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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 (남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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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도는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벽련마을에서 약 2km 떨어진 섬으로, 배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배를 젓는 노(櫓)를 만드는 데 쓰이는 목재가 많이 생산되어 노도(櫓島)라 불렸으며, 섬의 모양이 삿갓을 닮아 삿갓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로, 서포 김만중과 자암 김구 등이 유배 생활을 했다. 2019년 기준 13가구, 17명의 주민이 거주하며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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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 (남해군) - [지명]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이름노도
위치남해
면적0.41km2
나라대한민국
행정 구역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인구 통계
인구17
인구 기준2019년 11월 31일
추가 정보

2. 지리

노도는 예부터 배 젓는 노(櫓)를 만드는 데 쓰이던 목재가 많이 생산되어 노도(櫓島)라 불린다. 삿갓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다 하여 삿갓섬이라고도 불린다. 면적은 0.41km2이다. 벽련마을 포구에서 약 2 km 떨어져 있는데, 배로 약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2019년 현재 13가구, 17명이 주로 북쪽 선착장 주변에 모여 살고 있으며,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면서 섬의 좁은 땅에서 농사를 짓기도 한다.

3. 역사

노도는 예부터 배 젓는 노(櫓)를 만드는 데 쓰이던 목재가 많이 생산되어 노도(櫓島)라 불렸으며, 섬의 모양이 삿갓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다 하여 삿갓섬이라고도 불린다.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하나로, 특히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서포 김만중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자암 김구는 13년간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으며, 남해문견록의 저자 유의양등 많은 유배객이 남해를 거쳐갔다.

3. 1. 유래

노도는 예부터 배 젓는 노(櫓)를 만드는 데 쓰이던 목재가 많이 생산되어 노도(櫓島)라 불렸다. 섬의 모양이 삿갓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다 하여 삿갓섬이라고도 불린다.

3. 2. 유배지

노도는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하나였다. 특히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서포 김만중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자암 김구는 13년간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조선 4대 서예가로 불리는 그는 남해를 찬양하는 경기체가 화전별곡을 그의 배소 노량에서 지었다. 후송 '''유의양'''은 남해의 유적, 절경, 세시풍속 등을 기행문체로 쓴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이 외에도 금산을 노래한 한시를 많이 남긴 남구만, 남천잡록의 저자 김용 등 많은 유배객이 남해를 거쳐갔다.

3. 2. 1. 서포 김만중

서포 김만중은 1689년(숙종 15) 노도로 유배되어 1692년(숙종 18) 56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유배 기간 동안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집필하였다.[1] 섬에는 김만중이 직접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시신을 잠시 묻었던 허묘(墟墓), 초옥이 있던 터가 남아 있으며, 서포김만중선생유허비와 안내판 등이 설치되어 있다.[1]

3. 2. 2. 자암 김구

기묘사화로 자암 김구 선생은 13년간 노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남해를 찬양하는 경기체가인 화전별곡을 노량에서 지었다. 김구는 조광조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희생된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3. 2. 3. 기타 유배객

후송 유의양은 남해의 유적, 절경, 세시풍속 등을 기행문체로 쓴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남해에는 이 외에도 금산을 노래한 한시를 많이 남긴 남구만, 남천잡록의 저자 김용 등 많은 유배객이 다녀갔다.

4. 현재

2019년 현재 13가구, 17명이 주로 북쪽 선착장 주변에 모여 살고 있으며,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면서 섬의 좁은 땅에 농사를 짓기도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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