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덴쇼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덴쇼인은 1836년 사쓰마 번의 시마즈 타다타케의 딸로 태어나, 1856년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 부인이 되어 오오쿠에 들어갔다. 1858년 남편 이에사다와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사망한 후 덴쇼인이라는 이름을 받고 종3위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동안 에도 성의 평화로운 항복을 돕고,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양육했으며, 1883년 사망하여 간에이 사에 묻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마이즈미 시마즈가 - 시마즈 다다타케
    시마즈 다다타케는 에도 시대 이마이즈미 시마즈 가문의 당주로, 하나오카 시마즈가에서 양자로 왔다가 이마이즈미 시마즈 가문을 이었으며, 즈쇼 히로사토의 도움으로 가문의 재정 개혁을 이루고 그의 딸 덴쇼인은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이 되었다.
  • 막말의 오오쿠 관련자 - 이치조 미카코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실 부인인 이치조 미카코는 본래 약혼녀의 대역으로 요시노부와 결혼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별거하며 개명 후 유방암으로 사망했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여러 창작물의 소재가 되었다.
  • 막말의 오오쿠 관련자 - 호켄인
    호켄인은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측실로, 이에사다 사후 사쿠라다 고요야시키로 거처를 옮겼다는 설과 오오쿠로 복귀했다는 설이 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의 삶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중 매체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 에도 막부의 미다이도코로 - 다카쓰카사 노부코
    다카쓰카사 노부코는 도쿠가와 마사코를 고미즈오 천황의 중궁으로 삼는 데 관여하고,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결혼하여 에도 성 오오쿠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일화를 남겼으며, 쓰나요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 에도 막부의 미다이도코로 - 스겐인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딸인 스겐인은 도요토미 히데카쓰와 사별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재혼하여 2대 쇼군비가 되었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생모이다.
덴쇼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덴쇼인 아쓰히메 사진
덴쇼인
출생명오카쓰 (於一)
다른 이름아쓰코 (篤子)
아쓰히메 (篤姫)
후지와라노 스미코 (藤原敬子)
덴쇼인도노 주산미 (天璋院殿従三位)
겐지 미나모토노 아쓰코 (源 篤子)
출생일1836년 2월 5일
출생지일본, 사쓰마 번, 가고시마시 가미타쓰오 정 (현재의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오오다쓰 정)
사망일1883년 11월 20일 (향년 47세)
사망지일본, 도쿄부 도요타마 군 센다가야 촌 (현재의 도쿄도 시부야구 센다가야)
사망 원인뇌출혈
묘지도쿄도 다이토구 간에이지
국적일본
신분
직업미다이도코로 (御台所)
가족 관계
배우자도쿠가와 이에사다
양아버지시마즈 나리아키라
고노에 다다히로
친척이마이즈미 시마즈 가문
기타 정보
알려진 정보에도 막부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 부인
종교불교
법명덴쇼인도노 주산미 교슌테이죠다이시 (天璋院殿従三位敬順貞静大姉)

2. 생애

가에이 6년(1853년), 사쓰마 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가 되어 그해 8월 21일에 가고시마에서 출발, 구마모토를 거쳐 에도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가고시마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나리아키라의 양녀가 된 것은, 쇼군 가에서 시마즈 가로 혼담이 들어와 막부에 출가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부인들이 차례차례 요절하고, 이에사다 자신도 병약하여 자식이 없어, 시마즈 가 출신의 정실을 맞아 장수하고 자식도 많이 두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본받고자 했다. 다만, 다이묘의 친딸이었던 고다이인에 비해 덴쇼인은 시마즈 가문 중에서도 분가 출신이어서 히토쓰바시 파 내에서조차 "[미다이도코로](쇼군 정실)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신분이 아니냐"는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세이 3년 (1856년), 우대신 고노에 다다히로의 양녀가 되어 그해 11월에 쇼군과 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안세이 5년(1858년) 7월에 양부 나리아키라, 8월에는 이에사다가 급사하고 14대 쇼군에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취임하게 되어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다. 이에사다의 죽음으로 삭발하여 이후 덴쇼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막부는 공무합체론을 내세워 분큐 2년(1862년) 쇼군 이에모치와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황녀의 혼인을 결정하게 된다. 사쓰마 번은 덴쇼인의 귀향을 청하지만, 덴쇼인은 이를 거부하고 에도에 남았다.

가쓰 가이슈와 회담에서 자신이 옹립할 예정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험악한 분위기에서 만났다고 하며, 1866년에는 요시노부의 오오쿠(쇼군의 저택) 개혁에 가즈노미야(이에모치 사후 세이칸인노미야(静寛院宮)로 불림)와 함께 저항했다. 게이오 3년(1867년)에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실시해 에도 막부가 소멸하고 에도 성에 정부군이 무혈 입성할 때, 자신의 친가인 시마즈 가에 탄원하여, 조정에 탄원한 가즈노미야와 함께 도쿠가와 가 구제 및 요시노부의 구명에도 힘썼다. 하지만 요시노부와 개인적인 사이는 좋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된 이후, 이에사다의 생모인 혼주인, 이에모치의 생모인 짓세인, 다야스 가메노스케[13]와 함께 살았다.[14] 메이지 시대에는 도쿠가와 가의 원조를 받았으나, 사쓰마 가의 원조는 거절했다.[15]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양자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영국으로 유학 보내고, 이에사토의 약혼자인 고노에 야스코[16]의 신부 수업을 돕는 등 이에사토의 양육에 힘썼다.

메이지 16년 (1883년) 11월 20일에 도쿄의 히토쓰바시 저택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며칠 후 향년 48세로 사망하였다. 도쿄 다이토구 우에노사쿠라기의 절 간에이지(寛永寺)에 있는 남편 이에사다 무덤 옆에 매장되었다.

2. 1. 탄생과 쇼군가 입성

덴포 6년 12월 19일(1836년 2월 5일), 이마이즈미 시마즈 가의 당주 시마즈 타다타케의 장녀로 사쓰마국 가고시마성 가고시마성 시모 가미타츠오마치 다이류지 바바(현재의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다이류초의 구역에 해당)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오카쓰(於一)였다.

가에이 6년(1853년), 사촌이자 사쓰마 번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21일에 가고시마를 육로로 출발하여 구마모토를 경유하여 에도 번저에 들어갔다. 안세이 3년(1856년)에는 우대신 고노에 타다히로의 양녀가 된 후, 그 해 11월에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정실이 되어 오오쿠에 들어갔다.

오오쿠에서 시마즈 가문에 혼담을 제안한 것은 이에사다가 쇼군이 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었다.[6] 호소쿠 마사타다의 연구에 따르면, "시마즈 가에서의 혼담 구상 자체와 쇼군 계승 문제는 무관계하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6]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병약하고 정실들이 잇따라 요절하여, 고다이인을 맞이했던 선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처럼 장수하고 자녀가 많기를 바랐다.[7] 시마즈 가는 류큐 왕국과의 밀무역 문제 등으로 인해 쇼군 가와의 인척 관계를 부활시키려 했다.[7]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덴쇼인을 양녀로 삼아 이에사다에게 시집보내는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덴쇼인은 시마즈 가의 분가 출신이었기에, 히토쓰바시 파 다이묘들로부터 "미다이도코로(쇼군 정실)로서는 신분이 너무 낮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8]

가와무라 키요오의 덴쇼인 초상화

2. 1. 1. 시마즈 가문과 덴쇼인

덴쇼인은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로, 1853년가고시마에서 에도로 거처를 옮겼다.[13] 이는 쇼군 가문에서 시마즈 가문으로 혼담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부인들이 요절하고 이에사다 자신도 병약하여 자식이 없었기에, 장수하고 자식이 많았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본받고자 시마즈 가문 출신의 정실을 맞이하려 한 것이었다.[13]

그러나 덴쇼인은 시마즈 가문의 분가 출신이었기에, 히토쓰바시파 내에서는 덴쇼인이 쇼군의 정실이 되기에는 신분이 낮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13] 한편으로는 덴쇼인이 번주의 정치적 임무를 받고 에도성에 갔다는 말도 전해진다.[13] 당시 쇼군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요시노부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덴쇼인을 도쿠가와 가문에 시집보냈다는 것이다.[13]

1856년, 덴쇼인은 우대신 고노에 다다히로의 양녀가 되어 그해 11월에 쇼군과 혼례를 올렸다.[13] 그러나 1858년에 양아버지 나리아키라와 남편 이에사다가 급사하면서, 덴쇼인은 자신의 정치적 사명을 완수할 수 없게 되었다.[13]

덴쇼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친아버지시마즈 타다타케(1806–1854)
친어머니오유키 부인
양아버지시마즈 나리아키라
양아버지고노에 타다히로
양어머니쓰네히메(1805–1858), 도쿠가와 나리아쓰의 딸이자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부인
양어머니시마즈 쿄코 혹은 이쿠히메(1807–1850)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여동생이자 고노에 타다히로의 부인
삼촌시마즈 히사미쓰
남편도쿠가와 이에사다
양자도쿠가와 이에모치


2. 1. 2. 쇼군 후계자 문제와 정략결혼

가에이 6년(1853년), 덴쇼인은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가 되었다. 그해 8월 21일 가고시마를 출발해 구마모토를 거쳐 에도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이후 다시는 가고시마 땅을 밟지 못했다.[6] 덴쇼인이 나리아키라의 양녀가 된 것은 쇼군 가에서 시마즈 가로 혼담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정실부인들이 잇따라 요절하고 본인도 병약하여 자식이 없어, 시마즈 가 출신의 정실을 맞아 장수하고 자식을 많이 두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본받고자 했다.[7]

하지만 덴쇼인은 시마즈 가문 분가 출신이었기에, 히토쓰바시 파 내부에서조차 "미다이도코로(쇼군 정실)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낮은 신분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8] 한편, 덴쇼인이 번주에게 정치적 임무를 받고 에도성에 들어갔다는 말도 전해진다. 당시 쇼군 후계자 자리를 두고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요시노부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덴쇼인을 도쿠가와 가에 시집보냈다는 것이다.

안세이 3년 (1856년), 덴쇼인은 우대신 고노에 다다히로의 양녀가 되어 그해 11월에 쇼군과 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안세이 5년(1858년) 7월에 양부 나리아키라, 8월에는 이에사다가 급사하고 14대 쇼군에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취임하게 되어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었다.

2. 2. 파란의 오오쿠

안세이 5년(1858년) 7월, 양부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남편 이에사다가 급사하고,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14대 쇼군으로 취임하면서 덴쇼인은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사다의 죽음으로 덴쇼인은 삭발하고, 이후 덴쇼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막부는 공무합체론을 내세워 분큐 2년(1862년) 쇼군 이에모치와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황녀의 혼인을 결정했다. 사쓰마 번은 덴쇼인에게 귀향을 요청했지만, 덴쇼인은 이를 거부하고 에도에 남았다.

가쓰 가이슈와의 회담에서 덴쇼인은 자신이 옹립하려 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험악한 분위기에서 만났다고 하며, 1866년에는 요시노부의 오오쿠(쇼군의 저택) 개혁에 가즈노미야(이에모치 사후 세이칸인노미야(静寛院宮)로 불림)와 함께 저항했다. 게이오 3년(1867년) 요시노부대정봉환을 실시해 에도 막부가 소멸하고 에도 성에 정부군이 무혈 입성할 때, 덴쇼인은 자신의 친가인 시마즈 가에 탄원하여, 조정에 탄원한 가즈노미야와 함께 도쿠가와 가 구제 및 요시노부의 구명에도 힘썼다.

하지만 덴쇼인은 요시노부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유내용
이에모치와 이에사다의 독살 의심덴쇼인은 이에모치와 이에사다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생각했다.
요시노부의 쇼군직 거절요시노부가 초기에 의도적으로 쇼군직을 거절했다고 생각했다.
요시노부의 칩거반막부세력과의 전쟁 때, 요시노부가 병력을 그대로 두고 에도성으로 돌아와 칩거해 버린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2. 2. 1. 가즈노미야와의 관계

가즈노미야와 덴쇼인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였다.[13] 그러나 황실 출신과 무가 출신이라는 서로 다른 배경에서 비롯된 생활 습관의 차이 때문에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14]

분큐 2년(1862년), 막부가 공무합체론에 따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고메이 천황의 여동생인 가즈노미야의 혼인을 결정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덴쇼인은 사쓰마 번의 귀향 요청을 거절하고 에도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가쓰 가이슈의 『가이슈 좌담』에 따르면, 두 사람의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해소되어 결국 화해했다고 전해진다.

게이오 2년(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오오쿠 개혁에 대해 이에모치의 사후 "세이칸인노미야"로 불리던 가즈노미야와 함께 덴쇼인은 강하게 반대했다.

2. 2. 2. 도쿠가와 요시노부와의 갈등

덴쇼인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13]

이유내용
이에모치와 이에사다의 독살 의심덴쇼인은 이에모치와 이에사다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생각했다.
요시노부의 쇼군직 거절요시노부가 초기에 의도적으로 쇼군직을 거절했다고 생각했다.
요시노부의 칩거반막부세력과의 전쟁 때, 요시노부가 병력을 그대로 두고 에도성으로 돌아와 칩거해 버린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866년에는 요시노부의 오오쿠(쇼군의 저택) 개혁에 가즈노미야(이에모치 사후 세이칸인노미야(静寛院宮)로 불림)와 함께 저항했다.[14]

2. 3.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도쿄로 이름이 바뀐 후에도 덴쇼인은 도쿠가와 종가를 지키는 데 힘썼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양자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영국으로 유학 보내고, 그의 약혼녀인 고노에 야스코의 신부 수업을 돕는 등 이에사토를 양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메이지 16년 (1883년) 11월 13일, 도쿠가와 종가 저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11월 20일 49세(만 47세 9개월 15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1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애도했으며[5], 그 모습은 "덴쇼인 장송의 그림"에도 그려져 있다. 덴쇼인은 우에노의 간에이 사 경내에 있는 남편 이에사다의 묘 옆에 묻혔다.

사후, 신정부로부터 종삼위를 다시 받았다. 덴쇼인은 자신의 소지금을 절약해서라도 아랫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임종 당시 소지금은 약 3JPY(현대의 30000JPY-40000JPY)밖에 없었다고 한다.

2. 3. 1. 도쿠가와 가문 수호

메이지 유신 이후, 덴쇼인은 친정인 사쓰마 번의 지원을 거절하고 도쿠가와 가문 사람으로서 사는 길을 택했다.[15] 도쿄 센다가야의 도쿠가와 종가 저택에서 생활하며, 생활비는 시마즈 가문이 아닌 도쿠가와 가문으로부터 받았다.

덴쇼인은 오오쿠의 엄격한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옛 막부 신하였던 가쓰 가이슈나 세이칸인노미야(가즈노미야)와 자주 만났으며, 도쿠가와 이에사토에게 영재 교육을 시켜 해외 유학을 보내는 등 도쿠가와 종가 16대 당주인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교육에도 힘썼다.[16]

2. 3. 2. 도쿠가와 이에사토 양육

덴쇼인은 다야스 가메노스케[13]와 함께 살았다.[14] 메이지 시대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원조를 받았으나, 사쓰마 가문의 원조는 거절했다.[15]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양자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영국으로 유학보내고, 이에사토의 약혼자인 고노에 야스코[16]의 신부 수업을 돕는 등 이에사토의 양육에 힘썼다.

에도도쿄로 개칭된 메이지 시대에, 덴쇼인은 가고시마로 돌아가지 않고 도쿄 센다가야의 도쿠가와 종가 저택에서 생활했다. 생활비는 토막 운동에 참여한 시마즈 가문에게서 받지 않고, 도쿠가와 가문의 일원으로서 행동했다. 오오쿠와는 다른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으며, 옛 막신 가쓰 가이슈나 세이칸인노미야(와노미야)와도 자주 만났다. 또한, 도쿠가와 종가 16대 도쿠가와 이에사토에게 영재 교육을 시켜 해외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3. 에피소드

덴쇼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사쓰마 번의 금전적 지원을 거절하고, 도쿠가와 가문의 일원으로 살았다. 자신의 소지금을 털어 이전 오오쿠 관계자들의 취업과 결혼을 도왔으며, 사망 후 남은 소지금은 3엔(현재 가치로 약 6만)뿐이었다.

2008년, 도쿄가쿠게이 대학 교수가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덴쇼인의 가마를 발견했다. 가마에는 덴쇼인만 사용한 "후타바 아오이 당초" 무늬, 덴쇼인 친가인 고노에 가의 "고노에 모란" 문양, "세 잎 아욱"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덴쇼인은 일본에서 처음 미싱을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매튜 페리 제독이 선물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3. 1. 종교

1853년 11월, 하치노헤번난부 노부유키의 권유로 양부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함께 현재의 일련정종 총본산 다이세키지(大石寺)에 귀의하였다. 만엔 원년(1860년)에는 다이세키지 제51대 법주 니치에이에게 51일간 하루 12시간의 창제 기도를 요청했다.[9][10]

3. 2. 반려묘

개를 좋아해서 결혼 전에는 재패니즈 스파니엘(재패니즈 칭)을 여러 마리 키웠지만, 남편 이에사다가 개를 싫어했기 때문에 오오쿠에 들어간 후에는 고양이(이름은 사토히메)를 길렀다.[11][12] 사토히메의 사료는 연간 25냥(현대 가치로 약 250만)이었고, 전용 전복 껍데기 모양의 식기를 사용했으며, 아츠히메와 함께 어전에서 식사를 했다. 목걸이는 홍견 끈, 방울은 은제였으며 매달 새것으로 교체했고, 대나무 바구니에 주름 비단 이불에서 잠을 재웠을 뿐만 아니라, 돌보는 사람도 3명이나 있었다.[11][12]

3. 3. 단발령과 폐도령

메이지 시대단발령폐도령이 시행된 이후, 덴쇼인은 자진해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고 한다.

3. 4. 유곽 방문

메이지 시대가쓰 가이슈와 함께 요시와라(유곽)에 간 적이 있다. 덴쇼인은 오이란에게 굉장한 흥미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7]

3. 5. 여행

덴쇼인은 평생 두 번 여행을 하였다. 첫 번째는 사쓰마에서 에도로 시집을 간 것이고, 두 번째는 하코네 도노사와 온천으로 간 것이다.[18]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쿄를 거의 떠나지 않았으며, 메이지 10년(1877년)에 하코네 도노사와에서 병을 앓던 가즈노미야를 문병하러 간 것이 유일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덴쇼인이 하코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가즈노미야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덴쇼인은 가즈노미야를 조문하고 화가를 보냈다.

4. 평가

덴쇼인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 평가


  • 에도 성 무혈입성에 기여: 메이지 유신 시기, 덴쇼인은 에도 성의 평화로운 항복 협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내전을 막고 근대 일본으로의 평화로운 전환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도쿠가와 가문 유지: 덴쇼인은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양육하며 도쿠가와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헌신했다. 이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가문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 포용력과 헌신: 덴쇼인은 정략결혼, 남편의 이른 죽음, 막부의 몰락 등 험난한 삶 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포용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정적 평가

  • 정략결혼의 희생양: 덴쇼인은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도쿠가와 이에사다와의 정략결혼을 강요받았다. 이는 개인의 행복을 희생시킨 봉건 시대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준다.
  • 보수적 가치관: 덴쇼인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고수하며 변화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한계로 지적된다.

종합적 평가덴쇼인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복잡한 현실을 반영한다. 덴쇼인이 보여준 포용력과 헌신은 현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5. 관련 작품

덴쇼인을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소설



; 만화

; 영화

; 텔레비전 드라마

연도방송사제목배우
1968년간사이 TV오오쿠미타 요시코→호조 마키코 (케이코 역)[1]
1983년간사이 TV오오쿠코바야시 마미→미바야시 쿄코 (오스미 역)[1]
1985년TV 아사히덴쇼인 아쓰히메사쿠마 료코[1]
1988년TV 도쿄꽃의 생애 이이 나오스케와 사쿠라다몬단 후미[1]
1990년NHK 대하드라마날아오르듯이후지 스미코[1]
1998년NHK 대하드라마도쿠가와 요시노부후카츠 에리[1]
2003년후지 TV오오쿠칸노 미호[1]
2008년NHK 대하드라마아츠히메미야자키 아오이[1]
2018년NHK 대하드라마세고 돈키타가와 케이코[1]
2021년NHK 대하드라마푸른 하늘을 꿰뚫어라카미시라이시 모네[1]
2023년NHK 드라마 10오오쿠후쿠시 소타 (남녀 역전 설정)[1]



;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 (NHK): 코바야시 유 (목소리)


; 연극


참조

[1] 문서 薩摩今和泉家の住居の出典
[2] 블로그 「膏肓記」歴史作家桐野作人のブログ2009年9月5日「篤姫幼名は「おいち」?」 http://dangodazo.blo[...]
[3] 서적 名前とは何か なぜ羽柴筑前守は筑前と関係がないのか 青土社 2011
[4] 뉴스 南日本新聞 2008-03-21
[5] 기타 篤姫最終回「篤姫紀行」
[6] 서적 旧事諮問録 岩波文庫
[7] 서적 幕末の大奥と薩摩藩 岩波新書(新赤版) 2007
[8] 서적 徳川将軍家の結婚
[9] 날짜 3月15日から4月5日まで
[10] 위치 妙光寺所蔵
[11] 웹사이트 幕末の大奥で自由恋愛できた唯一のサト姫 それは篤姫の愛猫でした https://bushoojapan.[...] GH 2018-02-26
[12] 서적 花葵―徳川邸おもいでばなし
[13] 문서 다야스 가메노스케는 후에 [[가즈노미야 지카코|세이칸인]](가즈노미야)의 지지를 받아 도쿠가와 가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그 이름을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로 개명하고 도쿠가와 종가 16대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
[14] 일기 가쓰 가이슈의 3남 우메타로와 결혼한 클라라 화이트닝의 일기인 クララの明治日記(클라라의 메이지일기)에 언급되어 있음
[15] 인용구 "나는 이미 도쿠가와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 이유였다.
[16] 설명 덴쇼인의 제2양부 고노에 다다히로의 손녀
[17] 어록 가이슈 어록
[18] 일기 덴쇼인의 일기
[19] 시 君が齢とどめかねたる早川の水の流れもうらめしきかな
[20] 일기 일기의 일부 : 도노자와에서 가즈노미야가 죽었다는 건물을 보았다. 북받쳐오르는 회한에 넘쳐 흐르는 눈물로 소매가 젖는 것을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