시 산을 넘어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로 이주하여 자유를 찾았다. 1843년 말, 나탈에는 500가구 미만의 네덜란드 가족만이 남게 되었다.[1]
클로이트는 케이프로 돌아가기 전 음판데를 방문하여 투겔라 강을 나탈과 줄루랜드 사이의 공식 경계로 설정하고, 버팔로 강과 투겔라 강 사이의 영토를 나탈에 양도받는 등의 성과를 얻었다.[1]
4. 1. 콩겔라 전투 (1842년)
1842년 4월 1일, T. C. 스미스 대위는 263명의 병력을 이끌고 케이프 식민지 동부 국경의 움가지 야영지를 출발하여 육로로 더반에 도착, 5월 4일 베레아 언덕 기슭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항구 봉쇄에 대응하여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 지휘 아래 300~400명 규모의 코만도가 콩겔라에 집결했다.5월 23일 밤, 스미스는 부르인 야영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대포를 잃고 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5월 26일 부르인들은 항구와 정착촌을 점령했고, 5월 31일에는 영국군 야영지를 봉쇄했다. 프레토리우스의 제안에 따라 여성과 아이들은 부르인들이 점령한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로 옮겨졌다.
한편, 더반의 옛 거주민인 딕 킹은 영국군의 위태로운 상황을 그레이엄스타운 사령관에게 알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5월 24일 밤 출발하여 부르인 전초 기지를 피해 덤불 속을 달려 9일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는 직선 거리로 약 579.36km, 실제 이동 경로로는 거의 약 965.60km에 달하는 거리였다. 이 놀라운 질주는 폰돌랜드 선교사에게서 얻은 말을 교체하며 완수되었다.
A. J. 클로에테 대령 휘하의 증원군이 즉시 해상으로 나탈 항에 파견되었고, 6월 26일 스미스 대위가 구출되었다. 포위된 사람들은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았다. 2주 이내에 클로에테 대령은 피터마리츠버그 민회를 항복시켰다. 부르인들은 네덜란드의 보호를 주장했지만, 영국군 사령관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4. 2. 영국의 합병 과정
1843년 4월 23일, 케이프타운에서 접수된 스탠리 경의 훈령에 따라 나탈은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 정부는 가능한 한 국민의 뜻을 따르기로 했지만, "단순한 피부색, 출신, 언어 또는 신앙의 차이에 근거하여 법의 눈으로 어떤 차별이나 자격 박탈도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1]조지 네이피어 경은 헨리 클로이트(조시아스 클로이트 대령의 형제)를 특별 위원으로 임명하여 나탈 민회에 정부의 결정을 설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에 강력히 반대하는 나탈 보어인들이 많았고, 윈버그와 포체프스트룸에서 드라켄즈버그를 건너온 보어인들이 이들을 강화했다. 윈버그의 사령관 얀 모케(더반에서 스미스 대위를 포위하는 데 도움을 준 인물) 등은 민회가 복종하지 않도록 설득하려 했고,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 야코부스 보스호프 등의 지도자들을 살해하려는 계획까지 세워졌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가 빠져든 무정부 상태를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বুঝতে পেরে 결국 항복했다.[1]
4. 3. 식민지의 범위
1843년 8월 8일, 나탈 볼크스라드는 드라켄즈버그를 나탈의 북쪽 경계로 설정하는 로드 스탠리의 제안 조건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영국 통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많은 보어인은 다시 한번 산을 넘어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로 이동하여 자유와 독립을 추구했다. 1843년 말에는 나탈에 500가구 미만의 네덜란드 가족만 남아 있었다.[1]클로이트는 케이프를 돌아가기 전에 음판데를 방문하여 그로부터 귀중한 양보를 얻었다. 투겔라 강은 그 발원지에서 하구까지 나탈과 줄루랜드 사이의 공식적인 경계였다. 음판데는 버팔로 강과 투겔라 강 사이의 모든 영토를 나탈에 넘겨주었으며, 이 영토는 나중에 클립 강 군을 형성했다.[1]
5. 나탈 공화국 이후
보어인이 세운 나탈리아 공화국은 1842년 영국의 공격을 받고 1843년에 항복하여 영국의 나탈 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되면서 나탈주가 되었고, 1994년 주 재편으로 현재의 콰줄루나탈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5. 1. 영국 나탈 식민지 시대
1843년 영국의 나탈 식민지로 선포되었고, 1844년 케이프 식민지의 일부가 되었다가 1856년에 다시 분리되었다.[4] 1845년 마틴 웨스트가 부총독으로 임명되어 실질적인 영국 행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폴크스라트의 권력이 실제로 끝나지 않았다.[4]5. 2. 줄루 왕국과의 관계
1879년 영국-줄루 전쟁에서 영국은 줄루 군대를 격파하고, 1897년 줄루랜드를 나탈에 합병했다.[4]5. 3. 남아프리카 연방과 현재
1910년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됨에 따라, 나탈은 연방을 구성하는 나탈주가 되었다.[4] 1994년 주 재편으로 현재의 콰줄루나탈주로 이름이 바뀌었다.[4] 이곳은 여전히 줄루족의 본거지이며, 줄루어 사용자가 인구의 77.8%를 차지한다.[5] 또한 인도계 남아프리카인, 보어인 후손, 영국계 후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5]참조
[1]
웹사이트
Southern Africa - European and African interaction in the 19th century
https://www.britanni[...]
2020-01-14
[2]
웹사이트
4. The Republic of Natalia
http://www.volkstaat[...]
2020-01-14
[3]
서적
History of South Africa 1834 - 1854
G. M. Theal
[4]
백과사전
Natal
https://www.britanni[...]
2017-02-21
[5]
서적
Census 2011: Census in brief
http://www.statssa.g[...]
Statistics South Africa
[6]
EB1911
Na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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