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메데스 4세 필로파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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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코메데스 4세 필로파토르는 기원전 94년부터 기원전 74년까지 비티니아 왕국을 통치했다. 그의 생애는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갈등, 로마와의 관계,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연관성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형제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로 망명했고, 로마의 지원으로 왕위를 되찾았지만,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으로 다시 망명하는 등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다. 로마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카이사르와 성적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니코메데스 4세는 비티니아 왕국을 로마에 유증했고, 이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니코메데스 4세 필로파토르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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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메데스 4세가 묘사된 은화
왕국비티니아
통치 기간기원전 94년 – 기원전 74년
이전 통치자니코메데스 3세
후임비티니아는 로마 속주가 됨
아버지니코메데스 3세
어머니니사 또는 아리스토니카
자녀니사
로마자 표기Nikomēdēs Philopatōr
정치
직함비티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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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니코메데스 4세의 정확한 출생 연도나 왕위에 오르기 전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94년, 아버지 니코메데스 3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통치 초기 몇 년은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흑해와 아나톨리아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폰토스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로부터 점차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기원전 90년, 미트리다테스 6세가 지원한 이복 형제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에게 패배하여 로마로 피신해야 했다. 로마의 개입으로 왕위를 되찾았지만,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침공으로 다시 로마로 망명했고, 이는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기원전 84년,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니코메데스 4세는 다시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으나, 이후 비티니아는 로마의 더욱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80년에는 로마의 대사로 파견된 젊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관계로 인해 '비티니아의 여왕'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의 진위는 불분명하며, 카이사르 본인은 강력히 부인했다.

기원전 74년, 니코메데스 4세는 사망하면서 자신의 왕국 전체를 로마에 유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로마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비티니아를 로마 속주로 편입하기로 결정했으나, 이에 반발한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에 대항하면서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발발했다.

2.1. 초기 생애와 혈통

헤라클레아의 멤논은 니코메데스 4세가 니코메데스 3세와 그의 아내 니사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지만, 그라니우스 리키니아누스에 따르면 그는 니코메데스 3세와 아리스토니카라는 첫 번째 아내 사이의 아들이다. 그라니우스 리키니아누스는 아리스토니카가 니코메데스 4세가 태어난 지 9일 만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니코메데스 4세에게는 여러 이복 형제가 있었다.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으로 낳은 니사와 아버지의 첩 아그네 사이에서 태어난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가 있었고, 알려지지 않은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필라에메네스 3세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2.2. 즉위와 폰토스와의 갈등 (기원전 94년 ~ 기원전 90년)

기원전 94년, 아버지 니코메데스 3세의 뒤를 이어 비티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초기 몇 년은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흑해와 아나톨리아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망을 가진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점차 비티니아의 국경을 위협하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니코메데스 4세의 형제인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지원하여 기원전 90년에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소크라테스는 니코메데스 4세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로 인해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로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로마의 영향력 덕분에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왕위를 되찾은 후, 아퀼리우스는 니코메데스 4세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의 영토를 침략하도록 부추겼고, 이는 결국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의 보복 공격을 유발하게 된다.

2.3. 첫 번째 망명과 로마의 개입 (기원전 90년 ~ 기원전 84년)

니코메데스 4세의 통치 초기 몇 년은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 국왕은 비티니아의 국경을 점차 위협하기 시작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 공화국 말기 로마의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한 명이었다.

기원전 90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니코메데스 4세의 이복 형제인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지원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소크라테스는 니코메데스 4세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로 인해 니코메데스 4세는 이탈리아로 망명해야 했다. 로마는 당시 지역 내 영향력을 바탕으로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를 파견하여 니코메데스 4세를 다시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아퀼리우스는 니코메데스 4세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의 영토를 침략하도록 부추겼다. 이는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의 강력한 보복 공격을 유발했다. 니코메데스 4세는 다시 로마로 도망쳤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와 로마의 아시아 속주를 침공하여 정복하면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금과 은이 풍부한 동방 속주의 지휘권을 두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었다. 술라는 로마로 진군하여 마리우스를 불법화한 후 동방으로 향했고, 이후 3년간 미트리다테스 6세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결국 기원전 85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에게 평화를 요청했고,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폰토스의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니코메데스 4세는 기원전 84년에 비티니아의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2.4.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과 복위 (기원전 88년 ~ 기원전 84년)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니코메데스 4세의 형제인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지원하여 기원전 90년 니코메데스 4세의 군대를 격파하게 했다. 이로 인해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로마의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퀼리우스는 니코메데스 4세에게 미트리다테스 6세의 영토를 침략하도록 부추겼고, 이는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의 보복을 초래했다. 니코메데스 4세는 다시 로마로 도망쳤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아시아 속주를 침략하여 정복하면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에게 동방 속주들은 금과 은이 풍부한 지역으로 인식되었기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같은 유력자들이 이 지역의 지휘권을 두고 경쟁했다. 결국 술라가 로마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동쪽으로 진군하여 이후 3년 동안 여러 차례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85년, 거듭된 패배 끝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평화를 요청했고, 로마와 강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는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폰토스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조약에는 니코메데스 4세의 왕위 복귀를 인정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기원전 84년,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의 도움으로 비티니아 왕으로 복위하였다.

2.5. 로마의 영향력 증대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관계 (기원전 84년 ~ 기원전 74년)

기원전 84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의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끝난 후,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의 도움으로 비티니아의 왕위를 되찾았다. 이후 비티니아는 이전보다 더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80년, 젊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대사 자격으로 니코메데스 4세의 궁정에 파견되었다. 공식적인 임무는 비티니아의 자원을 사용하여 로마 함대를 건조하는 것이었으나, 카이사르가 왕과 함께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두 사람 사이에 동성애적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으로 인해 카이사르는 훗날 그의 정적들로부터 "비티니아의 여왕"이라는 경멸적인 별명으로 불리며 조롱당했다. 심지어 카이사르의 갈리아 로마 개선식에서는 "Gallias Caesar subegit, Caesarem Nicomedes라틴어"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니코메데스에게 정복당했다)는 노래가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이었다는 점을 암시했다.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성적인 관계가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정적들이 퍼뜨린 악의적인 소문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카이사르 본인은 이러한 소문을 강력히 부인했다.

기원전 74년, 니코메데스 4세는 사망하면서 자신의 왕국 전체를 로마에 유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로마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여 비티니아를 새로운 로마 속주로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에 반발하여 아르메니아 왕국 등과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하였고, 이는 결국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6. 비티니아 왕국의 멸망과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74년)

기원전 74년, 니코메데스 4세는 사망하면서 비티니아 왕국 전체를 로마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비티니아를 로마의 새로운 속주로 편입하기로 즉시 결정했다.

그러나 로마와 오랫동안 대립해 온 폰토스 왕국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러한 결정에 반발했다. 그는 비티니아에 대한 독자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니코메데스 4세의 죽음과 유증을 로마의 세력 확장을 저지할 기회로 삼고자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 왕국 등과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하여 군사 행동을 개시했으며, 이는 곧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3. 유산

기원전 74년, 니코메데스 4세는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 행동으로 비티니아 왕국 전체를 로마 공화국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로마 원로원은 이 유증을 받아들여 비티니아를 즉시 로마의 새로운 로마 속주로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비티니아 왕국의 독립이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로마의 오랜 경쟁자였던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비티니아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았고, 니코메데스 4세의 유증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왕국 등과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했으며, 이는 결국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이 되었다. 니코메데스 4세의 죽음과 유증은 결과적으로 로마의 동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로마와 폰토스 간의 오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