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노부유키
1. 개요
난부 노부유키는 사쓰마 번의 다이묘 시마즈 시게히데의 아들로, 하치노헤 번의 8대 번주 난부 노부자네의 양자가 되어 하치노헤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막부 말기 삿초 동맹에 대항하여 도쿠가와 막부 편에 섰으며,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했으나, 구보타 번과 비밀 외교를 유지하여 하치노헤 번의 존속을 이끌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지번사를 거쳐 은퇴했으며, 187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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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칭 | 자작 |
|---|---|
| 이름 | 난부 노부유키 |
| 일본어 이름 | ja |
| 출생 | 분카 11년 1월 11일 (1814년3월 2일) |
| 사망 | 메이지 5년 2월 20일 (1872년3월 28일) |
| 다른 이름 | 호라노스케 (虎之助) (어린 시절 이름) 아쓰노조 (篤之丞) (어린 시절 이름) 시마즈 히사미 (島津久命) 난부 노부유키 (南部信順) |
| 씨족 | 시마즈 씨 → 난부 씨 |
| 아버지 | 시마즈 시게히데 |
| 어머니 | 다카기 겐타쓰의 양녀 오소미 |
| 양아버지 | 난부 노부마사 |
| 배우자 | 쓰루히메 (난부 노부마사의 딸) |
| 측실 | 후키 (에도 상인의 딸) |
| 자녀 | 히데노부 구니지로 야오히메 진히메 기요히메 케이히메 |
| 양녀 | 이쿠코 |
| 관위 | 종5위하 오미노카미 종4위하 시종 도토미노카미 |
|---|
| 막부 | 에도 막부 |
|---|---|
| 섬긴 쇼군 | 도쿠가와 이에요시 도쿠가와 이에사다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
| 주군 | 메이지 천황 |
| 영지 | 무쓰하치노헤 번 번주 → 하치노헤 번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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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치노헤 번주 재임 기간 | 1842년 ~ 1868년 |
|---|---|
| 이전 번주 | 난부 노부마사 |
| 이후 | < 지위 폐지 > |
| 하치노헤 현의 제국 통치자 | 메이지 천황 |
| 하치노헤 현 통치 기간 | 1869년 ~ 1871년 |
| 일본어 표기 | ja |
|---|---|
| 일본어 표기 | j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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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노헤번주 -
난부 히로노부
난부 히로노부는 에도 시대 하치노헤 번의 3대 번주로서 검지 실시와 하치노헤 산샤 대제의 기초를 다지는 등 번정 발전에 기여했지만 흉작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가로 나카자토 유키오에게 《난부 중흥기》와 《난부 가계》를 편찬하게 했다. -
하치노헤번주 -
난부 나오마사
난부 나오마사는 에도 시대 하치노헤 번의 2대 번주로, 영토 확정, 인구 조사, 문림전집 편찬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흉작으로 인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모아이 제도를 시행하고 쇼군의 소요닌을 역임했다. -
1814년 출생 -
홍수전
홍수전은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 기독교적 사상을 받아들여 태평천국을 건국하고 천왕으로 즉위하여 토지 개혁과 사회 개혁을 시도했지만, 내부 갈등과 청나라의 공격으로 사망하며 태평천국을 멸망시킨 중국의 농민 반란 지도자이다. -
1814년 출생 -
새뮤얼 콜트
새뮤얼 콜트는 1836년 회전식 권총 특허를 획득하고 콜트 패터슨 리볼버를 개발하여 실용적인 리볼버 시대를 열었으며, 호환 부품을 사용한 대량 생산 방식과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총기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의 발명가이자 기업가이다. -
1872년 사망 -
윌리엄 웨브 엘리스
윌리엄 웨브 엘리스는 1823년 럭비 스쿨에서 풋볼 경기 중 공을 들고 달려 럭비의 기원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럭비 풋볼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럭비 월드컵 우승 트로피인 웨브 엘리스 컵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
1872년 사망 -
새뮤얼 모스
새뮤얼 모스는 미국의 화가이자 발명가로, 초상화가로서 작품을 남겼으며, 아내의 사망 소식을 늦게 접한 것을 계기로 전신 시스템과 모스 부호를 발명하여 통신 기술 발전에 기여했고, 만년에는 정치적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2. 생애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8년(덴포 9년) 하치노헤 번의 제8대 번주 난부 노부자네의 사위 양자가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를 알현하고 종5위하 오미노카미(近江守)에 서임되었다. 1842년(덴포 13년) 5월 11일, 양아버지 노부자네의 은거(또는 사망)로 가독을 이어받아 제9대 하치노헤 번주가 되었다. 이후 관위가 올라 1855년(안세이 2년)에는 종4위하, 1861년(분큐 원년)에는 시종(侍従)에 임관되었다.
막말 시기에는 사쓰마 번의 후계 문제였던 오유라 소동에서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지지하며 형 구로다 나가히로와 함께 막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868년(게이오 4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의 출신이 동맹의 적대 세력인 사쓰마 번이었기에 동맹 내에서 의심을 받았고, 이에 노부유키는 동맹에 참여하면서도 신정부 측 구보타 번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등 신중한 외교를 펼쳐 전쟁의 피해 없이 번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메이지 2년) 6월 22일, 메이지 정부로부터 하치노헤 번 지번사로 임명되었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지번사 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장남 사키노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이듬해인 1872년(메이지 5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난부 사키노부(南部栄信, 1858–1876)는 도쿄로 이주했으나 건강 문제로 1876년 하치노헤로 돌아왔고, 가문의 재정난 해결을 위해 옛 하치노헤 번의 도쿄 저택을 가즈노미야 지카코 공주에게 15에 매각했다. 사키노부의 아들이자 노부유키의 손자인 난부 토시나리(南部利淳, 1872–1950)는 1884년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2.1. 출생과 가계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토라노스케( 虎之助일본어 ), 아츠노조( 篤之丞일본어 )였으며, 처음 이름은 히사노메이( 久命일본어 )였다.
덴포 9년(1838년), 하치노헤 번의 제8대 번주 난부 노부자네가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하치노헤 번은 나카쓰 번, 후쿠오카 번, 마루오카 번 등 여러 번에 의사를 타진했지만, 2만 석에 불과한 작은 고쿠다카 때문에 후계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사쓰마 번은 시게히데의 아들들이 많아 후계 문제에 여유가 있었고, 번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재정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시게히데의 다른 아들들은 나카쓰 번, 후쿠오카 번, 마루오카 번과 같은 유력 번으로 양자를 갔기 때문에, 2만 석에 불과한 소번인 하치노헤 번으로 노부유키가 양자로 가는 것은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결국 노부유키는 1838년 난부 노부자네의 사위 양자로 맞아들여졌다. 같은 해 12월 1일,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고멘(御目見)하였고,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종5위하 오미노카미(近江守)에 서임되었다.
한편, 노부유키는 사쓰마 번의 내부 문제였던 오유라 소동 당시, 개혁파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번주 자리를 계승할 수 있도록 친형인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나가히로와 함께 막부를 상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2.2. 하치노헤 번주 상속
사쓰마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토라노스케(虎之助), 아츠노조(篤之丞)였고, 처음 이름은 히사노메이(久命)였다.
덴포 9년(1838년), 하치노헤 번은 당시 번주였던 난부 노부자네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하치노헤 번은 나카쓰 번, 후쿠오카 번, 마루오카 번 등 여러 번에 후계자 의사를 타진했으나, 고쿠다카가 2만 석에 불과한 작은 번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얻지 못했다. 반면, 노부유키의 친가인 사쓰마 번은 번주 시게히데는 아들이 많아 후계 문제에 여유가 있었고, 다른 번과의 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재정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이러한 양측의 상황이 맞아떨어져, 노부유키는 하치노헤 번의 제8대 번주 난부 노부자네의 사위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시게히데의 다른 아들들이 나카쓰 번, 후쿠오카 번 등 유력 번으로 양자를 간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같은 해(1838년) 12월 1일, 노부유키는 에도 성에서 제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를 알현(고멘)하였다.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종5위하 오미노카미(近江守)에 서임되었다. 한편, 사쓰마 번 내부의 후계자 다툼인 오유라 소동에서는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번주 자리를 잇도록 지원하기 위해 친형인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나리히로와 함께 막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덴포 13년(1842년) 5월 11일, 양아버지 난부 노부자네가 은거(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하자 가독을 상속받아 하치노헤 번의 제9대 번주가 되었다. 이후 안세이 2년(1855년) 12월 16일에는 종4위하로 승진하였고, 분큐 원년(1861년) 12월 16일에는 시종(侍従)에 임관되었다.
2.3. 막부 말기의 활동
오유라 소동 당시, 친형인 후쿠오카 번주 구로다 나가히로와 함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사쓰마 번주 자리를 잇도록 도쿠가와 막부에 운동했다. 1855년 (안세이 2년) 12월 16일, 종4위하로 승진했으며, 1861년 (분큐 원년) 12월 16일에는 시종(侍従)에 임관했다.
1868년 (게이오 4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하치노헤 번은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며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다. 그러나 노부유키의 출신 가문이 동맹의 주요 적대 세력인 사쓰마 번이었기 때문에, 하치노헤 번은 동맹 내에서 처음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노부유키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는 가로(家老)를 보내 참여하는 한편, 관군 편에 선 이웃 구보타 번과 비밀리에 연락을 유지하며 양측 사이에서 신중한 외교를 펼쳤다. 그의 이러한 현실적인 외교 노력 덕분에 하치노헤 번은 실제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메이지 유신의 격동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보신 전쟁 종결 후,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1869년 6월 22일 노부유키를 하치노헤 번 지번사(知藩事)로 임명했다. 1871년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지번사 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장남인 요시노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다음 해인 1872년 (메이지 5년)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4.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난부 노부유키는 삿초 동맹에 대항하여 도쿠가와 막부 편에 서서 하치노헤 번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그의 출신 배경이 사쓰마 번이었기 때문에, 동맹 내부에서는 그를 경계하는 시선이 존재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노부유키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는 번의 중신인 가로(家老)를 보내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신정부 측에 가담한 구보타 번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신중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하치노헤 번은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메이지 유신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무사히 넘기며 번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22일, 노부유키는 새롭게 수립된 메이지 정부로부터 하치노헤 번 지번사로 임명받았다. 하지만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 정책이 시행되면서 번 지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장남인 요시노부에게 가문을 잇게 하고 공직에서 은퇴했다. 이후 메이지 5년(1872년)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5. 사망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하치노헤 번 지번사직을 사임하였다. 같은 해에 가독을 장남인 요시노부에게 물려주었다. 다음 해인 메이지 5년(1872년)에 향년 59세로 사망하였다.
3. 일화
* 니치렌종 후지파・다이세키사 계통(현재의 니치렌 정종)의 신도(단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신진 시대부터 이어져 온 박해(하치노헤 법난)에 시달렸던 다이세키사 계통 신도들을 법난에서 구제하는 데 힘썼다. 자신도 가영 6년(1853년)경 시마즈 나리아키라, 덴쇼인과 함께 다이세키사 신앙에 깊이 귀의했다. 이후 안세이 시대부터 하치노헤 번 내의 오바쿠 종 겐추 사(폐사) 인수를 추진하여, 분큐 원년(1861년)에 다이세키사의 말사인 겐추사를 창건했다.
* 고향인 가고시마를 그리워하여 사쓰마식 정원을 하치노헤 번 영지에 조성했다. 이 정원은 헤이세이 17년(2005년)에 "난부 가테이엔"(하치노헤시)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일반에 공개되었다. 또한, 의붓 증손자인 히사히데(난부 토시카츠의 넷째 아들)는 친척 관계를 통해 시마즈 가문 분가 중 하나인 카지키 시마즈 가문(남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4. 가계
난부 노부유키는 사쓰마 번의 다이묘 시마즈 시게히데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8년, 하치노헤 번의 후계자를 찾던 중 난부 노부자네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요시 쇼군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842년 전임 번주 난부 노부마사가 사망하면서 하치노헤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 구분 | 이름 | 비고 |
|---|---|---|
| 부모 | 시마즈 시게히데 | 실부 |
| 오소미 | 실모, 다카기 겐타쓰의 양녀, 스기우라 사쿠베 마사노부의 딸 | |
| 난부 노부자네 | 양부 | |
| 정실 | 쓰루히메 | 난부 노부자네의 여덟째 딸 |
| 측실 | 후키 | 에도 상가의 딸 |
| 자녀 | 난부 에이신 (장남) | 생모는 후키 (측실) |
| 난부 구니지로 (차남) | 요절 | |
| 야오히메 | 시마즈 다카아쓰의 정실 | |
| 니히메 | 요절 | |
| 세이히메 | 요절 | |
| 게이히메 (도우시) | 구시게 다카요시의 부인, 이후 가토 아키자네의 계실 | |
| 양녀 | 이쿠코 | 우에무라 이에쓰보의 부인, 우에무라 이에타카의 딸 |
그의 아들 난부 사키노부(1858–1876)는 하치노헤에서 도쿄로 이주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876년 하치노헤로 돌아왔다. 그는 가문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옛 하치노헤 번의 도쿄 저택을 가즈노미야 지카코 공주에게 15에 매각했다. 사키노부의 아들 난부 토시나리(南部利義, 1872–1950)는 1884년 화족 제도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